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개우럭
며칠 후.
나는 고동우와 함께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지만, 뜸을 들이고 있던 중이었다.
“할 얘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냐? 중요한 거 아니면 나중에 하자. 지금 아래층에 손님들이 많거든.”
고동우는 단숨에 커피를 들이켜고 궁둥이를 들썩거렸다.
최근 들어 그는 낚시점 일에 부쩍 매달리는 모습이었다.
나와 보람이가 2호점, 3호점을 열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에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감이 커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지난 추석 때도 당일에만 쉬고, 연휴 내내 문을 열었던 그였다. 그것만 봐도 그의 조급증이 어떤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이제 멀티싱커가 글로벌 판로를 확보하게 된 시점.
나는 국내 오프라인 판권을 가지고 있는 어반자스토어에도 큰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람이와도 충분히 상의하여 내 결론이었다.
지금 내가 꺼내려는 화두는 어반자 계열사 간의 사업 조정이었다.
“구피님. 2호점은 언제쯤 가능하겠습니까?”
“글쎄다. 지금 속도라면 내년 봄이 목표다만. 솔직히 너희들 뜻은 알겠다만, 지금에라도…….”
“또 그 얘기시다. 제가 속도를 훨씬 당길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릴까 합니다.”
“……그런 게 있었냐?”
“국내 온라인 판권까지 모두 구피님이 맡으시면 됩니다.”
“…….”
고동우는 너무 놀란 나머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픈 마켓도 좋지만, 이참에 전용 온라인 몰을 만드시면 좋겠어요. 멀티싱커는 이제 국내에서는 구피님이 알아서 팔아 주시는 겁니다.”
“그럼 도라에몽은? 온라인 영업권을 나에게 넘기면…….”
“어휴. 도라에몽도 꼭 그렇게 하도록 부탁해 달라고 했어요. 그 친구도 숨을 좀 돌려야 살죠. 어반자팩토리는 앞으로 생산만 전문으로 할 거예요. 온라인 주문 확인하고 택배 부치고 그럴 틈도 없다고요.”
“그래도…….”
“아무튼 이건 어반자 본사의 결정입니다. 보람이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
고동우의 표정이 오묘했다.
고마움과 미안함과 무거운 책임감이 교차하고 있을 그의 심정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고맙다. 내가 더 잘하마.”
감격에 겨워 울먹거리려 하는 고동우 때문에 얼른 화제를 바꿔야 했다.
“이제 명실상부한 어반자 판매 법인의 수장이 되셨는데, 사무실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온라인 몰도 만들어야 하고, 포장 업무도 해야 할 테고…….”
“여기 아지트를 반쯤 갈라서 쓰면 어떨까요? 우리 멤버들만 쓰기에는 너무 넓기도 하고요.”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나.”
“인테리어 공사 해 보세요. 새로 들어올 직원들 불편하지 않게 완전히 벽을 쳐 주시는 게 좋겠어요.”
휴유. 하도 많이 떠들었더니 맥이 빠진다.
고동우가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나는 한참 동안 소파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대형 수출 계약에 이은 어반자 내부의 사업 조정.
괜히 사업을 시작했다 싶을 정도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내 본업은 낚시인데…….
아직 다음 출조도 확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덧 10월의 마지막 달력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지트 주방 쪽에 번쩍이는 뭔가가 눈에 띈 것은 집에 가려고 일어날까 망설이던 순간이었다.
황금 트로피.
원래는 충주 집에 보관하려고 내려갔다가, 엄마의 마음만 어둡게 만들 것 같아 도로 가져온 물건이다.
분당 자취방에 다시 가져가 놓을까 했지만, 베타가 자꾸만 건드리는 통에 차라리 아지트 주방 선반에 올려놓았다.
트로피를 바라보자, 아련하게 김혁준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치료는 잘 받고 있는지.
그동안 몇 번이나 그의 번호를 휴대폰에 띄웠다가 지우기를 반복하곤 했다.
희소식이 아닌 불길한 소식이 염려되어, 나는 선뜻 전화를 걸지 못하고 망설였다.
벌써 거의 한 달이 지났군.
나는 용기를 내어 그의 안부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통화 발신음 길게 이어졌다.
어떤 목소리가 튀어나올지 조마조마한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나는 수화기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상하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나는 5분 정도 기다린 뒤에 다시 통화를 시도해 보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에 슬슬 불길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을 때였다.
지이익~ 지이익~
손에 쥐고 있던 내 휴대폰이 진동음을 내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여 발신인을 확인해 보니…….
백정철이었다!
반가워야 할 그의 이름이 이토록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이유가 뭘까. 불길한 생각을 애써 머릿속에서 털어 내며,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백 프로님?”
“음……. 통화 괜찮은가?”
“……네. 무슨 일이라도…….”
백정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자네에게는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네.”
“설마…….”
“지금 혁준이가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로 들어갔어.”
“네에? 그럼…….”
“기적이 일어났어. 거의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간 이식 수술을 받았다네.”
아아.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에 밀려온 감정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수술은 잘된 건가요?”
“의사 말로는 회복만 잘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하더군. 지켜봐야 하겠지만.”
“너무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러게 말일세. 살겠다고 마음을 돌리니까 살게 될 줄이야. 사실 이제야 말하네만, 수술이 아니었으면 올해를 넘기기 어려웠을 거라고 하더군.”
“…….”
마지막 헤어질 때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해맑은 미소가 떠올라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다시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백정철의 음성은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혁준이가 말하더군. 살아서 돌아오면 자네와 우럭회에 소주를 마시기로 약속했다고 말이야.”
“아아. 그랬었죠.”
“안타깝지만 수술 후에도 그런 음식은 입에 댈 수가 없을 거야. 평생을 조심하고 살아야 하니까. 대신에 그 녀석이 좋아하는 우럭탕은 맘껏 먹게 해 주고 싶은데…….”
백정철의 말꼬리가 슬쩍 흐려지는 걸로 보아, 뭔가 부탁을 하려는 것 같았다.
“제가 좀 잡아 올까요? 아주 좋은 놈으로.”
“그게 아니고 나랑 같이 가자는 말을 하는 거네.”
“……정말입니까? 저야 언제든 좋습니다.”
“일전에 자네 방송에 출연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술자리 약속인지라 나는 별로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백정철은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사실 나는 찌낚시 전문이라 선상 우럭은 자네만 못할 수도 있어. 자네와 함께 간다면 혁준이가 두고두고 먹을 만큼 충분히 잡을 수 있겠지.”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겨울을 앞둔 시점.
조만간 먼바다로 자취를 감출 자연산 우럭은 지금 잡지 않으면 내년 봄이나 만날 수 있다.
힘든 수술을 마치고 회복 중이라는 김혁준.
양식 우럭도 좋은 대안이 되겠지만, 이왕이면 직접 잡은 자연산 우럭을 보내 주고 싶었다.
냉동실에 넣고 겨우내 꺼내 먹으려면, 튼실한 우럭을 마릿수로 잡아야 할 텐데.
나와 백정철의 실력이면 최소 열 마리는 무난하지 않을까?
잠깐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백정철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외쳤다.
“아! 황선태 프로도 함께하면 좋겠구만.”
“그렇죠. 황 프로가 작년에 우럭 낚시 대회에서 대어상을 받지 않았습니까?”
“우리 세 명이서 뭉치면 쿨러 가득 잡아 올 수 있을 걸세. 황 프로에게는 내가 연락하지.”
우리는 구체적인 일정과 약속 시간을 정하고 통화를 마쳤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내 머릿속에는 벌써부터 5짜 개우럭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머지않아 퇴원하여 진주집으로 돌아간다는 김혁준이 따끈한 우럭 지리탕으로 원기를 충전하게 될 모습에, 내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 * *
“어휴, 무겁다.”
새벽의 동이 트기 시작한 충남 신진도항.
나는 낑낑거리며 낚싯짐을 배 위에 옮기고 있었다.
“그러게 왜 대장 쿨러를 가지고 왔어요?”
함께 짐을 나르던 사심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선장도 선수 갑판에 내려놓은 대형 아이스박스를 내려다보고 놀라는 기색이었다.
“세 분이서 이걸 다 채우시게요?”
“하는 데까지 해 보려고요.”
“유명한 프로 조사님들을 모시게 된 점은 영광이지만, 약간 부담되네요. 하하.”
“부담 갖지 마시고 침선에만 잘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그야 당연하지만…….”
선장은 영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선실로 쏙 들어갔다.
사심희가 주변을 둘러보며 내게 물었다.
“두 분은 아직 안 오셨나 봐요.”
“좀 늦으시는 모양이네.”
“그런데 오늘 날씨가 좀…….”
그녀의 걱정스러운 말뜻을 알 것 같았다.
조금물때에 좋은 날로, 서해에서 침선 우럭 낚시에 정평이 나 있는 배를 통째로 예약해 두었다.
그런데 기상이 영 좋지가 않다.
기상청의 예보로는 오후부터 먼바다에서 약간의 너울이 일 거라고 했지만, 벌써부터 가까운 바다가 꿀렁대고 있었다.
그래도 프로 조사를 두 분이나 모셨는데.
황선태의 선상 낚시 실력은 일찌감치 눈으로 확인한 뒤였다.
갯바위 낚시의 명인이라 불리는 백정철 또한 용감한 어부에서 여러 장르의 낚시에 발군의 실력을 선보인 프로 중의 프로가 아닌가.
사심희의 걱정이 또 시작되었다.
“날씨도 그렇지만, 나눔 신청을 받은 건 무리 아녜요?”
“무슨 소리야. 약속은 약속이잖아. 그리고 무적의 3인방이 출동하는데 뭐가 걱정이야?”
김혁준을 위해 나서게 된 낚시지만, 가능하다면 어반자 시청자들과의 약속 또한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두 명의 프로 조사가 함께하는 것도 내가 큰소리친 이유였다.
11월 초순의 우럭.
겨울을 나기 위해 몸에 충분한 지방을 축적한 지금의 우럭은 다른 어떤 계절보다 맛이 훌륭하다.
나는 가급적 많은 구독자들에게도 가을 우럭의 참맛을 선사하고 싶었다.
우선적으로 김혁준에게 보낼 개우럭 다섯 마리를 채운 뒤에, 나눔을 위한 마릿수까지 도전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이몽규과 지상철이 어반자TV를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명의 고수들과 함께하게 되었다는 연이은 낭보에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그래서 나는 고수들과의 낚시를 기념하는 이벤트로 오랜만에 선착순 나눔을 예고했다.
“아이고, 벌써 와 있었구만.”
“우럭 형님! 잘 지내셨어요?”
먼바다를 바라보며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때, 두 사람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배에 올랐다.
“밤길에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뭘. 혁준이를 위해서라면 어디든 못 가겠나. 이쪽이 사심희라는 그 유명한 분인가?”
백정철은 사심희를 보고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어머, 제가 유명했었나요?”
“그럼요. 갈치로 장미꽃을 만드는 마술사 아니십니까?”
“반가워요. 사심희라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인사를 보다 보니, 황선태도 그녀와는 초면이라는 걸 깨달았다.
“황 프로! 여기 내 동료분이야. 서로 인사하지.”
“반가워요. 사심희예요.”
“하하. 저는 황선태입니다. 방송에서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아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오늘도 사심희 님의 마술을 기대해도 될까요?”
“그럼요. 많이 잡기만 하세요.”
선실에서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선장이 쿠르릉 소리를 내며 배를 후진시켰다.
“최고의 낚시꾼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미끄러지듯 배가 방파제를 빠져나가자, 황선태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이놈의 구라청이 또……. 약간의 너울이라 하더니만.”
“잠깐 이러다 말겠지.”
“그렇겠죠? 물 튀겠어요. 어서 들어가시죠.”
황선태의 뒤를 따라 우리는 선실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세 시간 동안 선실 안에서는 즐거운 수다가 이어졌다.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최고 낚시꾼들과의 동행.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황선태가 주먹을 불끈 쥐며 우리에게 외쳤다.
“오늘 각자 개우럭 열 마리씩은 잡는 겁니다.”
희망에 부푼 출조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가끔씩 배가 두둥실 떠올랐다가 바닥에 내려앉는 바람에 엉덩이가 들썩이는 것만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