소설리스트

낚시로 인생 역전-94화 (94/130)

[제94화] 캡틴

연말이 가까운 어느 날 저녁.

나와 멤버들 모두는 비좁은 아지트에 모여 있었다.

“돌아온 사시미 님을 위하여!”

“위하여!”

사심희의 무사 복귀와 저물어 가는 한 해를 자축하는 자리였다. 테이블 위에는 배달된 중국요리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술잔에는 고량주가 찰랑거렸다.

“사시미 님은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되겠어. 우럭 님 안달복달하는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지쳤다니까.”

고동우의 넉살은 그나마 들어 줄 만했다.

그러나 이어진 보람이와 장재준 영감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덕분에 나는 베타랑 잔뜩 정이 들었어요. 시도 때도 없이 남의 집에 맡겨 놓으니 제일 큰 피해자는 베타가 아니었나 싶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해도, 그 길로 미국으로 날아가더군요. 내 말을 들었으면 그 비싼 비행기값을 아꼈을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어차피 한차례 맞아야 할 소나기였다.

이럴 때는 입을 꾹 닫고, 실실 웃으며 버티는 것이 최선이다.

다행히 화젯거리가 바뀐 것은 고동우가 장재준 영감에게 요즘 근황을 물으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캡틴 님, 요즘에는 날씨도 추워졌는데 배달 일은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제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 그래요? 잘 생각하셨어요. 빙판길도 미끄럽고 사고라도 날까 걱정했습니다.”

“딱히 겨울이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만. 음……. 말이 나온 김에…….”

장재준 영감이 뭔가 말하려다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그가 작심한 듯 진지한 얼굴이 되어 우리를 둘러보았다.

뭔데 저렇게 뜸을 들이실까.

중대 발표를 앞둔 사람처럼 연신 헛기침만 연발하니, 모두들 그의 입만 쳐다보게 되었다.

“사실은 제가 준서를 입양할 계획입니다.”

이어진 그의 말에 반은 놀라고, 나머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쪽에 속했다.

준서와 처음 대면했을 때, 아이를 대하는 그의 시선에서 나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예감이 있었다.

고동우는 무척 의외라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다.

“연세가 많으신데 그게 가능은 한 건가요?”

“허허. 나도 솔직히 그게 걱정이었습니다. 다행히 여기저기 알아본 바로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겠더군요.”

“그런데 준서를 입양하는 일과 라이더를 그만두시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예리한 듯했지만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혼자 살고자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늘그막에 부모의 노릇을 하려니, 다른 일을 찾아야겠더군요. 준서에게 해 주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거든요. 허허.”

장재준 영감의 솔직한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환갑이 넘어 새로운 일을 찾으려는 이유는 역시 준서 때문이었다.

고동우가 이제야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와는 어느 정도 얘기가 된 건가요?”

“아닙니다. 내가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얘기를 꺼내려고 합니다. 아이가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싫다고야 하겠어요? 그건 그렇고, 지금부터라도 우리 가게에서 함께 일해 보시죠. 괜한 고생 하지 마시고.”

“마음은 알겠지만, 낚시점에서 제가 뭘 하겠습니까? 누차 말하지만 천덕꾸러기가 될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들 걱정 놓으세요.”

장재준 영감의 고집은 여전했다.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묵묵히 그의 결정을 축하해 주었다.

“어려운 결정을 하셨습니다. 다 같이 건배나 하시죠.”

“우럭 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군요.”

서로의 술잔이 부딪치고, 독주를 넘기면서 다들 인상을 쓰는 동안 내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 장재준 영감이 나서 줘야 할 일을 시작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대화는 무르익어 모든 멤버들은 새해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탄 김에 나는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꺼내 놓았다.

“다들 연말에 바쁘겠지만, 오랜만에 다 함께 출조를 하는 건 어떨까요? 새해 첫 일출을 보러 갈 겸 말입니다.”

“좋지. 안 그래도 요즘 낚시를 못 가 근질근질하던 참이다.”

“저야 하는 일도 없으니 언제나 환영이지요. 허허.”

고동우와 장재준 영감은 기다렸다는 듯이 찬성에 한 표를 던졌다. 보람이는 그제야 머리를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가겠습니다. 직원들 눈치가 보이지만, 하루만 시간을 내 볼게요. 그런데 뭘 잡으러 가려고?”

보람이가 묻자, 나는 장난기 섞인 눈빛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도라에몽!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낚시꾼이 새해 일출을 보면서 무슨 낚시를 하겠냐?”

“일출이라면 동해 쪽일 테고. 그렇다면…… 어구가자미?”

“바로 그거야! 어구가자미 시즌이 왔잖아. 간만에 가자미 세꼬시나 즐겨 보자고.”

어구가자미.

물가자미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대표적인 겨울철 낚시 어종이다.

“세꼬시?”

“가자미 세꼬시라……. 갑자기 입맛이 당기네.”

피싱 어벤저스의 새해 각오를 다지기 위한 첫 출조.

멤버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가자미 세꼬시 생각뿐이었다.

* * *

12월 31일.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되었던 한 해가 저물고 있었다. 지금에서 돌이켜 보면 아홉수라는 것도 모두가 헛말이었다.

나는 안양의 심야 식당에서 사심희와 연말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따끈한 오뎅 국물을 마시던 사심희가 불쑥 물었다.

“지난 한 해 동안 후회되는 건 없었어요?”

“없었어. 오히려 회사를 박차고 나오길 너무 잘했던 것 같아.”

“하긴……. 지금까지 회사에 있었다면 저와 만날 수도 없었겠죠.”

“아, 그런가? 하하하.”

닭살을 동반하는 평범한 연인들의 대화였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크리스마스이브 이후로 우리들의 관계는 한 단계 발전된 형태로 변모해 있었다.

창밖으로 야경을 감상하던 사심희가 슬며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캡틴 님은 언제 모시러 가죠?”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어.”

“말이 나와서 그런데, 지난번 캡틴 님 얘기 어떻게 생각해요?”

“준서를 입양하겠다는 거? 서로에게 행복한 일이겠지.”

“저도 동감이지만, 그거 말고요.”

“그럼?”

“캡틴 님이 새로운 일을 찾으신다는 얘기 말예요.”

“아아, 그거? 너무 걱정 마. 경륜이 많으신 분이니까 알아서 잘하실 거야.”

“우럭 님이 좀 도와주실 수는 없나요?”

“글쎄…….”

나는 길게 말꼬리를 흐렸다.

때마침 식당 안에 틀어 놓은 TV에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해피 뉴 이어, 사시미 님!”

“우럭 님도요. 새해 소원이 뭐죠?”

“난 이미 거의 모든 걸 이뤘어. 굳이 묻는다면 조만간 반지하 자취방에서 탈출하는 것 정도?”

“참 소박하네요.”

어설픈 농담으로 넘어가려다,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사실은 오늘 멤버들에게 내 소원을 말할 예정이야. 하지만 그건 내 두 번째 소원이니까 오해 말라구.”

“그럼 첫 번째 소원은 뭔데요?”

“그건 나중에 따로 말해 줄게.”

“나중에 언제요?”

“……올해가 가기 전에.”

그녀를 위한 진짜 내 계획은 따로 있다.

하지만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었다. 몇 가지 선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어 아직은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녀와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동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나는 두꺼운 점퍼를 걸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일어나자. 슬슬 동해로 떠날 시간이야.”

“벌써 그렇게 됐나요?”

심야 식당에서 나온 우리는 차를 몰고 장재준 영감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따로 가도 된다는데 굳이 오셨네요. 두 사람 데이트에 노인네가 훼방을 놓는 건 아닌지요. 허허.”

“데이트 아닙니다. 회사 시무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 두죠. 자, 얼른 출발합시다. 가자미가 우릴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장재준 영감을 태운 차는 하남의 아지트로 향했다.

고동우와 보람이가 승합차를 대기시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만에 새벽바람 쐬니까 죽이는구나!”

오랜만에 낚시를 떠나는 고동우는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새벽 2시.

누구도 잠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랜만의 출조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며, 승합차 안은 대화가 끊길 틈이 없었다.

대화 도중에 운전대를 잡은 고동우가 목적지를 재차 확인했다.

“공현진항이 아니라 가진항이라 이거지?”

“네. 모든 배들이 예약이 꽉 차서 그렇게 되었어요.”

“인기 없는 배라는 얘긴데, 아마 이유가 있을 거다.”

“저도 처음 타 보는 배라서 정보가 없어요.”

원래는 단골로 방문하던 공현진항의 V호를 통째로 예약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새해 일출을 감상하려는 낚시꾼들이 몰리는 바람에, 그나마 어렵사리 구한 자리였다.

세 시간이 넘는 수다 끝에 우리는 드디어 강원도 가진항에 도착했다.

항구에 인접한 주차장에서 내리자마자 보람이가 바다 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 좀 보세요! 해가 뜨고 있어요!”

“오오! 정말로 멋진 광경이군요.”

발갛게 물든 수평선 위로 손톱만 한 불덩어리가 솟구치고 있었다.

“빨리 소원 빕시다.”

바다를 향해 나란히 선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들 눈을 감았다.

그때 나는 실눈을 뜨고, 장재준 영감의 옆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제 서두릅시다. 출항이 30분밖에 남지 않았어요.”

일출의 감흥을 깨는 고동우의 잔소리였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주차장 곳곳에 낯익은 출조 버스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예약해 둔 출조점에 들어가 보니, 중년 사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서울에서 오신 손님들인가요? 다섯 분 예약하신.”

“예. 맞습니다. 선장님이세요?”

“그렇습니다. 좀 늦게 오셨네요. 다른 손님들은 전부 승선해 있는데.”

“아직 시간이 좀 남은 것 같은데…….”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일찍 나갔다가 일찍 오려고 했죠. 아무튼 오셨으니까 명부 작성하시고 얼른 오세요.”

선장은 퉁명스럽게 말하고 휙 출조점을 나섰다.

개인 일정을 들먹이다니, 어딘지 모르게 불친절해 보이는 선장이었다.

미끼로 쓸 갯지렁이와 카드 채비를 구입하고 우리는 서둘러 배에 올랐다.

21인승 낚싯배라 하지만, 다른 배에 비해 작아 보였다. 오래된 배라 그런지, 바닥에는 군데군데 파인 곳도 눈에 띄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승선하자마자 선장이 거칠게 배를 출발시켰다. 미끄러운 바닥에 무게 중심을 잃은 보람이가 난간을 붙잡으며 선실을 쏘아보았다.

“선장이 좀 와일드하시네.”

“신경 쓰지 마. 저런 선장도 처음 보냐?”

나는 보람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 낚싯짐부터 풀었다.

우리 일행에게 배정된 자리는 좌현 쪽 중간과 끝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추첨으로 정할 줄 알았는데, 손님들이 아무렇게나 알아서 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럴 수가…… 일행을 찢어 놓는 경우는 생전 처음 보네.”

고동우가 투덜거리는 동안, 나는 먼저 승선한 손님들의 양해를 구해 멤버들의 자리를 한데 모아야 했다.

잠시 후 나는 선수 갑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멤버들에게 다가갔다.

“오늘 잡게 될 가자미는 우리 먹을 것 빼고 이벤트 나눔을 합니다. 다들 알고 계시죠?”

“알다마다. 새해 기념으로 열 마리씩 보낼 거라고.”

“무조건 많이 잡으세요. 그래서 말인데, 다들 파이팅하시라는 의미에서 우리끼리 내기 낚시 어떻습니까?”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멤버들의 눈이 일제히 동그래졌다.

뜬금없는 내기 낚시 제안은 고집스러운 장재준 영감을 고려한 고육지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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