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약속
느긋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지만 나는 침대에 누워 베타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녀석은 내 옆에서 꾹꾹이를 즐기고 있었다.
“배고프냐? 밥 먹을래?”
“야~~~ 웅!”
대답도 참 잘한다.
베타는 얼굴을 들이밀고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짝 웃었다. 설마 ‘밥’이라는 단어를 알아듣는 것은 아니겠지.
끄응.
냉장고로 가 보니 작은 죽방 멸치 상자가 놓여 있다. 남해에서 제대로 입맛을 들인 이후로 베타는 멸치 가루를 뿌린 사료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그나마 다행이다.
돈이 있을 때 사 둔 탓에 상자 안에는 대략 한 달분의 멸치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베타에게 죽방 멸치로 토핑한 브런치를 내주니 허겁지겁 잘도 먹는다. 나도 냉동실에서 얼린 식빵을 꺼내 토스트를 해 먹었다.
구피 님은 잘하고 계시나?
계란프라이를 두 개나 넣은 토스트를 우걱거리며 고동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벌써 공사 중입니까?”
“그럼! 어항들 전부 치우고 지금 내부 청소 중이다.”
수족관에는 공사가 한창 중이었다.
고동우는 지체 없이 새로운 장사 준비에 돌입했다. 소음 때문에 며칠간 아지트는 개점 휴업 상태였다.
“2층과 연결된 벨이나 어서 떼어 버리세요.”
“당연하지. 이제 내 얼굴 보려면 아래층으로 내려와야 할 거다. 크하하.”
희망에 부풀어 들뜬 목소리였다.
통화를 마치고 마지막 빵 조각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휴대폰의 유튜브 앱을 클릭했다.
―문어 다리짝 하나로 온 가족이 영양 보충 했어요. 어반자TV 최곱니다. ㅋ.
―가입하자마자 이런 횡재가. 구독하길 잘했네요.
―다음엔 어떤 이벤트죠? 이번에도 선착순으로 하실 건가요?
수많은 댓글들 사이에서 대왕문어를 받은 분들의 감사글이 눈에 띄었다. 나눔 낚시를 표방한 이후로 대상자로 선정된 사람들은 꼬박꼬박 증거(?)를 남겨 내게 벅찬 감동을 안겨 주었다.
오늘이 몇 일이지?
아침을 겸한 점심 식사를 때우고 나는 벽에 걸린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넘길 때가 지나 버린 달력은 8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달력 앞으로 다가가 한 장을 휘리릭 넘겼다.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가고 가을을 여는 9월의 시작이었다.
작년 이맘때 나는 뭘 하고 있었더라?
여름 휴가철이 마무리되고 연례행사처럼 묵직한 일거리가 떨어졌었다. 팀원들 대부분이 시름시름 환자 모드로 바뀌던 시기였다.
차년도 경영 계획 수립이었지.
지나고 보면 참 특이한 회사였다. 다음 연도의 계획이라면 연말에 세우면 될 텐데, 9월 시작부터부터 전사를 달달 볶아 10월에 마치는 일정이었다.
우리 팀은 해외 법인의 경영 계획을 점검하는 부서였다.
가이드 라인을 배포해서 초안을 수령하고, 마른 수건까지 짜내면서 타이트한 재무 계획을 유도하고, 필요하면 현지까지 날아가서 또 닦달하는 역할이었다.
그렇게 무리하게 쥐어짠 계획을 엑셀로 정리해서 단계별로 보고하면, 상사들은 내게 강단이 없다며 질책하기 일쑤였다. 더 쥐어짜라는 의미였다.
기한에 임박하여 그럭저럭 현실성 없는 계획을 최종 보고하는 것으로 끝나면 얼마나 좋겠는가.
최고위층에 올라가 뭐라고 한마디 툭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다시 원점이다. 수정하고 또 보완하고…….
작년의 가을은 나에게 그렇게 잔인한 계절로 각인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 그려진 쓴웃음을 지우며 나는 과거의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금 달력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가을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나의 새로운 가을은 설레는 계절로 불쑥 다가와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물고기들을 머릿속에 그리다 보니, 가슴 언저리에 머무르던 먹구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부터 잡아 볼까?
갈치를 잡아 베타와 구이를 먹어 볼까?
대구로 시원한 지리탕도 맛보고 싶다.
가을철 광어나 우럭은 어떨까? 살덩이에서 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단물이 흘러나올 거다.
아아, 그렇지! 이런 멍청이!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 나는 손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불과 두어 달 전의 일인데 그걸 잊고 있었다니.
김준서.
한치 박스를 건네주며 조만간 바다에 데려다주겠다던 약속했던 그 어린이……. 열 살이라고 했던가?
바쁜 일상 속에서 깜빡하고 있었던 나를 자책했다.
그때 나는 머릿속으로 9월을 떠올리고 있었다.
금어기가 끝나고 시작되는 9월의 주꾸미 낚시.
생활 낚시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주꾸미를 택한 것은 어린이도 무난하게 체험할 수 있는 안전한 낚시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꾸미는 노련한 경험자를 기준으로 너끈히 2백 마리를 넘길 수 있고, 처음 온 초심자도 수십 마리는 잡을 수 있는 어종이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재미를 충분히 볼 수 있는 낚시다.
쇠뿔도 단김에 빼기로 했다.
나는 인터넷을 뒤적거려 평택의 성곡 아동복지센터를 검색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연세가 지긋한 노인이 전화를 받았다.
“실례지만 원장님과 통화하고 싶습니다.”
“제가 원장이오만.”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강유록이라고 합니다.”
“강유록? 실례지만 누구신지…….”
제대로 번지수는 찾았지만 원장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한 번도 본명을 밝힌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나 자신도 내 이름이 뭔지 가물가물할 때가 많아졌다.
“우럭이라고 합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아아! 우럭 선생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제가 전화를 드려야 하는데, 이거 참…….”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염려해 주신 덕분에 이제 조금씩 거동은 하고 있습니다.”
예의를 갖춘 뒤에 나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김준서 학생과 통화하고 싶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이런. 개학을 해서 지금은 학교에 있습니다. 직접 전화를 받았으면 좋아했을 텐데. 제가 전할 말이라도 있을까요?”
아차차!
낚시만 하고 다녔더니 개학을 했는지도, 휴일이 아닌지도 개념을 상실했다.
나는 원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통화를 마쳤다.
준서를 데리고 낚시를 가고 싶다는 말에 원장은 크게 기뻐했다. 안 그래도 아이가 언제 전화가 올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과 함께.
준서와의 주꾸미 낚시는 그렇게 돌아오는 토요일로 정해졌다.
장차 낚시꾼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멋진 경험을 선물해 주리라.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인터넷으로 낚싯배 물색에 돌입했다.
* * *
토요일.
이른 새벽임에도 준서는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걱정이 되었는지 원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함께 서 있었다.
“우럭 선생님? 얼굴은 처음 뵙는군요. 아이고, 바쁘실 텐데 우리 아이까지…….”
“박영규 원장님이시군요. 허락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안전하게 잘 다녀오겠습니다. 저녁 먹기 전에는 귀가시킬 겁니다.”
준서는 나를 보자마자 말없이 웃었다. 그때만 해도 수줍음이 많은 어린애인 줄로만 알았다.
차에 올라 목적지인 내비게이션에 충남 무창포항을 입력하자마자 뜬금없는 아이의 질문이 튀어나왔다.
“헤헤헤. 근데 두 분은 서로 어떤 사이예요? 애인인가요?”
할 말을 잊었다.
당황한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사심희가 깔깔거렸다.
“우리 준서가 그런 것도 아는구나? 아니야. 나는 그냥 우럭 님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이란다. 사시미 누나라고 부르면 돼.”
내가 할 말을 대신해 준 것은 고맙지만,
그렇게 단호박일 것까지는…….
준서는 붙임성이 많은 아이였다.
“하아. 사시미…….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헤헤. 저는 준서라고 해요. 김준서. 올해 열 살이고요.”
“그래. 낚시를 좋아한다고?”
“네. 제 장래 목표가 낚시꾼이에요. 우럭 아저씨처럼요.”
“그럼 유튜버가 되겠다는 거야?”
“아뇨. 저는 세계 대회에 나가 금메달을 따고 싶어요.”
“금메달이라면 1등이 되겠다는 거구나?”
“그럼요. 상금을 타서 우리 형아들과 동생들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원장님께도 좀 드리고. 헤헤.”
쫑알쫑알.
뒷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가 죽이 척척 맞는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준서에 대해 많은 간접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어반자TV는 어떻게 알게 되었어?”
“우리 보육원에 컴퓨터가 세 대만 있거든요. 형아들이 주로 써서 제게는 순서가 잘 안 들어오지만요. 다들 게임만 하는데 저는 낚시 대회 영상을 주로 봐요. 그러다가 어느 날 자동으로 이상한 제목이 뜨길래 눌러 봤죠.”
“그랬더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우럭 님이 대회 나가서 2등 하는 장면이었어요. 그리고 귀여운 고양이도 나오고. 헤헷.”
“어째 고양이 때문에 좋아하게 된 거 같다. 오늘 같이 오지 못했는데.”
“아녜요. 저는 우럭 님 팬이에요. 정말로요.”
나도 모르게 어깨가 쓱 올라간다.
준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스스럼없이 ‘우리 보육원’이라고 불렀다. 어쩐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그 순간 나는 주꾸미 출조 예고편에서 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번 출조의 특별 게스트가 있다고 알리는 장면이었다.
‘이번에는 저의 어린 조카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럼없는 아이와 달리 오히려 나는 보육원이나 고아에 대한 선입견을 의식했다. 그 점은 부인하지 않겠다. 다만 나는 굳이 아이에 대한 개인 정보를 밝힐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룸미러를 통해 나와 눈길이 닿자, 아이의 눈이 초승달처럼 작아졌다.
“우럭 아저씨! 오늘 몇 마리나 잡을 수 있을까요?”
“글쎄다. 아저씨가 알려 주는 대로만 하면 스무 마리 정도?”
“에이. 그것 가지고 우리 식구들 한 마리씩도 못 먹겠다.”
“그래. 한번 열심히 해 보자. 너무 욕심내지는 말고.”
“알았어요. 헤헤.”
33명의 대식구들이 먹으려면 못해도 100마리는 되어야 할 것이다. 채소를 듬뿍 넣은 주꾸미 덮밥이라도 만들려면.
고작 열 살에 불과한 아이다.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 훔쳐보며 준서가 낚싯대나 제대로 들고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아저씨가 좀 보태 줘도 되겠지?”
“절대로 안 된다니까요! 내가 잡은 걸로만 가져오겠다고 얼마나 자랑하고 왔는데요.”
“어이구, 알았다. 알았어.”
준서는 나이보다 일찍 철이 든 아이였다.
낚시를 떠나기 전에 준비 사항을 알려 주려 그와 직접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번 출조에서 잡은 수확물을 전부 보육원에 나눔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준서와의 대화에서 나는 그 계획을 바꿔야 했다.
속도 깊지만 자립심이 남다른 아이였다.
준서는 그냥 얻어먹은 것은 한치로 족하다고 말했다. 자신이 직접 잡은 주꾸미로 식구들과 먹겠다는 아이의 순수한 고집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래. 열심히 잡게 만들고 모자라면 내가 약간…….
준서 때문에 기존의 나눔 신청은 그대로 받기로 했지만, 내가 잡은 걸로 아이의 부족한 부분을 일부 메워 줄 계획이었다.
무창포항은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매우 가깝다는 장점이 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국도로 접어들 무렵 사심희가 준서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준서야. 근데 너 학교에서 공부는 좀 하니?”
“그건 왜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낚시꾼이 되려면 공부도 잘해야 하거든.”
“낚시꾼도 시험 보고 그러나요?”
“아마도…….”
“에이, 아닌 것 같다. 사실은 저 공부 별로 못해요. 꼴찌는 아니지만요. 헤헤.”
솔직함까지 갖췄구나.
해맑게 웃는 준서의 모습에 나도 몰래 킥킥거렸다.
“그래도 운동은 좀 해요. 금메달을 따려면 체력이 좋아야 할 것 같아서요.”
이런 걸 어른들이 선택과 집중이라고 하던데.
아이답지 않은 녀석인 것만은 분명하다. 준서의 말을 듣던 내가 고리타분한 말로 타일렀다.
“낚시는 체력만으로 하는 건 아니란다. 머리를 써야 하거든.”
“알겠어요. 그래도 저 학교에서 애들한테 인기는 좋아요. 배를 타고 낚시를 간다니까 다들 부러워하더라고요.”
“학교에도 벌써 자랑하고 왔구나?”
“그럼요. 백 마리 잡아 온다고 했어요.”
허어. 금메달이니, 100마리니, 아이다운 표현이지만 목표 의식 하나는 뚜렷하구나.
좋다!
그렇다면 내가 오늘 확실하게 너의 자랑거리를 만들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