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은빛 칼날
용감한 어부에 아들이 출연한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난리가 났다.
“방송 날짜 잡히면 꼭 알려 줘라. 동네 사람들 전부 회관에 모이라고 해야 되겠다.”
“아유. 딱 한 번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여서 봐야지. 우리 마을에서 아직 TV에 나온 사람은 없었다. 경사다 경사!”
마을 입구에 플래카드를 걸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다시는 얼굴을 들고 고향을 방문하지 못하리라.
“그런데 엄마는요?”
“엄마에게는 내가 전해 주마. 무척 기뻐하실 거다.”
“왜요? 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지금 식당에 손님이 좀 있어서…….”
“알겠어요.”
사심희의 반응도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짜예요? 정말로 저도 함께 가는 건가요?”
“그렇다니까.”
“당장 내일부터 피부 관리 받으러 다녀야겠어요. 화면발을 좀 받아야 할 텐데.”
화면에 노골적으로 비치지 말라고 피디가 신신당부하던데…….
잔뜩 들떠 있는 그녀에게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예고편을 올리자마자 다닥다닥 붙기 시작한 댓글창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실화인가요? 우럭 님이 용감한 어부에 나오신다니.
―무조건 본방 사수입니다요.
―가셔서 꼭 완장 차고 오세요. ㅎ
―맨날 세네갈 갈치만 먹다가 이번에 국산 은갈치 맛 좀 보게 되나요?
댓글창의 감동을 느낄 새도 없이 전화통에 불이 났다.
사심희의 연락을 받고 장재준 영감과 보람이, 그리고 고동우가 연거푸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올 줄 알았습니다. 허허.’
‘본때를 보여 주고 와. 너만 한 사람 없을걸?’
‘그런데 출연료는 얼마나 준대?’
그래도 멤버들이 응원해 주니 한결 낫네.
갑작스러운 TV 출연으로 교차하던 흥분과 부담감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준비를 할 시간이군.
나는 외출 준비를 하고 곧장 아지트로 향했다.
장비부터 구입할 계획이었다.
그래도 TV 출연인데 낡은 구형 전동릴을 들고 갈 수는 없다. 이참에 새것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이른 아침이라 어반자스토어에는 그리 손님들이 많지는 않았다. 미리 전화로 귀띔을 해 둔 터라 고동우는 쓸 만한 전동릴을 골라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고, 스타 조사님 나오셨군요. 사인이라도 미리 받아 둬야 하나? 하하.”
“TV 나온다고 다 스타인가요. 그냥 땜빵맨이네요. 그런데 이거예요?”
“그래. 그 정도면 갈치는 물론 웬만큼 묵직한 건 쉽게 끌어 올릴 수 있을 거다.”
호오. 최첨단 장비처럼 모양새가 잘 빠진 전동릴이다.
고동우가 골라 준 건데 다른 건 볼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그런데 좀 비싸 보이는 게 흠이지만…….
“얼마예요? 카드 할부 되죠?”
“낚싯대도 사야지? 갈치 전용대도 없잖아.”
“장사 참 잘하시네요. 고객의 마음을 읽을 줄 아시다니. 낚싯대는 좀 싼 걸로 골라 줘 보세요.”
“벌써 여기 골라 놨어.”
고동우는 카운터 아래에서 고급 케이스에 담긴 낚싯대를 꺼내며 씩 웃었다.
“오! 좋아 보이는데요. 이걸로 100마리는 잡아야 될 텐데.”
“잘 잡는 사람들은 200마리도 넘게 잡지. 다만 올해는 갈치 조황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더라.”
“릴에 경심줄 좀 감아 주실 수 있죠?”
“당연하지.”
약간은 어설픈 손놀림이었다. 고동우가 전동릴에 단단히 줄을 감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벌써 낚시점 주인 행세를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었다.
“여기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자 고동우는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이건 내 선물이다.”
“구피 님! 뭐 하시는 거예요.”
“잔말 말고 카드 넣어 둬. 나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 아니다.”
“그렇지만…….”
“너 아니었으면 이 낚시점은 꿈도 꾸지 못했을 거야. 작은 감사의 선물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잘됐지 뭐냐.”
하아. 그래도 이건 아니다
호의는 받되, 공과 사는 구별하고 싶었다.
“계산해 주세요. 이러시면 다음부터 다른 낚시점으로 가야 해요.”
“누가 다음에도 공짜로 준대? 이번 한 번만이야. 나도 장사꾼이거든. 다음부터는 봉돌 한 개 값까지 정확히 계산할 테니 걱정 마셔.”
고동우의 태도는 완강했다. 어쩔 수 없이 이번만큼은 그의 마음을 받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잘 쓸게요.”
“덕분에 애들 학원 다시 등록했어. 우리 마나님도 너한테 고맙다고 꼭 전해 달라고 하더라.”
“다행입니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얼떨떨하던 차에, 갑자기 서너 명의 손님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그 바람에 나는 짐을 챙겨 인사를 건넸다.
“그만 갈게요.”
“그래. 바빠서 긴 얘기는 못 하겠다. 근데 갈치 채비 던지는 방법은 알고 있냐?”
“지금부터 또 해 봐야죠.”
나는 눈을 찡긋하고 낚시점을 나섰다.
고동우가 말한 것은 갈치 외줄 낚시에서 봉돌을 투포환처럼 멀리 던지는 방법이다.
기다란 기둥줄에 대략 10개의 가짓줄마다 줄줄이 바늘이 달렸으니, 초심자들은 바로 발밑에 봉돌을 떨구는 안전한 방식을 택한다.
200호나 되는 무거운 봉돌을 엉뚱한 방향으로 던지게 되면 다른 사람의 낚싯대에 엉키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가 인터넷에서 확인한 바로는 봉돌을 멀리 던져 채비를 촤르륵 한꺼번에 입수시키는 방법이 효과적이다.
방송에서 어설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나도 그 방법을 연마할 필요가 있었다. 초장부터 모양새가 빠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결론은 또 가상 훈련이다.
내게는 최적의 훈련장인 M 좌대가 있지 않던가.
나는 그날 오후를 삼길포의 M 좌대에서 보냈다.
인적이 드문 구석 자리에서 200호 대형 봉돌로 투포환을 하는 모습을 보며 주인장은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의 정확하게 목표 지점에 봉돌이 안착하는 것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니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어유. 팔이야.”
녹초가 되어 침대에 벌러덩 누웠더니 베타가 쪼르르 달려와 어깨를 꾹꾹 눌러 준다.
“고맙다. 너밖에 없구나.”
“야~~~~ 옹!”
오옷! 시원하다. 제법 앞발에 힘이 실렸다.
죽방 멸치를 먹여 튼튼하게 키운 보람이 있구나.
* * *
“사시미? 이름이 사시미 맞아요? 좀 무시무시한데?”
출조 당일 아침 이몽규가 자신의 이름을 밝힌 사심희에게 한 말이었다.
“사. 심. 희. 입니다.”
“아하. 난 또 장난치는 줄 알았잖아요.”
“다들 그러세요. 그냥 사시미라고 부르셔도 돼요.”
“여자분 이름을 그렇게 부르면 되나? 하하. 그런데 그 고양이는 왜 안 보이죠?”
“먼바다 나가는데 위험해서 어떻게 데려와요. 게다가 갈치 이빨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하긴 그렇네요. 베타라고 했던가? 소고기도 잘 먹고 엄청 귀엽던데.”
출연진을 위해 방송국에서 보내 준 승합차 안이었다.
역시 방송국이 좋다. 안락한 의자를 젖히고 이렇게 편히 갈 수 있다니.
사심희와 이몽규는 서로 죽이 척척 맞아 만담을 이어 갔다.
대화를 좋아하는 그녀를 잘 아는 나로서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오! 요리도 잘하신다고요? 촬영만 하시는 게 아니고?”
“저는 어반자TV에서 요리도 담당하고 있어요.”
“그럼 이따가 배에서 갈치회라도 좀 만들어 줄 수 있겠군. 하하.”
“저는 오늘 투명 인간처럼 조용히 있어야 한다던데요.”
“그거야 방송국 놈들이 하는 얘기고…….”
맨 앞자리에 있던 장진혁 피디가 뒤를 돌아보자, 이몽규는 급하게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오늘 우리 덕호 형님이 분발을 해 줘야 갈치회 맛이라도 볼 텐데.”
“저 잠깐 눈 좀 붙일게요. 사람들 주무시려나 봐요.”
“어, 그럽시다.”
둘의 수다가 그렇게 일단락되면서 차 안은 고요해졌다.
나는 멀뚱히 눈을 뜬 채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완연한 가을의 풍경이 정겹게 다가와 있었다.
갈치만 잘 잡으면 만사형통인데…….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장진혁 피디의 뒤통수가 보였다.
촬영 날짜에 임박하여 어쩔 수 없이 나를 대타로 정했지만, 그는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시청률을 걱정하는 피디의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부터 거절했다면 모를까, 대충 번트만 대고 사라지는 대타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다.
나를 소개하고 지지해 준 백정철과 황선태를 생각해서라도 용감한 어부의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 주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잡아 볼까? 갈치 낚시는 체력전이라 하던데.
1대 3으로 싸운다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갈치를 잡아 올린다면, 나는 승부와 상관없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다.
이덕호와 이몽규.
이들이 준프로나 다름없는 상대 팀을 누를 것이라 기대하는 시청자는 드물 것이다. 우리가 짜릿한 승리를 거머쥐는 드라마를 선보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반전이 아닐까.
어차피 팀 대항전.
반전의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역할이 필요하다. 우리 팀 모두가 최선의 낚시를 펼칠 수 있도록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
“벌써 다 왔나?”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차가 식당 앞에 멈추자 이몽규가 부스스한 눈을 떴다.
장 피디가 사람들에게 외쳤다.
“여기서 점심 식사하고 갑니다. 다들 내리세요.”
평범한 시락국 식당이었다.
이몽규가 특유의 입담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방송국 사정이 안 좋나? 통영에 오면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
“호호. 시락국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여전히 이몽규의 푸념을 받아 주는 사람은 사심희밖에 없다. 그녀는 연예인들 틈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척 들떠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최종적으로 도착한 목적지는 통영의 삼덕항.
노심초사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선장이 우리 차를 보자마자 단숨에 달려 나왔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H호의 김 선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갈치 반 물 반! 아시죠? 데려다주기만 하면 내 싹 쓸어 담을 거요. 어흠!”
승선하던 도중에 마지막에 탄 이몽규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였다.
인상이 좋은 선장은 그의 썰렁한 농담에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배 안을 둘러본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낚시하는 사람은 여섯 명인데, 카메라맨을 포함한 지원 인력이 너무 많아 선수 갑판은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한동안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다가, 나와 사심희는 조용히 선실로 향했다.
선실 안에서도 이몽규의 입은 쉬지 않았다.
“어이, 태권이. 어차피 완장은 우리 거야. 선상 호텔에서 하룻밤 잠이나 푹 주무시는 게 좋을걸. 자는 게 남는 거라고.”
“뭔 또 썰렁한 말씀이세요.”
“두고 봐. 원래 신참이 들어오면 사고를 치는 법이거든. 안 그런가? 강 프로.”
또, 또…….
할 말이 없어 나는 슬쩍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가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았더니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그로부터 네 시간 뒤.
배가 멈추자 사무장은 풍닻을 내리느라 분주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고 있었다.
적당한 너울이 있어 배는 꼴랑거렸고, 노을 진 하늘에는 일찍 나온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갈치 낚시에는 최적의 날씨와 조건.
갑자기 출연진과 스태프들이 분주해졌다.
세 명씩 팀을 이룬 출연진들이 배의 좌현과 우현으로 나눠서 자리를 잡았고, 사심희는 작은 카메라를 들고 내 옆을 지켰다.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걱정 마세요. 그나저나 내가 가르쳐준 대로 미끼 손질은 연습한 거 맞죠?”
“그럼. 냉동 꽁치를 두 상자나 해치웠어. 당분간 베타랑 꽁치만 먹게 생겼다고.”
다른 사람들이 채비를 정돈하느라 분주한 사이, 나는 조용히 물속으로 휘파람을 불어 넣어 보았다.
아직 집어등도 켜기 전인 초저녁.
바닷속에는 벌써부터 몇 마리의 은빛 칼날들이 고개를 빳빳이 쳐든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