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새우등
분당 판교역 부근의 식당가 건물.
건물 전체가 유명 프랜차이즈 식당들로 꽉 채워진 이곳은, 나도 처음 와 봤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내게 밥을 사는 거예요?”
“혼자 먹으려니까 심심해서 불렀어.”
“오! 여기 규카츠 괜찮은데요?”
“괜찮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아까부터 무슨 할 얘기가 있는 표정인데……. 설마 내게 프러포즈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죠?”
“어휴. 참.”
직설적인 농담을 던지는 그녀 때문에 나는 종종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아메리칸 스타일이라 그런가.
솔직히 딱히 할 얘기가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정말로 혼자 먹기 심심해서 부른 것도 아니었다.
내 마음을 내가 알지 못하겠다.
처음에는 그녀가 정확하게 언제 미국으로 떠나는지, 혹시 계획에 작은 변화라도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녀의 얼굴을 대하고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뉴욕의 내로라하는 유명 식당을 물려받을 그녀.
뭐라고 말해 볼 명분도 없고, 자격도 없고, 용기도 없다는 게 지금의 내 현실이었다.
“아, 잘 먹었다. 우리 나가요. 커피는 내가 살게요.”
“응. 그래.”
같은 건물에 있는 카페로 옮기고 나서도 나는 거의 말이 없었다. 사심희가 하품을 연발하며 투덜거렸다.
“참 재미없네요. 불렀으면 하다못해 낚시 얘기라도 하든가. 다음 출조는 생각해 놓았어요?”
“글쎄. 겨울이 가까워지니까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네. 선상 지깅이나 갈까 고민 중이야.”
“대상어는 생각해 봤겠네요.”
“겨울이니까 방어나 잡아 볼까.”
낚시 얘기에 잠깐 활기를 띠었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다시 긴 침묵이 흐르자, 나는 작심하고 마른 입술을 떼었다.
“저어, 그런데 말이야…….”
“어? 누구 전화 온 것 같은데…… 진동 소리 안 들리세요?”
바지춤을 뒤적거려보니 내 휴대폰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어, 우리 강 프로님! 지금 뭐 하고 계신가?”
“집 근처에서 커피 마시고 있는데요.”
백정철 프로의 전화였다.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시각인데 어쩐지 술에 취한 목소리였다.
“그럼 이리 넘어오게. 마침 나도 분당에 와 있네. 자네가 와서 인사해야 할 사람이랑 함께 있다네.”
“누구요?”
“자네가 보면 틀림없이 반가워할 분이야. 서현역 4번 출구 쪽에 있는 1층 참치집이네.”
누굴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끊자, 사심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그분이군요. 얼른 가 보세요.”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미안하긴요. 덕분에 점심 잘 먹었는데요.”
“그래…….”
그녀와 헤어지고 택시에 오르면서,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봄이 오면 떠날 계획인지 물어보려 했던 내가, 그녀가 한국에 더 머무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어반자TV의 시작을 멋지게 열어 준 그녀.
그녀의 공백은 내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일이 되겠지만. 나는 결국 그녀를 보내는 일 외에 다른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
남아 있는 나날 동안 그녀가 좋은 기억을 안고 떠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건가.
꽃길을 걸어갈 그녀를 멀리서 축복하는 일이,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사실이 나는 서글프게 만들었다.
* * *
분당 서현역 인근의 참치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님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강 프로! 여기야!”
백정철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식당을 찾은 여러 테이블의 손님들이 나와 백정철을 동시에 힐끔거리고 있었다.
가만, 저분은…….
자연스럽게 내 시선은 백정철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사내에게로 쏠렸다.
말도 안 돼!
한눈에 보아도 누군지 알 수 있는 그분을 발견하고, 나는 식당 입구에서부터 고개를 숙인 채로 달려갔다.
“백상효 프로님 아니십니까? 강유록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무 갑자기 부른 거 아닌가? 하하하.”
목욕탕을 울리는 듯한 굵은 목소리와 호탕한 웃음소리.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다름없는 특징들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진짜로 그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일명 ‘백상어’라 불리는 그는, 한국의 빅게임 앵글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1세대 프로 조사다.
그는 지금도 동명의 케이블 프로그램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고 있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백정철이 두 사람의 인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옆자리를 권했다.
“어서 앉게. 언젠가 자네가 세계 낚시 대회 얘기를 꺼내지 않았나. 문득 생각나서 백상어 형님에게 말했더니 자네를 보고 싶다고 하더군.”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백상효가 소주병을 내게 내밀었다.
“강유록이라고 했나? 요즘 잘나가는 낚시 유튜버라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열심히 하고는 있습니다.”
“겸손할 필요 없어. 정철이도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더군. 아무튼 반가워.”
“네. 그럼 한잔 주십시오.”
“난 술을 못 마신다네. 편하게 한 잔만 받게.”
“아, 감사합니다.”
초면에 실례가 될 것 같아, 딱 한 잔만 받아 놓기로 했다.
그에게서 받은 술잔에 입술만 댔다가 내려놓았더니, 백상효가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꼭 내 젊었을 때를 보는 것 같군. 천진난만한 것 같으면서도 야수의 눈빛을 하고 있어. 빅게임 낚시에도 관심이 있나?”
“그럼요. 하지만 경험은 아직 일천합니다.”
“국제 낚시 대회에도 관심이 있다고?”
“관심이야 있지만, 제가 그럴 자격이 있겠습니까.”
몸을 낮추고 그렇게 말했더니, 백정철이 끼어들었다.
“자네 백상어 형님이 왕년에 비즈비 뭐시긴가 하는 대회에 참가했던 거 알고 있나?”
“아니요……. 잘 몰랐습니다.”
백상효에 비해 한 살 아래인 백정철은 친분을 과시하듯 그를 닉네임으로 불렀다.
그의 닉네임을 딴 ‘백상어 지깅 낚시 대회’가 매년 국내에서 열린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국제 대회에 참가했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백상효가 손사래를 치며 해명에 나섰다.
“수상자 명단에도 들지 못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신경 쓸 것 없어. 어쨌든 오늘 참치 맛이 참 좋구만. 한 점 먹으면서 얘기하지.”
“아, 네.”
언젠가 TV에서 백상효가 멕시코 근처의 망망대해에서 300kg에 육박하는 괴물 참치를 끌어 올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무려 세 시간에 걸친 사투는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명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비즈비 블랙 앤 블루가 대체 어떤 대회길래…….
빅게임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보유한 그가 수상자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참치의 허연 뱃살을 집어 기름장에 찍어 먹는 나를 보며, 백정철이 장난스럽게 눈을 찌푸렸다.
“참치, 그거 너무 많이 먹지 말게나. 큰 물고기는 움직임이 둔해서 맛이 차지지 못하다네.”
“저는 맛있습니다만…….”
백상효에게 들으라고 하는 농담처럼 들렸다.
백정철은 백상효의 뾰로통한 표정으로 보고, 한술 떠 뜨기 시작했다.
“자네 백상어 형님이 오늘 왜 참치집에 온 줄 아나? 그저께 참치 낚시 갔다가 꽝을 치셨거든. 그래서 아쉬움이나 달래 주려고 여기로 모시고 온 걸세. 큭큭큭.”
듣고 있던 백상효가 발끈하고 나섰다.
“우리나라에서 참치 잡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운이 따르지 않으면 꽝은 다반사야.”
“아이고, 형님 그래도 명색이 백상어가 꽝이 뭡니까.”
“그리고 참치가 왜 맛이 없는가? 자네가 맨날 쫓아다니는 감성돔이니 참돔이니 난 그런 건 물고기로 보지 않는다네.”
“감성돔 맛을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형님. 맨날 등 푸른 생선만 드시니까 진정한 회 맛을 모르고 사셨던 거라고요.”
갯바위의 명인과 빅게임의 전설이 만났으니, 각자의 전공 분야 대한 자부심이 장난스럽게 부딪히고 있었다.
백정철이야 술에 취했다고 치지만, 백상효라는 분도 TV에서만 보던 점잖은 모습과 달리 장난기가 많아 보였다.
백상효와 한바탕 티격태격하던 백정철이 내게 불쑥 물었다.
“강 프로 자네는 다음 출조 계획이 어떻게 되나?”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잘됐네. 벵에돔이 어떤가? 요즘 제주도에서 한창 나오고 있을 때라네.”
“……뱅에돔 좋죠.”
예의상 맞장구를 쳐 주다가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정철이 내 대답을 빌미로 백상효에게 반격에 나섰다.
“보세요. 형님! 요즘 젊은 친구들은 찌낚시를 선호하는 추세라니까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라.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두 사람의 신경전에 말려 들어가게 생겼다.
백상효가 눈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자네는 대물 낚시에 최적화된 몸을 타고났어. 키도 훤칠하고, 군살도 없고, 근골이 장대한 것이 빅게임에 최적화된 체형이야.”
“……그렇습니까?”
“초면에 실없는 소리 하겠는가? 뱅에돔은 치우고, 방어나 잡으러 가시게. 겨울에는 방어지.”
“사실은…….”
말을 꺼내려다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방어를 잡으러 갈 거라고 말하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은근슬쩍 대화에서 빠지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나는,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손을 씻고 돌아와 보니, 두 사람의 설전이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점입가경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백정철이었다.
“자네가 말해 보게. 갯바위 찌낚시인가? 아니면 빅게임인가?”
“네에?”
“자네도 언젠가 프로의 세계로 들어와야 하지 않겠는가?”
“죄송하지만 아직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다양한 낚시를 즐기는 게 목표입니다.”
“어허, 말도 안 되는 소리일세. 지금처럼 초반에 다양한 낚시를 즐기는 단계는 필요하지. 하지만 낚시를 하다 보면 자신만의 특화된 분야가 만들어지는 법이네. 또 그래야 하고. 어느 쪽인가? 찌낚시인가? 아니면 무식한 힘자랑 낚시인가?”
술에 취한 백정철은 약간 막무가내였다.
후배의 앞날을 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나로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번에는 백상효가 내게 눈짓을 보냈다.
“언제까지 회초리 같은 낚싯대로 손바닥만 한 물고기나 쫓아다닐 건가? 그건 시간 낭비야. 진정한 사냥꾼이라면 대물을 꿈꾸는 법이지. 어쨌든 자네의 대답을 들어 보고 싶네만.”
아아, 머리가 어지럽다.
나에게는 자장과 짬뽕의 선택이나 다름없는 질문이다.
평소에 존경해 오던 한국 낚시의 양대 산맥 앞에서 나는 지상 최대의 난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나는 정확한 내 생각을 밝히는 것으로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저는 손가락만 한 물고기나 저보다 큰 물고기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저 즐거움을 추구할 뿐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계획입니다.”
우직하게 양자택일을 피해 간 내 대답에 백상효는 일단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나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자네 백상순이라는 사람 알지?”
“백상순……? 처음 듣는데요?”
“AON이라고 해야 알겠군. 자네와 같은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지,”
“아아, 압니다.”
“그 녀석이 내 사촌 동생이라네. 그 녀석이 말하더군.”
“뭐, 뭐라고 말입니까?”
“아마도 자네가 한국을 대표하는 빅게임 앵글러가 될 것 같다고.”
놀라운 얘기였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얘기는 그 뒤에 이어졌다.
“물론 낚시는 즐겨야지. 하지만 우리 선배들은 후배들을 발굴하고 육성할 책임도 지고 있다네. 어떤가? 나와 방어 낚시를 한번 가 보지 않겠는가? 내 직접 눈으로 자네의 가능성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그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