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낚시로 인생 역전-84화 (84/130)

[제84화] 백상어

한국의 지깅 낚시를 이끌어 온 살아 있는 전설.

백상효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내 귀를 의심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백정철이 발끈하고 나섰다.

“강 프로는 찌낚시로 가야 한다니까요. 남해 낚시 대회에서 엄청난 조과로 우승하는 걸 보고, 내가 먼저 점찍어 놓았다 안 했습니까?”

마냥 기뻐해야 할 타이밍에 백정철의 눈치가 보였다.

백상효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를 나무랐다.

“나도 들었지. 기록적인 조과로 우승을 했다고. 그럼 찌낚시 실력은 이미 검증이 된 것 아닌가. 나는 지깅 낚시에 대한 강 프로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은 거야. 어떤 낚시를 주력으로 삼을지는 어차피 강 프로의 선택에 달린 거잖아.”

AON이 뭐라고 나를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백상효의 관심을 단단히 끌게 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백정철이 한발 뒤로 물러서자, 나는 백상효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제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일 것 같습니다. 가르침을 주신다면 열심히 배워 보겠습니다.”

“어허, 가르침이라고 말한 적은 없어. 자네가 지깅 낚시에 재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고만 말했지.”

“상관없습니다. 함께해 주시는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겠지. 나를 상대로 내기 낚시를 하는 건데.”

내기 낚시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더니, 백상효가 크게 껄껄 웃었다.

“자네의 최선을 이끌어 내는 방법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 나눔 낚시를 한다고 하더군. 나와도 AON과 똑같은 방식으로 해 보는 게 어떤가. 이긴 사람이 모두 독식하는 방법으로 말이야.”

“독을 품고 해 보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겠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룰은 철저하게 지켜야 하네. 조만간 아버님 팔순 잔치가 있거든. 친지분들에게 아들이 방어를 잔뜩 잡아 올 거라고 단단히 약속을 하신 모양이더라고. 하하하.”

백상효가 계속 웃자, 백정철이 입을 삐죽거렸다.

“강 프로를 방어잡이 도우미로 쓰려는 겁니까?”

“별소리를 다 듣는구먼.”

두 사람의 만담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나는 서둘러 출조 일정을 확인하려 나섰다.

“그럼 언제쯤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길게 끌 것 없지. 낼모레 출발하세. 왕돌초 지리에 빠삭한 선장을 알고 있으니, 배도 걱정하지 마시게.”

대선배 앞에서 비용을 부담하겠다거나, 출연료 운운하는 건 실례일 것 같아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선의로 마련해 준 자리에서 한껏 내 실력을 발휘하는 것만이 후배로서 진정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방어 낚시 약속이 마무리되자, 백정철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새카만 후배 데리고 장난하는 건 아니요? 그냥 잘 가르쳐 주면 되지, 뭔 꼰대질이요?”

“허어. 꼰대질이라니. 치열한 승부에서 배우는 게 얼마나 많은지 자네도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오히려 내가 배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

“하긴……. 나도 소싯적에 아마추어 낚시꾼에게 된통 당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말꼬리를 흐리면서 튀어나온 백정철의 말이 내 호기심을 끌었다.

“백 프로님이 아마추어에게 당하신 적이 있었다고요?”

“아이고, 말도 마. 낚시 귀신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서 찾아갔다가 뼈도 못 추리고 돌아왔다네.”

“그게 누군데요?”

“쪽팔려서 말하기 좀 그렇네만. 지금 남해에 사는 분이셔. 아! 자네도 한 번 봤지 않은가? 이해구 회장이라고 낚시 대회에 시상자로 나오셨던 그 노인.”

이해구…….

남해에서 돌아오고 일주일도 안 되어 또다시 들은 그 이름.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구석이 있었다.

물속을 보는 외삼촌을 이긴 사람이라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분이 그렇게 대단하십니까?”

“말도 말게. 프로 입문만 안 하셨지, 지금도 갯바위 위에서는 아무도 그분을 이길 사람이 없을 거네. 한마디로 재야의 고수 중에서도 최고수라고 할 수 있지.”

놀라운 얘기였다.

자타공인 최고의 명인이라는 백정철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그에게 우승컵을 내어 주고, 하필이면 그날 밤 비운을 맞이해야 했던 외삼촌…….

사진 속에서 웃고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려 할 때, 백상효가 의자 등걸이에 걸쳐 놓은 외투를 만지작거렸다.

“자아, 이렇게 얼굴을 익혔으니, 분당까지 놀러 온 보람이 있네. 난 저녁 약속이 또 있어 먼저 일어나야겠어. 그럼 그날 보세.”

그렇게 믿기기 않는 백상효와의 동출이 불과 이틀 후로 잡혔다.

나는 백정철을 택시로 모신 뒤에, 몹시 경쾌한 발걸음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점심 무렵.

나는 고동우의 낚시점에서 지깅 낚시에 필요한 소품들을 구입하고 있었다.

갈치 무늬, 등 푸른 생선 무늬, 커다란 눈알이 박힌 문양 등등. 색깔들도 얼마나 다양한지 선뜻 고르기가 어려웠다.

나는 곁에서 메탈지그를 고르고 있던 다른 손님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우럭 님이시죠?”

“하하. 네. 내일 방어 지깅 가는데 뭐가 좋을지 도통 모르겠어서요.”

“백상어 님과 대결하시는 거죠?”

살짝 예상은 했지만, 어반자TV 구독자였다.

나는 전날 밤, 백상효 프로와의 동출을 내용으로 예고편을 올려놓았다.

“대결은요 무슨. 한 수 배우러 가는 거죠.”

“에이, 분명히 AON 방식이라고 말해 놓으시고는.”

손님은 정확하게 예고편을 숙지한 상태였다.

굳이 승부 방식을 언급했던 이유는, 그것이 나눔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하하. 어쨌든 열심히 배우고 오겠습니다.”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전날 밤에 수많은 응원의 댓글들이 달렸다.

하지만 나눔 요청은 지금까지 단 한 건도 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구독자들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다른 측면에서는 나의 패배를 당연시하는 게 아닌가 하여 서운한 감도 없지 않았다.

손님은 매대의 중간 부근을 가리키며 내게 눈짓했다.

“메탈지그는 이걸로 하시는 게 어떨까요? 백상어 님 회사에서 출시한 제품입니다.”

“아, 그래요?”

듣고 보니 좋은 생각이다.

이왕이면 백상효와 똑같은 조건에서 낚시하는 것도 좋겠지만, 예의 측면에서도 그가 만들었다는 제품들을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백상어 상표가 달린 메탈지그를 디자인별로 열 개 정도 골라서 카운터에 내려놓았더니, 고동우가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그러세요?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몰라서 그러는 거냐? 알면서 시치미 떼는 거냐?”

“알아듣게 말씀해 보세요.”

“어반자TV가 국내 구독자 수 기준으로 1등 찍었잖아. 정말로 몰랐어?”

솔직히 금시초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구독자 수를 세는 일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기대하고는 있었지만.

“얼떨떨하네요.”

“축하해. 아무튼 낚시 관련 방송 중에서는 네가 최고다. 앞으로 또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국내 1위의 낚시 채널.

시작한 지 불과 1년도 못 되어 이룬 쾌거였다. 1위를 목표로 달려온 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인 타이틀이 붙은 것은 기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낚시점에 오신 손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눈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들썩들썩 어깨춤을 추면서 돌아온 집에는 베타가 평화롭게 낮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침대에 누워 들어온 이메일이 없나 확인해 보았다.

나눔 요청 메일 ‘0’.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닌가. 하긴 나라도 이런 상황에서 나눔 요청을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눈을 감으니, 지난여름 AON과 함께했던 추억의 바다가 눈꺼풀 위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 * *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나는 사심희와 새벽에 만나 심야 고속 도로를 달려 울진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찾은 죽변항에는 12물의 끝썰물이 진행 중이었다.

백상효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그와 만나기로 한 선착장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미세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이상하다. 배를 타기도 전인데 멀미가 날 리도 없고.

처음 있는 일이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프로! 일찍 왔나 보네.”

차에서 내린 백상효 프로가 멀리서 손을 흔들면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사심희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일행이신가 보죠?”

“사심희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촬영 담당하고 있어요.”

“오늘 멋진 장면들 많이 담아 주세요.”

“목소리가 참 좋으시네요.”

사심희의 말처럼 백상효의 목소리는 품위가 넘쳤다.

“그럼 승선하지. 왕돌초 바닥을 구석구석까지 제일 잘 아는 선장일 거야.”

배에 올라 선장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그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상효도 궁금했는지 선장에게 묻자, 그의 입에서 불길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제 일본 남부에서 작은 지진이 발생했나 봐요. 오늘 조황이 좀 걱정돼서요.”

“그런가? 날짜를 잘못 잡았나? 하지만 어쩌겠나. 낼모레가 부친 팔순이라 미룰 수도 없었으니.”

“괜히 미리부터 걱정하시게 만들었네요. 일단 나가 보면 알겠죠.”

지진이라니.

태풍이 오기 전이나, 지진이 있을 경우 예민한 물고기들이 먼저 알고 도망친다는 말이 있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그럼 아까 내가 느꼈던 현기증도 혹시…….

우스꽝스럽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곧 피식 웃어넘겼다.

아무튼 썩 좋은 조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 배가 출발하고 상쾌한 바람을 맞게 되자, 우려는 씻은 듯이 사라진 것 같았다.

달리는 배 안에서 백상효가 말했다.

“그래도 승부는 승부니까 룰을 정해야겠지.”

“마릿수로 할지 무게로 할지 저는 상관없습니다.”

“대물 낚시는 주로 무게로 한다네. 그럼 무게로 하지. 대상어는 방어나 부시리나 다 포함하는 걸로 하고.”

백상효는 AON과의 방식을 그대로 제안했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꾸르릉~~

전속력으로 달리던 배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면서 몸이 선수 쪽으로 쏠렸다. 첫 포인트에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제법 먼 길을 달려오는 동안에 물돌이 시간이 지나고 본격적인 밀물이 진행되면서 조류의 흐름이 빨라져 있었다.

갑판 위에서 열심히 사방을 둘러보던 백상효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말로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군. 보일링이 전혀 보이지 않아. 아마도 깊은 곳에 꽁꽁 숨어 있는 건지…….”

백상효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깅대를 꺼냈다.

수직으로 깊은 물 속을 공략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나도 그를 따라 지깅대를 꺼내서 연결하고, 준비해 온 메탈지그 박스를 펼쳐 보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백상효가 예상대로 만족한 미소를 보였다.

“꼭 내 제품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네만, 메탈 선택은 훌륭하군. 그렇게 최소한 다섯 종류 이상을 골고루 챙겨 와야 좋지.”

다행이다. 사실은 잘 몰라서 몽땅 사 온 건데.

“문제는 디자인별로 그 의미를 아느냐는 것이지. 상황에 따라 상이한 저킹 액션과 침강 액션을 구사하는 것도…….”

나를 위해 열심히 설명해 주는 그가 고마웠지만,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못했다.

배가 멈추자 또다시 현기증이 느껴져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런대로 무난한 은색 갈치 문양의 메탈지그를 꺼내 들고 나는 백상효의 옆자리에 다가섰다.

어디 보자. 정말로 깊은 물 속에 꽁꽁 숨었나.

입술을 오므리고 내려다본 깊은 수심의 바다.

휘파람에 닿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심해 바닥을 본 순간, 내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이런 바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물속에서 생명체의 흔적이라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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