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그림
9월, 가을의 문턱이라고는 하지만 정오의 햇살은 아직 뜨거웠다.
“준서야. 점심 먹고 또 하자.”
“안 그래도 배가 고팠어요.”
“이건 간식이야. 진짜 점심 식사는 주꾸미로 더 맛있는 거 해 줄게.”
사심희가 집에서 가져온 보냉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배고픔도 잊고 낚시를 즐기던 준서는 순식간에 식사를 해치웠다.
“몇 마리나 잡았는지 볼까?”
나는 샌드위치를 들고 준서의 아이스박스를 기울여 보았다. 오전 동안 아이가 쉬지 않고 잡은 주꾸미는 대략 50마리 정도.
간혹 씨알이 굵은 놈들도 눈에 띄었다.
“대단한데? 처음인데 벌써 이 정도라니.”
칭찬할 만한 조과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먹기에는 빈약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마지막 빵 조각을 털어 넣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입 안 가득 바람을 머금은 채로.
이왕이면 준서가 두 손 가득 주꾸미를 들고 개선장군처럼 돌아가기를 원했다.
오전 내내 아쉬웠던 것은 그리 개체수가 많지 않은 포인트였다.
한번 이동해 볼까?
멀리 아침에 배들이 모여 있던 장소는 어느새 한산해 보였다. 하지만 그곳은 아니다. 이미 수많은 배들이 훑고 지나간 터라 이삭줍기 수준에 불과할 테니까.
그때 반대쪽으로 휙 달려가는 낚싯배가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작년에 승선해서 크게 재미를 보았던 오천항의 S호였다.
“사시미 님! 준서야! 꽉 잡아.”
모를 때는 베테랑 선장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방법이다.
“갑자기 쾌속정 놀이인가요? 호홋.”
“신나게 달려요. 삼촌! 추격전 같아요.”
그래 추격전이다.
주꾸미를 찾아 어디든 못 달려가겠는가.
나는 보트의 속력을 높여 S호가 남긴 긴 궤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무창포항 근처의 작은 식당.
“우와! 너무 맛있어요. 초장도 맛이 달라요.”
“두 사람은 맛있게 먹기만 해요.”
사심희는 눈을 찡긋하며 깨끗이 펄 물을 제거한 주꾸미를 냄비에 풍덩 빠뜨렸다. 오늘의 먹방 요리는 주꾸미 샤부샤부.
“아침에 짐이 묵직해서 난 또 뭔가 했네. 이렇게 준비해 왔을 줄이야.”
“우리 준서를 위해 특별히 준비했지요.”
그녀는 직접 멸치를 우린 육수를 보냉 가방에 담아 왔다. 샤부샤부에 넣을 각종 채소 또한 종류별로 먹기 좋게 손질된 상태였다. 심지어 마법의 특제 초장까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리 연락해 두었다며 그녀가 앞장선 곳은 주차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이었다. 물론 자리를 사용하는 비용은 별도로 지불했다.
“삼촌! 이렇게 많이 먹어도 되나요?”
“그럼. 충분하니까 맘껏 먹어라.”
“집에 가서 또 먹어야 하잖아요. 아이들이 정말 놀랄 거예요. 히힛.”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주꾸미 낚시는 숙련된 성인 기준으로 300마리 안팎의 조과를 선사했다.
그러나 점점 자원이 고갈되어 이제는 200마리만 잡아도 장원을 차지하곤 한다.
결과적으로 준서는 총 120여 마리를 잡았다.
마지막 포인트에서 받아 낸 폭발적인 입질 덕분에 이뤄 낸 쾌거였다.
나는 거의 300마리에 육박하는 조과를 올렸다.
S호를 따라 마지막으로 옮겨 간 포인트 덕분이었다.
약간 거짓말을 보탠다면 그곳은 주꾸미 위에 주꾸미가 올라타고 있을 정도로 온통 주꾸미 천지였다.
식당으로 오기 전에 30마리씩 소분한 나눔 택배를 여러 군데 발송하고, 나와 사심희 몫으로, 그리고 멤버들과 술안주로 먹을 용도로 각각 한 봉지씩 챙겨 넣었다.
뜨거운 육수 안에서 보랏빛으로 변한 주꾸미를 마구마구 먹어 치우는 준서. 사심희가 엄마 미소를 지으며 그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준서야. 그런데 그 작은 주꾸미에서 정말로 손맛을 느낀 거니? 난 구경만 했지만 잘 모르겠던데.”
“작아도 손맛이 장난 아니던데요?”
“그래? 어떤 손맛인데?”
“처음엔 그냥 약간 무거워졌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다리를 쫙 펴고 올라오는 것 같더라고요. 특히 왕주꾸미는 확실히 느껴졌어요.”
상상력이 뛰어난 아이다.
설명해 주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으로 주꾸미의 움직임을 그려 본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낚시에 비범한 재능을 가진 아이임에 틀림없다.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상경길에 올랐다.
주말인지라 여지없이 서해 대교 부근에서 정체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고된 낚시에 까무룩 잠이 들었던 준서가 눈을 비비적거리며 깨어났다.
“근데 정말로 삼촌이랑 이모랑 사귀는 사이 아니에요?”
무슨 꿈이라도 꾸었을까?
아침에도 똑같은 질문으로 나를 당황시키더니.
잠꼬대 같은 아이의 말에 나는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아니라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건 또 왜 물어?”
“너무 친해 보여서요. 서로 어울려 보이기도 하고.”
사심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끼어들었다.
“어떻게 어울리는데?”
“미녀와 야수 같아요. 두 분이. 헤헤.”
“미녀와 야수?”
“네. 이모는 너무 예쁘고, 삼촌은 키도 크고 얼굴이 새카맣고…….”
사심희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나도 멋쩍게 따라 웃었다. 낚시 다니느라 햇볕에 그을려서 그런 건데.
하긴 어릴 때부터 하얀 피부는 아니었지만. 여하튼 참 당돌한 녀석이로세.
사심희의 반응에 고무된 준서가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이모는 어떤 남자가 좋아요?”
“이상형을 묻는 거니?”
“맞아요. 너무 궁금해요.”
나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정면의 정체된 도로를 살피는 시늉을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귀가 쫑긋거렸다.
“음……. 일단 키는 좀 아담한 편이 좋아. 내가 별로 크지 않으니까.”
“의외네요. 또요?”
“그리고 손은 가늘고 예술 하는 사람처럼 섬세하면 좋겠고.”
나는 슬그머니 운전대를 내려다보았다.
개구리처럼 마디가 우락부락하고 투박한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럼 예술가를 좋아하시는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밖이 아니라 실내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괜찮지. 말하자면 평범한 사무직 회사원?”
혹시 들으라고 하는 말인가?
전부 다 나와는 정반대잖아.
갑자기 차의 속도가 빨라지자 뒷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갑자기 웬 급가속을…….”
“정체가 풀렸잖아.”
평택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시각이었다. 보육원 입구에 서서 꾸물거리는 준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만히 그를 꼬옥 안아 주었다.
“또 보자.”
“정말이죠?”
“그럼. 다음에 또 좋은 곳에 데려다주마.”
“알았어요. 그럼.”
준서의 눈망울에 그렁그렁 이슬이 맺혀 있었다.
어리지만 내면이 강한 아이였다. 사심희와도 인사를 나누면서도 아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보통의 아이라면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럼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원장님께는 그냥 갔다고 인사나 전해 드려라.”
“네.”
뒤돌아서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가까스로 몸을 돌려 차로 향하던 도중 아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삼촌! 오늘 너무너무 행복한 날이었어요. 고마워요.”
나는 몸을 홱 돌려 준서에게 손을 흔들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뜨거운 물기가 차올랐다.
“지금 설마 우는 거예요?”
“아냐……. 낮에 선크림을 너무 많이 발라서 그런가 봐. 땀이 나니까 눈에 들어가서…….”
말도 안 되는 핑계지만 사심희는 모른 척해 주었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 나는 결심했다.
내가 만난 최고의 낚시 영재. 내가 그의 진짜 삼촌이 되어 주겠노라고.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든든한 조력자가 되겠노라고.
* * *
다음 날 저녁.
나는 오랜만에 아지트에서 멤버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만사 제쳐 놓고 달려온 장재준 영감이 잔을 높이 들었다.
“우리 구피 님과 어반자스토어의 번창을 위하여!”
“위하여!”
어반자스토어 개업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개업식을 별도로 하지 않기로 했다는 고동우의 말에 우리 멤버들끼리 조촐한 축하 자리를 만든 것이다.
“구피 님! 만반의 준비는 다 됐습니까? 아까 보니까 매장이 반쯤 비어 있던데요.”
“천천히 채워 나가야죠. 캡틴 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가게가 낡아서 그렇지 규모는 꽤 크지 않습니까?”
“멀티싱커 매대가 제일 번쩍거리더군요. 허허.”
“우리 도라에몽 님 덕분이죠. 재고가 달린다면서도 꽉 채워 주었으니.”
고동우는 그동안 가게 오픈을 준비하느라 그렇지 않아도 홀쭉했던 역삼각형 얼굴이 더 야위어 보였다. 반은 기대감이, 나머지 반은 걱정이 교차하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내일 손님들이 많이 올지 걱정이에요.”
“잘될 겁니다. 우럭 님이 어제 방송에다 가게 홍보까지 해 놓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몰리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졌다. 전날 밤 나는 주꾸미 낚시 편에 멀티싱커 신제품의 홍보와 더불어 오프라인으로 구입할 수 있는 직영 매장의 오픈 소식을 자막으로 알려 놓았다.
주꾸미볶음을 먹느라 정신이 없던 보람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멀티싱커 주문량이 늘어 난리가 났어요. 안 그래도 내일부터 저도 한동안 놀러 오지 못할 것 같아요.”
“오호! 신제품 주문이 쇄도하는 모양이군요. 허허.”
“특히 멀티싱커 믹스를 찾는 사람이 장난 아니게 많아요.”
보람이의 즐거운 비명에 고동우는 몹시 부러워하는 얼굴로 입을 떼었다.
“도라에몽 님은 공장도 인수한다면서?”
“무슨 인수는요. 그냥 쓸 만한 설비만 골라서 중고로 넘겨받기로 했어요.”
“직원들은?”
“우선 예전에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게 연락하고 있어요. 다행히 몇 분이 함께 일하기로 약속했고요.”
“부럽다. 나도 잘돼서 직원도 두고 그랬으면 좋겠다.”
보람이는 이제 거의 어엿한 사업체의 사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조바심을 내고 있는 듯한 고동우에게 내가 술을 한 잔 따라 주었다.
“구피 님도 잘되실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야지. 피 같은 네 돈까지 들어갔는데……. 게다가 가게 홍보까지 나서서 해 줬고…….”
“그야 당연하죠. 우리 어반자 그룹의 계열사인데요.”
“하하. 어반자 그룹이라. 누가 들으면 재벌 그룹인 줄 알겠다.”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있을 때 장재준 영감이 정색을 했다.
“재벌 그룹까지는 모르겠지만 낚시 업계에서는 최고의 그룹이 될 수도 있습니다. 허허.”
“아이고, 그런 말씀 마세요. 그냥 우리 모두가 행복하면 그만입니다.”
내가 손사래를 치자, 고동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근데 어제 그 꼬맹이 누구냐? 정말 우럭 님 조카야?”
“아녜요. 전에 그 한치 잡았을 때…….”
“어째 그런 것 같더라. 장난이 아니던데? 배도 처음 탔다는 꼬맹이가 나보다 더 잘하더라니까. 댓글도 온통 그 꼬맹이 얘기로 도배가 되었더만.”
“낚시 영재예요. 제가 한번 키워 보려고요.”
“어떻게 키우려고?”
“슬슬 궁리해 봐야죠.”
멤버들에게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름의 기본적인 계획은 세워 두었다. 일단은 준서에게 더 많은 낚시의 기회를 열어 주기로 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장재준 영감이 불쑥 물었다.
“그 아이 언제 나도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그런데 무슨 일로…….”
“그냥 기특해 보여서요. 요즘에 세상에 장래 희망이 낚시꾼이 되겠다는 아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그렇긴 하죠. 다음에 만날 때 같이 가시죠.”
아침에 나는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준서를 후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솔직히 어떤 후원이 필요할지 아직은 충분한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냥 준서가 차근히 낚시를 배울 수 있도록 당장에 시급한 것부터 해 주기로 했다.
우선 낚시 관련 방송이나 정보 검색이 용이하도록 스마트폰을 개통해서 보내 주기로 했다. 준서에게 필요한 낚시 관련 도서와 장비는 원하는 만큼 제공하겠다는 의사도 전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준서에게 가급적 많은 낚시 경험을 쌓게 해 주는 일.
원장은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해졌다면서 낚시를 가게 되면 꼭 준서와 동행하겠노라 말했고, 나 또한 아이와 동반 출조가 가능한 낚시에는 꼭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다.
“아차! 하마터면 이걸 그냥 두고 갈 뻔했네요. 허허.”
술자리가 파할 무렵이었다.
장재준 영감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두루마리처럼 돌돌 말린 형태로 보아 처음에는 달력인 줄 알았다.
“그래도 개업식인데 작은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진품은 아니고 복사본인데 가게에 걸어 놓으면 괜찮을 겁니다.”
“아이고, 캡틴 님도 뭘 이런 걸…….”
족자를 펴 든 고동우가 감탄을 내뱉으며 기뻐했다.
“캬아! 그림 참 좋다. 이거는 가게보다 여기에 걸어 두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 아지트 분위기도 살릴 겸. 너무 고맙습니다. 캡틴 님.”
나도 힐끗 봤더니 동양화였다.
누런 배경에 보름달이 얼핏 보이고, 산등성이 같은 게 그려진 산수화. 그다지 큰 감흥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고동우가 당장 걸어 놓겠다며 그림을 들고 수선을 떨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림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좋겠네요. 들어오자마자 딱 보이고.”
자리로 돌아온 뒤에도 고동우는 내 등 뒤에 걸어 놓은 그림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장재준 영감도 흐뭇하게 웃으며 그림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젊었을 때부터 좋아하던 그림입니다. 누구한테 들었는데 저 그림 속에 있는 낚시꾼에게 얽힌 전설이 있다고 합디다. 아무리 깊은 물 속이라도 훤히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다나, 어쨌다나.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이지만 말입니다. 허허.”
하마터면 마시던 소주를 그대로 내뿜을 뻔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온 한 줄기 바람에 그림이 흔들리고 있었다.
본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현진필 산수도’를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홈페이지)(http://www.museum.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