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대타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죠.”
내게 자리를 권한 사람은 유일하게 낯이 익지 않은 사내였다.
그는 왼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몽규의 맞은 편을 가리켰다.
“갑자기 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장진혁 피디라고 합니다. 용감한 어부 연출을 맡고 있습니다.”
“……아. 예.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양이는 내놓으셔도 괜찮습니다. 가방에만 있으면 갑갑할 테니까요.”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다소 사무적인 말투의 사내였다.
그의 말대로 베타를 가방에서 꺼냈더니, 녀석이 낯선 환경을 알았는지 몸을 도사렸다.
“정말 예쁜 고양이로구나. 이리 와 봐라.”
이덕호가 인자한 미소를 보이자 베타는 오히려 뒷걸음질을 쳤다. 평소에도 나와 사심희가 아니면 낯을 가리는 녀석이다. 그런데 너무나 의외였다.
쪼르르.
베타가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기라고 한 것처럼 누군가의 무릎 위에 엉덩이를 붙이는 게 아닌가.
“역시! 동물도 사람을 알아본단 말이지. 덕호 형님보다 내가 실세라는 걸 단박 알아차린 거야고. 참 똑똑한 고양이네. 크하하.”
이몽규는 자신에게 천사 미소를 보내는 베타를 내려다보며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신기한 듯 기웃거리며 베타에게 호감을 보였다.
때로는 반려동물 한 마리가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곤 한다. 오늘의 베타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베타를 타일렀다.
“베타야. 이제 그만 이리로 와라.”
“이름이 베타입니까? 괜찮아요. 이렇게 나를 좋아라 하잖아요.”
베타는 내가 불러도 들은 체 만 체, 이몽규의 무릎에 앉아 딴청을 피웠다. 참 이상하다. 이몽규에게서 친숙한 동물의 냄새라도 맡은 건가.
숨을 돌리고 주변의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려던 참이었다. 나는 자세를 고치고 누군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평소에 TV에서 잘 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이고, 저도 이런 자리에서 훌륭한 후배님을 만나게 되네요. 편하게 하세요. 그냥.”
깍듯한 내 인사에 오히려 손사래를 치는 사람은 낚시의 명인이라 불리는 백정철 프로였다.
“자아, 인사는 천천히 나누시고, 이것도 인연인데 다들 건배나 합시다.”
“좋습니다!”
용감한 어부의 맏형 격인 이덕호의 제안에 다들 잔이 높이 들었다. 이덕호가 직접 건배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우리 새로 인연을 맺게 된 강유록 프로의 활약을 위하여!”
“위하여!”
하아. 나보고 프로라니…….
처음 듣게 된 호칭에 얼떨떨했다. 날아드는 술잔에 일일이 화답하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백정철이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앞으로 강 프로라고 부르겠네. 멋진 후배가 있다고 해서 방송 잘 보고 있었어. 그 아까운 실력을 여태 썩여 두었다니. 아무튼 반갑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 정식 프로 조사도 아니고…….”
백정철 프로는 오랜 후배를 대하듯 어느새 말을 놓고 있었다. ‘프로’ 호칭이 영 어색해서 손사래를 치려 하자, 그가 말허리를 끊었다.
“한국 프로 조사 협회에 가입했다고 다 프로는 아니지. 자네처럼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낚시꾼이 어디 흔한가? 자네야말로 프로라고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무슨. 낚시는 아직 좀 어설퍼 보이지만 묘하게도 잘 잡더군. 이번에 우리 방송에서도 좋은 모습 보여 주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자네 덕분에 마음 놓고 땡땡이를 칠 수 있어서 말이야.”
백정철은 그렇게 말하면서 장 피디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듯했다. 아무래도 갑자기 펑크를 내게 되어 영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장 피디는 무표정하게 남은 술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멀리 앉아 있던 말끔한 용모의 사내가 내게 불쑥 잔을 내밀었다.
“저, 아시죠? 이태권입니다.”
“알다마다요. 아침 드라마에서 즐겨 보고 있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탤런트 이태권과 술잔을 부딪치자마자 이번에는 개그맨 김진성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헤헤.”
“먹방의 달인을 여기서 뵈니까 얼떨떨하네요.”
다음은 용감한 어부에서 막내 역할을 맡고 있는 전직 아이돌 가수 고중식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히죽거렸다.
“스물아홉이라면서요? 제가 한 살 더 많아요. 하루만이라도 막내 탈출을 시켜 주셔서 진짜로 환영합니다. 하하.”
“그렇게 되나요? 그날은 제가 톡톡히 막내 역할을 맡겠습니다.”
출연진들과의 인사는 그렇게 온화한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그러자 장 피디가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 촬영에서 어떤 낚시를 하는지 아직 모르시죠?”
“네. 사실은 오는 내내 궁금했습니다.”
“통영에서 출발 예정입니다. 대상어는 갈치고요. 야간 선상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으음. 갈치라니…….
조만간 출조 계획은 있었지만, 아직은 경험하지 못한 어종이다. 장 피디가 말꼬리를 흐리는 내 생각을 읽은 모양이다.
“갈치 낚시는 해 보신 거 맞죠?”
“사실은 아직…….”
거짓말로 둘러대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결격 사유라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장 피디의 얼굴에 한 줄기 우려의 빛이 스쳤다.
“약간 당황스럽네요. 이왕이면 능숙한 분이 오셔서 다른 사람들도 챙겨 주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
괜히 나가서 남의 방송에 폐를 끼치는 건 아닐까. 이제라도 그만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 또한 난처해하던 순간, 백정철이 끼어들었다.
“방송 보니까 야간 한치 낚시도 곧잘 하던데? 저 친구 방송 보니까 첫 도전에서도 무리 없이 해내더군. 장 피디가 낚시를 잘 몰라서 그래. 너무 걱정 말라고.”
“백 프로님이 후배라고 너무 챙기시네요. 오해는 마세요. 저야 방송의 결과물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라…….”
백정철이 적극적으로 두둔하고 나서는 바람에 스스로 발을 빼기도 애매해졌다.
장 피디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인지도 높은 백정철 대신에 듣보잡에 불과한 신인 낚시꾼을 투입해야 하는 그로서는 미심쩍어하는 게 당연하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을 뒤로하고 장 피디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습니다. 다들 좋게 말씀하시니 한번 믿어 보죠.”
“…….”
“아! 그리고 이번에는 좀 색다르게 구성을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용감한 어부는 보고 계시죠?”
“미안하지만 최근에는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솔직한 대답이었다.
처음에는 무척 재미있었는데, 점점 시들해진 이유가 있었다. 이몽규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의 방송용 멘트가 지나치게 소란스러워 흥미를 잃은 게 사실이다.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번에는 세 명씩 팀이 되어서 팀 대항전으로 치를 계획입니다.”
“아…… 그거 재미있겠네요.”
내가 알기론 용감한 어부는 최고 성적을 낸 출연자에게 완장을 채워 주고 다음 출조와 관련한 약간의 어드밴티지를 주는 구성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체전이라…….
어차피 한 번만 출연하는 땜빵 요원. 갈치 낚시도 처음이지만 완장 욕심도 없다. 차라리 잘됐다. 출연진들과 어울려 한판 웃고 즐기는 낚시에는 단체전이 오히려 부담이 없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 관심은 즉각적으로 누가 나와 한 팀이 될지에 쏠렸다.
때마침 장 피디가 내게 물었다.
“혹시 같이 한 팀으로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정해 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사실은 오기 전에 미리 팀을 짜 놓긴 했습니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덕호와 이몽규가 내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나와 같은 팀이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장 피디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색을 했다.
“눈치채셨군요. 아무래도 젊은 피가 들어왔으니, 노익장을 잘 서포트하시라는 차원에서 그렇게 짜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다시 짜야 되겠네요.”
“저는 좋습니다만…….”
“즐거운 낚시가 되어야겠지만, 승부 자체도 짜릿해야 시청률이 잘 나오는 법이죠. 사실은 갈치 낚시 경험이 많은 분으로 예상했던 건데…….”
장 피디가 은근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실력이 출중한 사람이 올 줄 알고 비교적 약체인 두 사람과 짝을 지으려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장 피디의 말을 듣고 있던 이몽규가 발끈하고 나섰다.
“장 피디! 왠지 우리 둘을 무시하는 거 같네?”
“아유.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럼 그냥 처음에 정한 대로 해. 나는 젊은 친구가 좋거든. 동물을 사랑할 줄 아는 젊은이면 더욱 좋고.”
“……그럼. 그렇게 하시죠.”
사실 나는 누구와 한편이 되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냥 정해지는 대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뿐.
우여곡절 끝에 단체전을 치를 팀이 결정되자, 이몽규가 장난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강 프로. 노땅들과 한편이 되었다고 실망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습니까? 너무 좋습니다. 하하.”
“그렇지? 내 어차피 승부는 결정 났어. 덕호 형님이야 늘 꽝이지만 내 어복에 자네 실력이면 게임 끝이지. 안 그래요, 형님?”
이몽규의 너스레에 이덕호는 헛웃음을 지으며 응수했다.
“허어. 이 사람. 내가 무슨 꽝조사야? 지난주에도 세 마리나 잡았는데.”
“내 말이 그거 아니요. 꼴찌였잖아요. 하하하.”
“자네와 공동 꼴찌였지. 아마?”
은근히 어깨가 무거워지는 대목이었다.
최약체로 분류되는 두 분을 모시고 승부를 펼쳐야 한다. 더구나 상대편의 이태권은 웬만한 프로 조사 뺨치는 실력자이고, 아이돌 출신 고중식 또한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인물이 아닌가.
장 피디의 일 얘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자아, 그럼 팀은 정해진 것 같고. 다른 조건을 얘기해 보죠.”
“다른 조건이라뇨?”
“유튜버로 활동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아. 네.”
무슨 얘긴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때 백정철 프로가 지긋이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가 장 피디에게 얘기에 두었어. 자네 방송에 지장이 없게끔 말이야.”
“그, 그럼.”
짐짓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장준혁 피디가 대신 설명을 해 주었다. 여전히 사무적인 말투였다.
“콜라보까지는 아니지만, 따로 촬영을 하는 건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단, 우리 방송이 나가기 전에는 공개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이었다.
“강유록 프로님이 잡은 고기 또한 나눔을 하셔도 좋습니다. 사실 저는 유튜브를 보지 않았습니다만, 백 프로님이 워낙 그렇게 하자고 하시니.”
“……감사합니다.”
일이 잘 풀려도 이렇게 잘 풀릴 수 있을까?
낚시로는 최고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것도 감지덕지인데.
멀리서 웃고만 있는 백정철 프로에게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장 피디는 헛기침을 하며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개인 촬영을 담당하실 분은 한 명만 승선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가급적이면 저희 카메라에는 비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장 피디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소정의 출연료가 있습니다. 여기서 좀 곤란하니까 나중에 따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큰 금액은 아니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고요.”
“……감사합니다.”
출연료는 미처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액수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마침 어반자스토어 투자 건으로 마이너스의 시기다. 얼마가 되었든 내게는 가뭄의 단비나 다름없다.
장 피디의 속사포 같은 말 잔치가 끝나고, 나는 백정철에게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고마운 분.
낚시라는 연결 고리만 있을 뿐,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분인데. 나는 그에게서 돌려받은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근데 베타라고 했나? 이 고양이가 아까부터 소고기에 눈독을 들이는 것 같네?”
그렇지 않아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까부터 이몽규의 무릎을 딛고 일어선 베타가 밥상 위로 고개를 빼 들고 있었다.
손님으로 온 처지에 비싼 고기를 마음대로 던져 줄 수도 없고.
“너 소고기 좋아하냐? 옜다! 함 먹어 봐라.”
이몽규가 개인 접시에 놓인 식은 고기 조각을 던져 주자 베타가 와라락 달려들었다.
“정말 잘 먹네? 이 녀석 봐라? 하나 더?”
“야~~~~~ 웅!”
그동안 생선에 맛을 들였지만 아직 어릴 때 즐겨 먹던 소고기 맛을 잊지 못한 모양이다.
내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을까?
이어진 이몽규의 뼈 있는 농담에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베타야! 소고기 많이 묵고 네 아빠에게 전해라. 이번에 갈치 많이 잡아서 우리가 완장 차게 해 달라고. 내가 요즘 고기를 못 잡아서 피디 눈치가 좀 보이거든. 알았지?”
곁에 있던 이덕호도 한마디 거들었다.
얼핏 들으면 나를 두둔하는 것 같지만, 역시 같은 얘기였다.
“자네는 왜 그런 말로 부담을 주나? 허허 참. 하긴 나도 완장을 차 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네.”
하아. 부담 팍팍!
대타로 출연하는 갈치 초보에게 너무 무리한 기대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