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오키나와
김포 공항 국제선 청사 안.
“어이! 동생!”
낚싯짐을 끌고 공항 청사로 들어오자마자, 누군가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이몽규였다.
“몽규 형님!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늘 그렇지 뭐. 얼마 전에 자네가 참다랑어를 잡는 거 봤어. 예전에 내가 코스타리카 촬영에서 잡은 것보다 훨씬 크더라.”
“하하. 어쩌다 얻어걸렸습니다.”
변함없이 쾌활한 목소리였지만 이몽규의 얼굴에서는 예전의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 지상철 형님. 언제 오셨습니까?”
“난 아까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집에만 있으니 심심해서 공항 구경이라도 할까 해서.”
마지막 방송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걸까?
그의 눈매는 반달처럼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려다,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요즘 한창 잘하고 계셨는데…….”
“그러게. 몽규 형님의 어복킹 자리를 완전히 꿰차고 있었거든. 모처럼 고정 방송 하나 잡았나 싶었더니 낙동강 오리알 신세야.”
“…….”
‘연예인 걱정할 시간에 네 걱정이나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이몽규나 지상철도 일반인에 비해 먹을 만큼 버는 사람들이다.
나는 다만 대중적인 낚시의 붐을 일으켰던 프로그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일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큰 역할을 해 왔던 출연진들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이 서글펐던 것이다.
“여기 계셨군요.”
사방에서 반가운 인사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장진혁 피디가 쓴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주변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면서 그에게 물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다른 출연진들은…….”
“저쪽에 다 모여 계십니다. 얼른 탑승 수속부터 하시죠.”
부랴부랴 탑승 수속과 함께 짐을 부치고, 장 피디를 따라가 보니 나머지 출연진들이 기다란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어이고, 강 프로 오랜만이야. 우리 때문에 고생이 많구만.”
“이덕호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낚시가 무슨 고생인가요.”
이덕호의 표정은 그나마 밝은 편에 속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가 호평 속에 마무리되어, 그는 실로 오랜만에 배우로서의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다음으로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먹방 개그맨 김진성이었다.
“오늘은 그 예쁘장한 여자분이 함께 안 오셨네요?”
“개인 사정이 생겨서 저 혼자 왔습니다.”
“같이 오셨으면 맛있는 요리를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헤헤.”
어디서나 먹는 타령인 그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어차피 낚시 자체에 관심이 깊은 사람은 아닌지라, 수긍은 할 수 있었다.
“이태권 님, 안녕하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요즘 잘나가신다고 들었어요. 저도 사실은 어반자TV 애청자가 되었습니다.”
반갑다는 표시로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리기는 했으나, 이태권은 그야말로 얼굴이 흙빛이었다.
한창 방영 중인 막장 드라마에서 배우로서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음에도, 그는 누구보다도 아쉬움이 커 보였다.
“이제 탑승하실 시간입니다. 다들 입장하시죠.”
장 피디의 뒤를 따라 우리는 줄줄이 출국장으로 들어섰다.
비행기에 올라 좁다란 통로를 걸어 자리를 잡고 보니, 바로 내 옆이 장 피디의 자리였다.
“많이 바쁘실 텐데 선뜻 나와 주셔서 고마워요.”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제가 감사하지요.”
“해외 출조는 처음이시죠?”
“네. 처음입니다.”
“솔직히 부담을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강 프로님 방송은 저도 줄곧 모니터링하고 있었어요. 지난번에 잡은 사이즈의 참치 하나만 잡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담을 주지 않겠다면서도, 장 피디는 또 은근한 부담을 주고 있었다.
눈빛으로 보아 그는 아직 새로운 시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서 슬쩍 물어보았다.
“시청률 3%를 넘기면 확실히 다음 시즌을 기약할 수 있는 건가요?”
“솔직히 저도 몰라요. 국장님이 마지못해 그런 조건을 붙인 감은 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봐야죠.”
“큰 참치를 한 마리 잡는다고 시청률이 크게 움직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에요. 대중들은 마릿수보다 대물에 열광하더군요. 지금까지 결과를 보면 늘 그래 왔어요.”
시청률의 함수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백상효 프로와 동행했던 참치 편의 조회 수가 다른 회차보다 월등했던 것도 같다.
마지막이 될지 모를 촬영지로 오키나와를 선택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대물 잔치를 통해 어떻게 해서든 시청률을 올려 보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용감한 어부는 한창 잘나갈 때 남태평양은 물론 멀리 대서양까지 누비던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예산 지원이 끊겨 아주 멀리 가지는 못해도, 차선책으로 가까운 오키나와라도 가 보려는 것 같았다.
두둥실 떠오른 비행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오키나와 본섬에 도착하여 최종 목적지인 쿠메지마섬까지는 경비행기를 이용하는 여정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경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 다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목적지에 가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는 셈이었다.
이몽규와 지상철이 내게 다가와 밖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근처에 큰 낚시점이 있다는데, 동생도 같이 가지.”
“다녀오세요. 저는 여기서 쉬고 있을게요.”
출연진 몇몇이 낚시 백화점으로 쇼핑을 떠나고, 나는 멀뚱히 경비행기 탑승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내일 낚시…… 정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누군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을 걸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태권이었다.
그와는 지금까지 서로 데면데면 대했던 사이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이태권 님이야말로 큰 놈으로 몇 마리 잡으셔야죠.”
“모두들 맥이 빠져서 큰일입니다. 강 프로님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네요.”
“절실하기는 다들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나 또한 심히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출연진들의 얼굴에 무기력한 기운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이태권이 눈을 깜빡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물 청새치 한 마리만 잡으면 대역전이 가능할 텐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오키나와의 겨울에는 청새치를 만나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습니다. 그렇지만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더라고요. 과거 기록을 보니까 지금처럼 12월에도 청새치를 잡은 적이 있었어요.”
“아, 그래요? 그런데 굳이 청새치를 노리는 이유가 있습니까?”
“낚시꾼들의 로망이니까요. 청새치만큼 난폭하면서 화려한 어종은 없습니다. 청새치를 티라노에 비유한다면, 참치는 귀여운 초식 공룡일 겁니다. 그 무시무시한 놈을 카메라에 담는다면 시청률은 확인할 필요도 없겠죠.”
“아…….”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내게도 청새치에 대한 로망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률이 희박한 청새치에만 모든 기대를 걸 수는 없는 노릇. 다양한 남국의 대어들을 보이는 족족 끌어 올리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얘깃거리가 떨어졌는지 이태권은 화장실에 간다며 슬며시 일어났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을 자고 나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경비행기라고 해서 위태로운 종이비행기를 상상했지만, 생각보다 작지 않았다. 경비행기가 쿠메지마 상공에서 하강하고 있을 때는 거의 날이 저물고 있었다.
하늘에서 바라본 쿠메지마의 바다는 푸른 물감을 풀어 놓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수학여행을 나온 학생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진으로만 봤던 괴어들의 모습들이 떠올라 흥분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기내의 작은 창문을 향해 나는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다. 바다가 너무 멀어 아무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 * *
어디에 가던 선상 출조의 시작은 새벽인가 보다.
다음 날 이른 새벽, 우리 일행은 어두컴컴한 부두에 모여 앉아 제작진이 제공하는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너무 일찍 호텔을 나서야 했기 때문에, 조식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나는 구석 자리에서 입을 삐쭉거리고 있는 이몽규에게 다가갔다.
“어째 간밤에 잠을 설치신 모양입니다?”
“상철이 놈이 코를 골아서 날밤 새웠어. 방마다 두 명씩 집어넣다니, 너무 심한 거 아냐?”
그는 반쯤 먹다 남긴 도시락을 내려놓으며 길게 하품을 내뿜었다. 예산 부족으로 2인 1실을 마련해 준 제작진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지상철도 몹시 퉁퉁 불어 터진 얼굴이었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지난밤 이몽규와 근처 선술집을 전전했던 눈치였다.
참았던 봇물이 터졌는지, 이몽규가 계속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막방인데 도시락이 뭐야? 어제만 해도 그래. 제작비 아낀답시고 저가 항공에 태우고 말이야.”
제작진이 들을까 눈치를 보며, 지상철이 그의 푸념을 받아 주느라 진땀을 뺐다.
“뭐라도 잡으려면 든든히 드셔야죠. 형님.”
“그래도 이제껏 고생했는데 아침부터 편의점 도시락이 뭐냐고. 이런 거 먹고 피라미라도 잡으면 다행이겠다.”
“그래도 형님은 몇 년이나 따뜻하게 보내셨잖아요. 저는 합류하자마자 또 잘리게 생겼다고요.”
이번 출조에 대한 출연진들의 마음가짐을 엿보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을 때 장 피디가 헛기침을 하며 사람들에게 외쳤다.
“출항 시간입니다. 식사 마치신 분부터 승선하세요.”
나는 얼른 도시락을 해치우고 일행들을 따라 배에 올랐다.
각종 첨단 전자 장비를 구비한 대형 보트.
장 피디가 쿠메지마에서는 나름 인기가 좋다는 지깅 전용선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전날 밤 호수처럼 잔잔했던 바다는 하루아침에 바뀌어 있었다. 기역자 형태의 기다란 방파제를 넘어서자마자 배가 약간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침 안 먹길 잘했군. 어차피 바다에 반납할 건데. 안 그러나?”
이몽규가 별로 웃기지 않은 농담을 건넸지만, 나는 잇몸을 만개하며 웃어 주었다. 회사원 시절에 습득한 고급 기술이었다.
모든 인원이 승선한 것을 확인하고, 장 피디가 크게 외쳤다.
“알아서 편한 자리 잡으세요. 마지막이 될지는 아직 모르는 겁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봅시다.”
“…….”
아무도 일언반구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이덕호가 아주 오래된 유행어를 날렸다.
“다들 화이팅합시다! 오늘도 자알 부탁해요~~”
낚싯배는 그리 오래 달리지 않았다.
한 시간 반 정도 달리던 배가 수면에 커다란 동심원을 그리면서 정지했다.
일본인 선장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우릴 향해 뭐라고 떠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어금니를 보이며 웃는 것으로 보아 어탐기에 뭔가 잡혔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디 한번 직접 들여다볼까?
처음 마주하는 이국의 바닷속. 휘파람을 불기도 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있다! 인형 눈알처럼 크고 꽉 찬 눈동자.
참치와 닮아 보였지만, 내가 알고 있는 참치는 아니었다.
족히 40킬로그램은 될 법한 준수한 사이즈였다. 녀석은 산책이라도 나왔는지 목적 없이 천천히 떠돌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새로 구입한 지깅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크롬빛 메탈지그를 바다에 투하했다.
시작부터 대어를 잡는다면, 사람들의 파이팅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은근한 기대감을 품고, 나는 하강하는 채비를 향해 휘파람을 후욱 불어 넣었다.
녀석은 아직 아무 생각 없이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메탈지그를 발견했을 거라 판단한 나는 곧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놈의 머리가 향한 방향이 정확히 나를 향한 것 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약간 왼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레이더망을 왼쪽으로 넓혀 보니, 그곳에 어느새 바닥을 찍고 올라온 붉은색 메탈지그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보다 빨리 채비를 내린 사람이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남쪽으로 오니까 따듯해서 좋네. 안 그래, 동생?”
안경 너머로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지상철이 한 손으로 낚싯대를 천천히 흔들고 있었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지상철의 어복이 아직 효력을 발휘하고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의 낚싯대에 곧 들이닥칠 엄청난 충격을 예감하고, 나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