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낚시로 인생 역전-75화 (75/130)

[제75화] 협상

뜬금없는 이메일이었다.

‘사업 제안’이라 적힌 미열람 메일을 발견하고, 처음에는 스팸 메일이라고만 생각했다.

휴지통에 넣어 버릴까 하다가, 무심코 열어 본 메일의 내용은 의외로 간단했다.

―멀티싱커 제품에 관심을 가진 업체입니다. 시간을 내어 주신다면 사업 제휴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 시선은 곧바로 메일 하단에 있는 업체명과 직함으로 쏠렸다.

[JJ Fishing]

한국지사 지사장, 이상길.

제이제이 피싱이라면…….

조구 유통업계에 대해 무지한 나로서도, 들어 본 적은 있는 업체명이었다.

나는 포털 사이트에서 ‘제이제이 피싱’을 검색해 보았다.

사업 영역 페이지를 살피던 내 동공이 점점 확장했다.

일본의 유명 브랜드 낚시용품들을 한국에 공급하는 조구 도매업체로만 알고 있었다.

제이제이는 내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초대형 조구 유통업체였던 것이다.

홈페이지에 적힌 표현대로라면 조구 업계에서는 글로벌 Top 3에 꼽히는 초대형 유통 그룹이라 적혀 있었다.

일본에 본사를 두고 있는 제이제이는 현재 일본 본토는 물론 중국, 대만, 호주 등지에 대형 낚시 매장을 직영하고 있었다.

이런 큰 회사가 멀티싱커에 관심을?

큰 기회라고 판단한 나는 곧바로 답신을 보냈다. 전화번호도 있었지만, 어쩐지 섣불리 전화를 거는 일은 꺼림칙했다.

―제안 메일 잘 받았습니다. 당사의 제품에 대한 깊은 관심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우리 제품과 어떤 방식의 제휴를 원하시는 건지 선뜻 이해가 가질 않네요. 혹시 소싱을 원하시는 거라면 만날 의향이 있습니다.

이상길의 회신은 그날 저녁에 날아들었다.

―빠른 회신 감사합니다. 현재로서는 귀사의 생산 역량 등을 고려하여 직접 소싱보다는 라이센스 방식을 우선 검토 중에 있습니다.

귀사가 원하는 로열티 수준을 미리 알려 주시면 향후 논의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번쩍 뜨였던 눈동자가 스르르 작아지고 말았다.

일견 솔깃했지만, 동시에 씁쓸한 내용이 담긴 편지였다.

짧은 글 안에 숨겨진 의미를 해독하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 했다.

‘귀사의 생산 역량 등을 고려하여…….’

신생 업체인 어반자팩토리의 생산 여력을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때는 그냥 넘겨짚었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 보니 그들은 이미 은밀하게 공장을 다녀갔던 것 같다.

‘라이센스 방식을 우선 검토 중에 있습니다.’

그들이 직접 제조하고 그들의 상표를 붙여 현지에서 판매하겠다는 의미였다.

쉽게 말해서, 멀티싱커의 특허권만 빌려서 쓰겠다는 것이다.

중간에 붙인 ‘우선’이라는 단서로 보아, 다른 방식의 협상에도 약간은 오픈되어 있다는 말뜻 같았다.

‘원하는 로열티 수준을 미리 알려 주시면…….’

직장 생활이라야 기껏 일 년 남짓한 나로서도, 패를 먼저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그건 협상의 기본이 아니겠는가.

나는 다시 이메일을 보내 그들과 직접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약속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보람이를 찾아온 것이다.

나의 긴 설명을 듣고 난 뒤에 보람이는 담뱃갑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첫 반응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로열티를 챙길 수 있겠네?”

“말하자면 그렇지.”

“얼마나 줄까?”

“솔직히 나도 감이 전혀 없어.”

“좋은 일이다만 어쩐지…….”

보람이가 말을 흐렸다.

기뻐하면서도 왠지 찜찜한 기운이 그의 얼굴을 맴돌았다.

보람이는 결국 담배를 또 꺼내 물었다.

“바다 건너에서도 사람들이 멀티싱커로 낚시하는 모습은 늘 상상만 하고 있었어. 한번 만나는 보자.”

“그래. 일단 부딪쳐 보자. 정 맘에 안 들면 지금처럼 하면 되잖아. 더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고.”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었다.

제이제이 같은 큰 업체의 제안이 언제 또 오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더구나 낚시용품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으로 국산 제품이 역으로 진입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보람이가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차에 올라탔다.

“내일 오후 세 시라고? 시간 맞춰서 갈게.”

“그래. 내일 아지트에서 만나자.”

룸미러를 통해 손을 흔드는 보람이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예상이 맞았다.

액수가 얼마가 되었든, 편하게 로열티만 챙기고 싶을 녀석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멀티싱커에 대한 애착이 많은 그로서는 자신이 직접 만든 제품을, 그것도 ‘어반자팩토리’의 상표를 달고 수출하고 싶겠지.

갑자기 공장을 방문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수출 기업으로 변모하려면 그에 걸맞은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비록 제이제이가 수용할지는 미지수지만 나는 플랜B에 대비할 필요를 느꼈다.

다행히 공장의 여유 공간이 많아, 설비를 서너 배 확충할 수 있는 여력은 있어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공정의 흐름과 동선도 표준화된 방식을 따라 굴러가는 것 같아 그럴듯해 보였다.

어쩌면 직접 수출은 로열티 방식보다 훨씬 어려운 환골탈태의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로열티 제휴 방식도 하나의 좋은 대안이라는 생각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보람이가 원하는 방향을 따르기로 했다.

그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든, 그 테두리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리라 결심했다.

* * *

다음 날 오후 3시.

“여기 제 명함입니다.”

“반갑습니다. 젊은 분들이라 얘기가 잘 통할 것 같군요. 저는 제이제이 피싱의 이상길이라고 합니다.”

말쑥한 양복쟁이가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 놀랐는지, 고동우가 계단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가 사라졌다.

“저는 어반자팩토리를 맡고 있는 김보람이라고 합니다.”

“우린 서로 구면이죠?”

“네. 일전에…….”

“불쑥 찾아갔던 점, 양해 바랍니다. 사실 어떤 공장인지 무척 궁금했었습니다.”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끝나자, 이상길은 가져온 서류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비닐에 덮인 문서를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았다.

“각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저희가 생각하고 있는 최선의 안입니다. 물론 본사의 승인을 받은 제시안입니다.”

나와 보람이는 물끄러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제목은 ‘라이센스 제휴 방안’이었고, 그 아래 굵은 글씨체로 금액이 적혀 있었다.

‘일시금 30억 원 + 순매출액의 1.5% 연동’

하마터면 입에서 억 소리가 나올 뻔했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액수였다. 팔자를 고칠 정도는 아니지만 평생 만져 보기 힘든 금액에 목덜미가 빳빳해졌다.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게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동안, 이상길은 턱을 쭉 내밀었다.

“본사에서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멀티싱커 기본 제품과 모든 연관 제품들에 대한 지적 재산권과 제작 매뉴얼을 저희가 향후 5년간 사용한다는 조건입니다. 물론 한국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나는 곧바로 보람이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는 입술을 쭉 내밀고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나는 짐짓 점잔을 빼며 그에게 물었다.

“도라에몽, 아니 김 대표 생각은 어때?”

“글쎄. 이상길 지사장님이라고 하셨죠? 혹시 우리가 이 제안을 수용한다면 제작은 어디서 하실 계획이신가요?”

보람이의 질문에 이상길은 준비된 대답을 술술 내놓았다.

“저희가 유통만 하는 게 아닙니다. 단순한 소품들은 PB상품으로 만들어 팔기도 하죠. 중국에 이미 여러 협력업체들이 있으니까, 제작은 염려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제품이 그렇게 단순한 소품은 아닌데…….”

보람이가 말꼬리를 길게 흐렸다.

예상대로였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상길은 씩 웃으며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의 어색한 미소로 보아, 어린 두 친구가 큰 액수를 보고 덥석 물어 줄 거라고만 예상했던 모양이다.

“하하. 오해는 마세요. 저는 그저 멀티싱커도 크게 보면 봉돌이 아니겠습니까. 도면만 넘겨주시면 중국 업체에서도 제작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말이었…….”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보람이가 이상길의 말허리를 끊고 나섰다.

“나름의 정성과 노하우가 녹아 들어간 제품입니다. 나사홈에 물이 들어가 무게를 변동시키지 않도록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도금 공정에서 암나사가 막히는 문제도 긴 연구 끝에 풀어냈고요. 그리고 외관 또한 대상어의 습성을 고려해서 최적의 형태를 고안한 결과입니다.”

이쯤 되니, 이상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시작했다.

“나름 애착이 있는 제품이란 건 알겠습니다. 그럼 이 금액으로는 수용하기 어렵다는 얘긴가요?”

“금액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직접 생산하는 방식이 아니면 이 대화는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보람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보람이의 어조는 단호했다.

이러다가 협상 자체가 깨지지 않을까 심히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너무 세게 나간 건가…….

이상길이 입술을 실룩거리며 가져왔던 서류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가 서류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을 때만 해도 나는 협상이 종료되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않았던 반전이 일어났다.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구석에 가서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본말로 이러쿵저러쿵 소곤거리던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어렴풋이 그가 다른 방안을 들고 왔다는 것을 감지했다.

“좋습니다. 기민하게 낚시 주요국에 특허를 걸어 놓은 사실을 알았을 때 만만한 분들이 아닐 거라고 알아보긴 했습니다. 그럼 바이앤셀(Buy and Sell) 방식으로 추가 논의를 시작해 보시죠.”

아아, 우직하게 돌직구를 날린 보람이의 승리였다.

결국 이상길은 한발 물러서 다른 카드를 꺼내기에 이르렀다.

보람이가 큰 틀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나설 차례인가.

나는 간밤에 묵은 교과서를 펼쳐 들고 줄줄이 암기한 체크 리스트들을 읊어 대기 시작했다.

“계약 기간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5년으로 시작하시죠.”

“일본을 포함한 해외 4개국에는 독점 판매 조건이겠죠?”

“그건 절대로 양보하지 못할 전제 조건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우리에게도 반대급부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제이제이만 믿고 대규모 설비 투자를 해야 하는 입장 아닙니까? 연간 최소 물량 개런티가 필요합니다.”

“음. 개런티 수량은 본사와 얘기해서 계약서 초안에 담아 보겠습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마음을 쓸어내리던 순간, 이번에는 이상길이 물어왔다.

“우리에게 납품하는 가격은 얼마로 하시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걸 빼먹었구나.

나는 얼른 생각해둔 액수를 머릿속에서 꺼냈다.

“우리 공장 출구에서 인수도하는 기준으로 기본형 세트당 1만 2천 원이 어떨까요? 아래층에 있는 우리 직영 매장과 동일한 조건입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나는 어반자의 입장에서 수출도 내수와 동일한 조건이 합리적일 거라 판단했다.

물론 해외에서의 최종 판가는 운송하는 데 필요한 국내외 물류비 등을 부담할 제이제이 측이 알아서 책정하라는 의미였다.

“좋습니다. 한국 최종 판가가 다소 싸다고 판단하고는 있었습니다.”

초반에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그리 길지 않은 협상이었다.

이상길은 식은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낚시만 좋아하시는 분들인 줄 알았는데, 사업에도 재능이 있으시군요.”

“아닙니다. 애착이 있는 제품이다 보니 조금 깐깐하게 굴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행히 잘 마무리되어 저도 한시름 놓았습니다. 이제야 말하지만, 솔직히 빈손으로 돌아가면 어떡하나 표정 관리하기 힘들었습니다. 하하하.”

아까 보람이의 돌직구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않았을 때 대충 짐작은 했다.

하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놀라웠다.

“일본 본사에서 필드 테스트를 여러 번 해 본 모양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일본에서도 히트 상품이 될 거라 판단한 것 같습니다. 제게 무조건 성사시키고 오라는 신신당부가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만든 멀티싱커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에서 그런 평가를 받고 있었다니. 보람이와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조만간 계약서 초안을 이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견 없으시면 바로 도장을 찍는 걸로 하죠. 오늘 고마웠습니다.”

이상길이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그를 주차장까지 배웅하고 그의 차가 출발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골목 모퉁이에서 이상길의 차가 사라지자마자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았다.

“보람아! 이게 꿈이냐 생시냐?”

“까얏호! 드디어 해외 진출이다!”

협상 내내 표정 관리하느라 더 힘들었던 사람은 우리였다.

멀티싱커의 해외 진출.

그날의 협상은 어반자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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