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낚시로 인생 역전-93화 (93/130)

[제93화]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틀 후, 12월 21일.

나는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을 사심희.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돌아오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키나와에 다녀와 불과 열흘 만에 다시 찾아온 내게, 보람이는 기가 막혀 고개를 가로저었다.

‘베타를 또 맡긴다고? 도대체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냐?’

‘멀리 바람 좀 쐬고 올란다. 미안하지만 며칠만 고생해 줘라.’

연말이 가까워 뉴욕행 비행편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은 퍼스트 클래스였다.

뉴욕까지는 비행시간은 대략 14시간.

오후에 출발한 비행기는 시간대를 거슬러 날아갔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기내식을 두 번이나 먹었는데도, JFK 공항에 도착하니 같은 날 오후였다.

그리 유창하지 않은 영어 실력에 처음 밟아 본 미국 땅은 무척 낯설었다. 예전에 직장에 다닐 때 가끔 중국에는 다녀온 적은 있었지만, 뉴욕은 영화에서만 봐 오던 곳이었다.

입국 심사대에서 검은 안경을 쓴 사내가 뭐라고 빠르게 물었고, 나는 준비한 짧은 문장을 더듬거리며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비즈니스 트립!”

공항을 빠져나와 나는 택시에 올랐다.

기사에게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휴대폰의 구글 맵으로 펼친 목적지를 가리키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운전기사가 내게 뭐라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냐는 부분을 알아들을 수 있어, 그렇다고 대답한 게 실수였다.

그 뒤로 택시 기사는 부쩍 말이 많아졌다.

‘스퀴드 게임’ 어쩌고 하는가 싶어 집중해서 들어 봤더니, 그가 나보고 그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배우를 닮았다며 키득거렸다.

처음에는 주인공을 말하는 거 같아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목에 뱀 문신 어쩌고 하는 소리로 미루어 험상궂은 악역 배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슬슬 피곤하기도 하고 말하기도 싫어져, 나는 눈을 감고 자는 척해야 했고 어느새 진짜로 잠이 들었다.

택시 기사가 큰 소리로 내게 다 왔다고 외쳤을 때는 뉴욕 도심의 거리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택시비를 계산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좌우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거리였다.

구글 맵에서 확인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사이로’는 두리번거리며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택시에서 내린 곳에서 5미터 정도 앞쪽에 사람들이 줄을 선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흰색 빛의 단층 건물이었다.

입구에 ‘CYRO’라 적힌 아주 조그만 간판이 보였다.

긴 줄의 끝에 서서 머뭇거리던 나는 잠시 후 현관문으로 성큼 걸어갔다. 마음이 급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려 지구의 반대쪽에서 날아온 것은 아니었다.

현관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는 내 등에서 뭐라고 궁싯거리는 소리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안에 사심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식당 입구에 있던 정장 차림의 사내가 두 손을 앞으로 들어 나를 가로막았다.

영어라서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불쑥 들어온 나를 보고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를 휙 지나쳤다. 그리고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식당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꽤 넓은 공간이었다.

좌우로 크고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빽빽하게 들어앉아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거의 대부분은 현지인들이었다.

“저, 손님! 잠깐만요.”

뒤에서 한국말로 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멈칫하고 뒤돌아보니, 바지 차림의 꽤 억세 보이는 중년의 여자였다.

“이렇게 입장하시면 곤란합니다. 밖에서 대기하시면 나중에…….”

나는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거의 10여 미터 앞…….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그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자초지종은 그녀를 만나고 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손님! 손님!”

나는 아예 뛰다시피 걸어가 주방에 가까이 다가섰다.

호흡이 가빠졌다. 주방과 홀을 연결하는 커튼 틈으로 그녀의 모습이 보인 것 같았다.

등을 돌린 채로 도마 위에 있는 뭔가를 열심히 손질하고 있는 여자. 요리 모자 아래로 내려온 머리칼이 영락없는 사심희였다.

나는 커튼을 젖히고 주방 안까지 들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사시미 님……!”

생각 같아서는 버럭 끌어안고 싶었지만, 난입자를 향해 쏟아진 수많은 눈동자들에 압도되어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여자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얼굴형도 사심희처럼 갸름한 형태가 아니라, 옆으로 퍼진 상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엉겁결에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내 눈동자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 틈에서 그녀를 찾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여기는 아무나 들어오는 데가 아닙니다!”

요리사들 틈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다가왔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뒤이어 따라 들어온 정장 차림의 여자가 사내에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손님이 막무가내로 들어가시는 바람에…….”

중년 사내는 오른손을 번쩍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아섰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사내.

언젠가 사심희의 깨톡 프로필 사진에 있었던 그녀의 부친이었다.

정신 번쩍 들었다.

영업장에 무단 침입한 젊은이에게 중년 사내가 사뭇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내 딸을 찾아오신 것 같은데, 실례지만 뉘십니까?”

“아, 저, 저는…….”

아무리 둘러봐도 사심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말더듬이가 되어 고개를 축 숙이고 말았다.

“내 딸을 찾아오신 거라면 한발 늦었군요. 오늘 한국으로 떠났습니다만.”

깜짝 놀라 숙였던 고개를 치켜드니,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녀가 한국으로 떠났다는 말에 안도와 허탈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혹시……, 당신이 강유록이라는 사람인가요?”

“…….”

그 와중에 내 이름이 튀어나오자, 나는 바보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잘됐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죠.”

그는 정중한 태도로 내게 나가자는 손짓을 보냈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식당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의 긴 줄은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 * *

이틀 후.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 앉아 있었다.

원래 예약했던 항공편을 취소하고, 빠른 티켓으로 변경하느라 진땀을 뺐다. 물론 이번에도 선택의 여지 없이 퍼스트 클래스 좌석이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사심희의 부친과 나눴던 얘기를 복기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국에 도착하니 어느덧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미국으로 갈 때 반나절을 벌었다면, 귀국할 때는 같은 시간만큼 반납해야 했다.

주차장에 맡겨 놓았던 차를 돌려받고 나는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사심희가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집이었다.

뉴욕에서 떠나기 전 나는 그녀와 긴 통화를 나눴다.

그녀는 집 앞에서 오돌오돌 떨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한 달 만의 재회였다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목덜미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담담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와 다시 만나면 무슨 말로 시작할까 비행기 안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니 서먹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내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핸드폰은 찾았어?”

“그럼요. 돌아와 보니, 침대맡에서 잠들어 있던걸요?”

“다행이네. 어서 타.”

“그런데 정말로 어디에 가는 거예요?”

“가 보면 알아.”

나는 그녀를 태우고 서울 모처로 향했다.

차에 오르자마자 그녀가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다시는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녀의 수다를 듣게 되자, 비로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정말로 뉴욕에는 왜 왔던 거예요?”

“……비즈니스 출장이었다니까.”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식당까지 찾아왔다면서요? 나 찾으러 왔으면서. 그 메시지는 또 뭐고요?”

“그러게 왜 휴대폰은 집에 두고 가?”

“그러게요. 저도 미국에 도착해서야 알았어요.”

“그래도 이메일도 있고, 유튜브 댓글도 있고, 내게 연락할 방법은 있었잖아.”

“어차피 곧 갈 거라 그랬죠. 미안해요. 난 그렇게 걱정하는 줄도 모르고. 히히.”

화도 나지 않았지만, 부끄럽지도 않았다.

천진난만한 그녀의 웃음소리에 얼었던 머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진한 행복감에 정신이 아득해져 나는 창문을 살짝 열어야 했다.

차가 멈춘 곳은 강남 모처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오우! 근사한 레스토랑이네요. 크리스마스이브라고 저와 데이트하는 건가요?”

“오랜만에 만났잖아. 회식이야.”

“피이~”

입구에 들어서자 말끔한 차림의 여자가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예약은 하셨습니까?”

“강유록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아! 창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나도 생전 처음 와 보는 곳이었다.

가끔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선망의 눈길을 보내곤 했던 고급 식당이었다.

사심희와의 근사한 저녁 식사를 위해 예약은 뉴욕에서 벌써 해 두었다.

“C코스로 부탁합니다.”

“스테이크 굽기는요?”

“레어로 해 주세요.”

“저는 미디엄 레어로 부탁해요.”

제일 비싼 걸로 주문했다.

사심희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계속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너무 근사하다.”

“사이로보다는 못하구만.”

“뉴욕에서는 뭐 하셨어요? 타임스퀘어나 센트럴파크는 가 보셨나요?”

“……그럼.”

사실은 아무 데도 가 보지 못했다.

호텔로 돌아와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갈 궁리만 하느라, 어디를 돌아다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우리 아빠는 못 만나셨다고 하던데, 정말로 우리 식당에서는 밥만 먹고 나온 건가요?”

“그랬다니까. 슬쩍 둘러봐도 없길래 혼자 저녁만 먹고 나왔어.”

“하필이면 내가 없을 때…….”

사심희의 부친은 자신과 나눈 대화를 그녀에게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분 또한 딸에게 나를 만난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사심희는 묻지도 않은 말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아빠가 내친김에 일 년만 더 놀다 오라고 허락해 주셨어요. 한국 사람이니 한국에 대해 더 배우고 오라고 하시더군요. 난 괜찮다고 하는데도 얼마나 고집을 피우시는지.”

“다행이야. 내가 아버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 같군.”

“그렇죠? 우럭 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토끼 같은 그녀의 눈망울을 향해 나는 비시시 웃어 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그녀의 부친이 했던 말들을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내 딸이 한국 생활을 쉽게 접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집사람과 내가 설득했지만, 막무가내였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딸이 한국에서 행복하다는데. 결국 일 년만 더 있어 보기로 타협했습니다.’

‘심려를 끼쳤다면 송구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하더군요. 내 느낌으로는 그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내 앞에 있는 젊은이가 맞겠지요.’

‘…….’

‘하나만 나와 약속해 줄 수 있나요?’

‘어떤…….’

‘딸애의 행복을 막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다만, 순간의 감정에 빠져 긴 인생을 보지 못할 나이입니다. 딱 일 년입니다. 그때에도 내 딸의 생각이 같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미련 없이 미국으로 보내 주시오. 그게 아비로서의 부탁입니다.’

‘……알겠습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다짜고짜 딸의 장래를 운운하며 대신 설득해 달라는 얘기와는 사뭇 차원이 달랐다.

그녀의 부친은 나름 딸의 입장에서 행복을 빌어 주는 편이었다.

약속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나는 절대로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화려한 미끼로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천부적인 낚시꾼이라 불리지만, 내게는 사람을 낚는 재주는 없다.

그러나 뉴욕에 머무르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다시는 그녀를 보내지 않을 계획을 이미 구상해 두었다.

그녀를 꽁꽁 묶어 둘 세상에서 가장 묵직한 봉돌을 말이다.

부우욱~

식사 도중에 휴대폰의 진동음이 울려와 나는 테이블 밑에서 확인해 보았다. 백정철의 전화였다.

불참한다고 분명히 회신을 했는데…….

시계를 보니 용감한 어부 종방연이 한창인 시각이었다. 나는 통화 취소 버튼을 움직여 휴대폰을 잠재웠다.

그런데 잠시 후.

이번에는 휴대폰 액정에 지상철의 이름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물었다.

“누구 전화인데 그래요? 또 어디 가야 해요?”

“아니야. 스팸 전화야.”

테이블 아래에서 나는 아예 전원 버튼을 꾹 눌러 버렸다.

용감한 어부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오늘만큼은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그녀와의 오롯한 시간을 원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거리에 어둠이 내려 있었다.

앞장서서 어디를 갈까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사심희가 내 오른쪽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우리 와인 한잔해요.”

“어어, 지금……?”

그녀가 내게 팔짱을 끼고 매달리자, 정신이 혼미해져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싫어요?”

“아, 아니……. 누가 싫다고 했어? 그런 게 아니고…….”

사심희가 장난스러운 눈길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고, 나는 어색한 미소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다.

어디에도 눈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 시야에 세상은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