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해외 원정
“그럼 이모는 언제 와요?”
“보름 뒤에 온다고 했으니까 12월 중순쯤이겠지. 이모가 많이 보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럼요.”
12월의 겨울바람은 예년보다 더 차가웠다.
준서의 세 번째 왕초보편을 마친 곳은 삼길포의 M 좌대였다. 겨울철에 준서가 낚시할 만한 수도권 인근의 장소로 M 좌대만 한 곳은 찾기 어려웠다.
“이만하면 좌대 낚시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구나. 다섯 마리나 잡았으니 오늘도 너무 잘했다.”
“이모가 있었으면 맛있는 회무침을 해 주셨을 텐데.”
“대신에 내가 항구에 나가서 맛있는 우럭탕을 사 주마.”
그렇게 준서를 달래면서 나는 좌대를 빠져나왔다.
근처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 식사를 해결하는 동안 나도 준서도 거의 말이 없었다.
인근에서는 우럭탕 맛집이라고 소문난 식당이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사심희가 끓여 준 우럭탕 생각이 떠올라, 나는 공깃밥을 반쯤 남긴 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다음에는 이모랑 같이 올게. 겨울 방학 때 셋이서 즐겁게 놀러 가자꾸나.”
“알았어요. 삼촌. 오늘도 고마웠어요.”
준서를 평택에 내려 주고 올라가는 차 안에서 나는 사심희와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공항까지 데려다줄게.’
‘뭘 그렇게까지 고생해요. 버스 타고 가면 돼요.’
‘…….’
‘서운한 건 아니죠?’
‘아냐. 부모님과 재밌게 보내고 천천히 돌아와.’
‘천천히? 그러다가 저 잘리는 건 아니겠죠? 저 말고 다른 사람 구하면 안 돼요. 알았죠?’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쾌활한 목소리. 그것이 묘하게도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던가.
함께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갑자기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기분이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친숙한 사람의 부재가 만들어 낸 일시적인 공허함인지, 아니면…….
휴유~
정신을 차리려 차의 창문을 열었더니, 한숨 소리와 함께 허연 입김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찬바람을 맞으니 제정신이 들긴 하나 보다.
사심희는 유명 레스토랑을 승계해야 한다. 조만간 돌아온다 해도, 어차피 또 내년 봄이면 헤어져야 할 운명이 아니던가.
창밖의 메마른 가로수들을 보며 나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 * *
하릴없이 집에서 뒹구는 날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낚시는 시청자와의 약속. 우울한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서라도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 것은 라면을 끓여 먹고 막 설거지를 하려던 참이었다.
발신자가 누군지 확인해 보니 의외의 인물이었다.
장진혁 피디.
저장만 해 두었을 뿐, 그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인지라 무슨 일인가 싶었다.
“피디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저야, 항상 잘 지내죠. 용감한 어부도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가 출연한 뒤로, 특히 지상철의 활약을 확인하기 위해 최근에는 거의 빠짐없이 찾아보고 있었다.
“그래서 전화드렸습니다. 일전에 땜빵이 필요하면 나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죠?”
단칼에 거절하기 어려워 둘러댄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반자TV의 도약에 큰 도움을 주었던 프로그램에, 고마운 마음 또한 품고 있었다.
“누가 또 빠지시게 된 건가요?”
“백정철 프로님이죠. 뭐.”
“이번에도 급한 일이 생겼나 보죠?”
“그건 아니고요. 너무 막중한 임무라서 더 적합한 후배에게 맡기자고 하시네요.”
막중한 임무…….
도대체 무슨 말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이어지는 장 피디의 설명과 하소연을 들으면서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 * *
그날 저녁.
나는 고동우의 낚시점을 찾아갔다. 낚시점 안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나는 아지트의 계단을 올라가 보았다.
안에는 고동우와 보람이가 머리를 맞대고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분 뭐 하고 계십니까?”
“어어, 우럭 님, 한동안 뜸하더니 오늘에야 나왔구먼.”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보니, 테이블 위에 멀티싱커 국내 공급 계획 물량이 적힌 서류가 눈에 띄었다.
보람이가 겸연쩍게 웃으며 서류를 내게 쓱 밀어 놓았다.
“비수기로 접어들었잖아. 구피 님 물량을 좀 빼야 할 것 같아서 논의 중이었어.”
“그래? 하긴 겨울이니까…….”
“그런데 구피 님이 영 고집을 피우시네.”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수요가 줄어 물량을 줄인다는데 판매자가 거부하고 있다니.
고동우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설명에 나섰다.
“비수기는 맞지만, 너무 많이 빼니까 그렇지. 아무리 해외 물량이 급하다지만 말이야.”
무슨 소린가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어, 나는 보람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외에 보낼 물량이 많아서 그렇다는 거야?”
“맞아. 일본에서 멀티싱커 반응이 꽤 괜찮은 모양이야. 처음에 합의했던 물량보다 더 보내달라고 성화지 뭐야.”
“그쪽도 비수기 아닌가?”
“일본 본토도 그렇지만, 대만과 호주에서도 주문이 많은가 봐.”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첫 선적분을 보낸 지 불과 열흘 만이었다.
예상을 넘어서는 주문량에 보람이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좋아 보이네요. 알아서 잘해 보세요.”
힘없이 서류를 내려놓는 나를 보고, 고동우가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나저나 우럭 님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설마 사시미 님이 잠깐 없다고 울고 있는 거 아냐?”
“어휴. 내가 무슨…….”
“카메라도 직접 들고 다녀야 하고, 먹방은 포기 상태인 것 같은데 뭘 그래?”
“…….”
대꾸하기 싫어 가만히 있었더니, 이번에는 보람이까지 나서서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일이 늘어나서 그러겠어요? 뭔가 마음이 허전해서 그러겠죠. 그래서 사람 있을 때 잘해 줘야 한다니까요.”
그나마 보람이가 내 심정을 보다 잘 설명해 주고는 있었다. 빨리 다른 화제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고동우에게 현관을 가리켰다.
“지깅대 하나 사러 왔어요. 일 다 마치셨으면 내려가시죠.”
“하나 있잖아? 얼마 전에 커다란 참치를 잡았던 그거.”
“더 튼튼한 걸로 사려고요.”
“오호! 그 정도 참치로는 성에 안 찬다 이거지? 그런데 정말로 뭘 잡으려고? 해외에라도 나가려는 거야?”
“……맞아요.”
예상하지 않은 대답이었는지, 고동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농담하는 거 아니지?”
“정말이에요. 용감한 어부 팀과 오키나와에 가게 되었어요.”
“이야! 정말이냐? 드디어 우럭 님의 명성이 해외까지 뻗게 되었구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신바람이 나도 모자랄 판에 어쩐지 썩 반기는 얼굴은 아닌 것 같다?”
“마냥 즐거운 출조만은 아니에요.”
나는 두 사람에게 장 피디에게서 들은 얘기들을 모두 전해 주었다.
긴 얘기는 용감한 어부가 이번 촬영을 마지막으로 시즌을 조기에 종료하게 되었다는 비보로 시작되었다.
초반에 전국민적인 관심 속에서 유례없는 시청률로 출발했던 용감한 어부는 시즌을 거듭하면서 점점 식상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늘어갔다.
최근의 시청률이 2%대로 급락하여 거의 회복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방송국 고위층에서 조기 종료를 지시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한 가지 작은 희망의 불씨가 있다면, 마지막 방송에서 3%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한다면, 차후에 새로운 시즌을 고려할 여지가 있다는 정도였다.
장 피디가 예산을 탈탈 털어 야심 찬 해외 원정을 기획했지만, 출연진들은 모두들 갑작스러운 상황에 맥이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백정철 프로님의 어깨가 너무 무거우신 것 같아요. 그동안 자신이 잘하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감도 크고요. 그래서 강 프로님이 구원 투수로 나서 주시기를 바라고 계세요. 빅게임 낚시이다 보니, 아무래도 오키나와에서 자신보다 더 좋은 활약을 보여 줄 거라고 하시더군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나는 결국 장 피디의 부탁대로 출연을 약속했고, 그 이후로 줄곧 가슴 속에 돌멩이 하나를 달고 다녀야 했다.
자초지종을 듣고서도 고동우는 부럽다는 반응이 먼저였다.
“좋겠다.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에서 낚시를 하게 되다니. 수돗물을 담아 놓은 것 같은 그런 곳 아니냐. 그런데 대상어가 뭐래?”
“빅게임이라니까 참치나 그런 대형 어종이겠죠.”
“잘됐네. 이번에는 100킬로 넘는 참치 한 마리 떡 잡는 거야. 그럼 시청률 3%는 너끈히 나오겠지.”
“원한다고 대물이 나타나 주나요? 그리고 대물 하나 잡는다고 시청률이 껑충 뛰는 것도 아니잖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보람이는 다른 걱정이 앞서는 것 같았다.
“오키나와라면 얼마 전에 지진 난 동네 아냐?”
“그랬었지.”
“여진이 발생할 수도 있는데 장소를 잘못 잡은 거 아닌가?”
“현지 확인을 했다나 봐. 장 피디 말로는 요즘 그럭저럭 조황이 괜찮다고 들었대. 지진이 또 생기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꼼꼼한 성격의 보람이는 아직 걱정되는 부분이 남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촬영은 누가 하나? 사시미 님도 없는데.”
“그건 용감한 어부 팀에서 전담 기사를 배정해 주기로 했어. 어반자TV에 쓰일 용도로.”
“히야. 예전과는 완전히 대우가 달라졌구만. 아무튼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다녀와라. 네가 프로그램을 좌지우지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마지막을 멋지게 함께한다고 가볍게 생각하라고.”
한국의 여러 TV 프로그램 중에서 용감한 어부와 같은 낚시 소재 방송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바람이다.
하지만 거의 폐지로 가닥이 잡힌 프로그램을 내가 어찌할 수 있겠는가.
보람이의 마지막 말이 그나마 내게는 위안이 되었다.
그의 말이 옳다. 고정 출연자도 아닌 내가 설령 운이 좋아 대참치를 서너 마리 잡는다 한들, 용감한 어부를 되살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래. 나는 구원 투수가 아니라 마무리 투수일 뿐이다.
보람이의 말처럼 최선을 다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로그램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한다고만 생각하자.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낚시점으로 함께 내려온 고동우가 최신형 헤비 지깅대를 골라 주었다.
“100킬로까지는 기본이고, 그 이상도 감당할 수 있는 낚싯대야. 백상어 님도 그 제품을 쓰신다고 하더라.”
“장비 탓은 이제 못 하겠네요.”
“그래. 출국일은 언제냐?”
“사흘 뒤에 떠나요.”
“몸조심하고 잘 다녀와라.”
묵직한 낚싯대를 흔들면서 나는 낚시점을 나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용감한 어부의 해외 원정 편들을 하나씩 펼쳐 보기 시작했다.
본 것도 있었지만, 오래전 방영분들은 처음인 것들도 많았다.
이태권은 물론이고, 이몽규가 힘겹게 끌어 올린 이름 모를 물고기들을 감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 팔라우 편에서 예쁘장한 여자 연예인이 청새치를 걸어 올린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왕돌초 참치의 통렬한 손맛을 최근에 경험한 나로서는, TV를 보다가 강렬한 욕망이 불끈 솟아오르기도 했다.
모든 시청을 마치고, 나는 인터넷에 청새치를 검색해 보았다. 관련 정보가 거의 없는지라, 과연 오키나와에서 내가 노릴 수 있는 어종인지가 궁금했다.
청새치(블루마린).
5미터까지 성장하며 기다란 부리 공격으로 해마다 사상자를 만들어 내는 바다의 폭군.
근래에는 우리나라 동해에 출몰하여 수많은 앵글러들을 흥분시킨 낚시꾼들의 로망!
다만 실망스럽게도 오키나와에서는 청새치 구경이 힘들 거라는 누군가의 블로그 글이 눈에 띄었다.
11월까지는 그럭저럭 노려볼 수 있겠지만, 그 이후로는 수온이 급격히 떨어져 거의 얼굴 보기가 힘들다는 설명이었다.
트리발리, 빅아이, 와후…….
청새치는 아니더라도 처음 마주하게 될 남국의 괴어들을 떠올리며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사이 사흘이 휙 지나갔다.
사심희 때문에 허전하던 차에 이런 일이 생겨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베타는 어쩔 수 없이 보람이에게 맡기기로 했다. 고동우보다는 그나마 적임자라는 결론이었다.
이른 한파가 닥친 어느 날 아침.
나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목적지는 김포 공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