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새로운 시작
육중하면서도 한 템포 빠른 진동.
예전에 상대했던 참다랑어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몸부림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혈투를 예감하며, 나는 파이팅벨트의 구멍을 더듬었다.
귀신같이 낌새를 눈치챈 장 피디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뭔가요? 제법 대물인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백 킬로는 넘는 것 같아요. 저쪽은요?”
“이몽규 선생님도 뭔가 큰 놈을 걸었어요. 저기는 완전히 난리가 났습니다.”
장 피디는 배의 양쪽에서 발생한 긴급 사태에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반드시 끌어 올리셔야 합니다. 두 분이 동시에 대물을 올린다면, 그동안 한 번도 선보이지 못했던 그림이 될 겁니다!”
나도 그와 똑같은 생각이었다.
심지어 양쪽에서 올라오는 어종이 청새치라는 게 밝혀진다면, 그야말로 역대급 명장면으로 남지 않겠는가.
나는 드랙을 약간 풀고 길게 호흡을 가다듬은 뒤, 리듬을 타며 채비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워낙 깊은 수심에서 걸린 녀석이라 얼굴을 볼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긴 시간이 흘렀다.
수동릴을 감아올리다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청새치는 거의 반쯤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놈은 처음보다 더 격하게 몸부림을 치며 다시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끄으응.”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허리는 물론이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뻐근해져 서 있기도 힘든 지경이었지만, 나는 다시금 어금니를 악물었다.
간간이 주변에서 나를 응원하는 함성이 귓가를 간지럽혔지만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람들의 괴성에 나는 드디어 놈이 수면에 올라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흐릿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란 주둥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성난 물고기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선장이 일본 말로 크게 소리치자, 몰려든 사람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선장이 작살을 던져 놈의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몇 사람들이 달라붙어 끌어 올린 괴물이 난간을 넘어오자, 갑판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청새치가 말이 돼? 100킬로는 훨씬 넘겠어!”
“강 프로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건 대형 사고야.”
“이래도 우리 용감한 어부를 끝낸다고? 말도 안 돼!”
팔다리가 빠져나갈 것 같았지만 나는 쉬지 않았다.
사람들의 환호에 고개를 숙이면서, 이몽규에게로 달려갔다.
예상했던 대로 이몽규는 사색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우선 이몽규의 낚싯대부터 살펴보았다.
라이트 지깅대까지는 아니었지만, 헤비한 내 장비와 달리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심지어 전동릴도 아닌 그의 수동릴에는 원줄이 거의 풀려 나가 있었다.
나는 긴 휘파람으로 주변의 바다를 넓게 탐색해 보았다.
아주 먼 바닥권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청새치 또한 육중한 자태를 뽐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일단 나는 뒤로 다가가 몸이 쏠리지 않게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백허그……. 사내끼리 민망한 포즈였으나, 카메라를 의식할 겨를도 없었다.
“드랙을 조이세요. 빨리요!”
“아, 알았어.”
꾸중하듯 내가 외치자, 이몽규는 눈을 질끈 감고 드랙을 조금씩 조이기 시작했다.
느슨했던 줄이 팽팽해지자, 이몽규는 아예 몸을 가누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자네가 나 대신 해 주면 안 되나?”
“정신 차리고 릴을 감으세요! 형님 고기니까 형님이 책임지셔야죠!”
릴의 손잡이를 잡고 힘겹게 한 바퀴를 감아올린 이몽규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으윽!”
“허리를 펴시고! 괄약근에 힘을 더 주시고! 좋아요!”
아주 조금씩 채비가 올라오는 듯했다.
그러나…….
주르륵! 디리릭~
또다시 용을 쓰며 달아나는 청새치.
이몽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요! 다시 감아요. 더 세게!”
“알았어! 알았다고!”
특유의 신경질을 부리는 걸로 보아, 이몽규의 기가 조금은 살아난 것 같았다.
나는 백허그 자세를 풀고,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카메라를 의식한 측면도 있지만, 이제부터는 이몽규의 정신력에 맡겨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몽규가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사람들 한마디씩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고기야? 설마 또 청새치는 아닌 것 같고.”
“그닥 대물은 아닌 것 같은데 엄살을 떠는 거 아닐까요?”
“어쨌든 몽규가 간만에 사고를 치네. 뭐라도 나오면 다행이지.”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이몽규는 젖 먹던 힘까지 벌써 소진한 것 같았다.
“이제 반쯤 올라왔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이몽규의 귀에는 내 말이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구부정하게 수그린 자세로 그는 좀비처럼 퀭한 눈동자를 꿈뻑거렸다.
모두들 가슴을 졸이며 늙은 개그맨의 사투를 지켜보는 가운데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해는 거의 져서 손톱만 한 불빛이 수평선에 걸쳐 있었다. 선장이 LED 등을 켜서 이몽규의 외로운 싸움을 응원해 주었다.
휘파람으로 이제 거의 다 올라온 청새치를 확인하고,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였다.
“오오! 떴다! 떴어!”
“우와! 저건……. 또 청새치다. 청새치!”
“말도 안 돼!”
사람들이 우르르 이몽규의 곁으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스름한 바다에 비스듬히 누워 떠오른 괴물.
푸드덕! 푸드덕!
아직 기운이 채 빠지지 않는 거대 생명체가 마지막 바늘털이를 시도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제치며 선장이 작살을 들고 달려왔다.
능숙한 솜씨로 그가 작살을 놈의 아가미 부근에 명중시키자, 시뻘건 핏물이 왈칵 솟으며 주변 바다를 검붉게 채색했다.
“영차! 여엉차!”
선장이 갈고리로 놈의 아가미를 꿰고 밧줄을 잡아당기자 너도나도 도움의 손길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난간 안으로 털썩 내려앉은 육중한 몸뚱어리.
사람보다 큰 괴물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입이 두 번째로 쩍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몽규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실신 직전임에도 역시 그는 코미디의 황제였다. 카메라가 따라가자 그는 눈알을 사방으로 굴리면서 이렇게 외쳤다.
“아이고 용왕님~~ 나 죽는다아.”
* * *
짝짝짝짝!
그날 밤 숙소의 야외 라운지에서 완장 수여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내가 잡은 청새치의 무게는 무려 130Kg이었고, 이몽규의 그것은 그에 약간 못 미치는 105kg였다.
완장의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라, 출연진 여섯 명 전원이었다.
차례로 완장을 받아, 어깨에 둘러메고 우리는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했다.
처음에 장 피디는 내 어깨에 완장을 채우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완곡한 거절 의사를 피력했다.
오랜 기간 프로그램과 함께했던 모든 출연자들이 아름다운 대미를 장식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완장 수여식이 끝나고, 출연진들은 근처에 준비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이덕호가 샴페인 잔을 높이 들고 크게 외쳤다.
“용감한 어부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새로운 시작.
너무나 적절한 건배사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종방연을 겸한 술자리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지상철이 잡은 눈다랑어의 뱃살이 오늘의 메인 요리였다.
모든 스태프들과 출연진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을 때, 장 피디가 술잔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강 프로님!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섯 명 모두가 합심한 결과였습니다. 게다가 아직 방송 재개 여부가 결정된 것도 아니잖습니까?”
“겸손도 그 정도면 중증이군요. 그 말도 안 되는 청새치가 방송을 살릴 겁니다. 시청률이고 뭐고 확인할 필요도 없어요.”
“…….”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시청률의 메카니즘에 익숙한 장 피디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나 또한 거의 같은 생각이었다.
지상철이 빅아이로 테이프를 끊었고, 이태권의 와후가 희망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진 이덕호의 만새기와 김진성의 그루퍼는 작은 서막에 불과했다.
마침내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한 화룡점정은 나와 이몽규가 더블 히트로 끌어 올린 거대 청새치였던 것이다.
“상철이! 진정한 어복킹은 나 이몽규야. 이제 알겠지?”
“아니, 형님은 왜 항상 피쉬를 근수로만 평가하려고 그래요? 마릿수로는 형님이나 나나 똑같잖아요.”
“됐어. 이 사람들아. 오늘 즐거운 날이니 다 함께 건배나 또 하세!”
“용감한 어부! 포에버!”
나는 사람들을 따라 술잔을 높이 들었다.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정겨운 얼굴들이 투명한 유리컵을 통해 비치고 있었다.
* * *
오키나와에서 돌아와 일주일이 흘러갔다.
오늘도 나는 하릴없이 방구석에서 베타와 뒹굴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가끔씩 근처의 편의점에만 다녀올 뿐, 거의 일주일째 두문불출 생활의 연속이었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2월 16일.
사심희가 돌아오기로 했던 데드라인이 지났다.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 같아,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은 단지 날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난 보름 동안 단 한 번도 내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가 떠났던 날에도 잘 도착했다는 문자 메시지를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었다. 그때만 해도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 경황이 없어서 그랬을 거라 마음을 다독였다.
물론 그녀가 대략 보름쯤 후에 돌아온다고 했었지, 돌아오는 날을 확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정보다 미국에서의 일정이 길어진다면 최소한 내게 짧은 문자라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정황을 종합적으로 볼 때,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사정인 걸까?
부모님이 오랜만에 돌아온 딸을 눌러 앉히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나는 참고 참았던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휴대폰의 전원이 꺼져 있어…….’
이럴 수가!
전원이 꺼져 있다.
혹시나 싶어 뉴욕과의 시차를 확인해 보니 13시간.
지금 한국이 저녁 5시니까, 그곳은 아침 4시…….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자느라 휴대폰을 꺼 두었을 수도 있겠다며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나는, 깨톡 창을 열어 그녀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혹시 일정에 변경이 생긴 것인지, 나름 덤덤하게 보이며 공을 들인 메시지였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 천정을 올려다보았더니, 가슴이 답답해져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남해에서 돌아와 헤어질 때, 멀어져 가던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자꾸만 생각나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후닥닥 옷을 주워 입고, 외출을 나섰다.
부리나케 달려간 안양의 주택가.
어스름이 내린 저녁 시간, 그녀의 2층 창문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내가 반쯤 미친 모양이군. 보나 마나 한 것을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달려오다니.
헛웃음을 지으며 돌아서면서도,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장재준 영감.
실낱같은 기대감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가깝게 살고 있었으니, 혹시 그에게는 무슨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수신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그가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