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낚시로 인생 역전-43화 (43/130)

[제43화] 구피

툭!

보람이가 새로 꺼낸 케이스는 다른 것들에 비해 묵직해 보였다.

“뭐냐? 또 신제품이냐?”

“응. 지금의 멀티싱커는 60호를 넘어가면 사용하기 곤란해. 너도 알 거야.”

맞는 말이다.

직경이 16밀리미터이다 보니, 60호 이상을 쓰는 낚시에 적용하려면 너무 긴 쇠막대기로 변하고 만다.

10호를 기준으로 하여 무게는 37.5g, 길이가 2센티미터이다 보니 60호면 12센티나 되는 것이다.

나는 얼른 케이스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직경을 크게 키운 봉돌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두 종류였는데 대략 눈대중으로 보아 80호와 20호였다.

“80호에서 120호까지 사용하는 낚시가 많잖아. 선상 우럭 낚시만 해도 지역에 따라 100호도 쓰고, 어떤 곳은 120호를 써야 하고.”

“그렇지.”

아주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멀티싱커의 장점을 확장시킨 신제품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수많은 기업체에서 떠들어 대는 ‘혁신’이 별거겠는가.

반드시 무에서 유를 창조할 필요는 없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매우 드물다. 보람이야말로 자신의 일에서 부단한 혁신을 해내고 있다.

“도라에몽, 너 대단하다. 머릿속에 온통 멀티싱커 생각뿐이었겠어.”

“헤헤. 뭘. 이왕이면 활용 범위를 넓히고 싶었어.”

“제품명은 뭐로 하려고?”

“멀티싱커 점보.”

기특한 녀석.

단돈 4천만 원이 투자된 어반자팩토리를 그는 시작부터 흑자로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보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안주하지 않고 지속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그의 마인드였다.

“제작하려면 돈은 있어?”

“걱정 마. 지금 멀티싱커가 만드는 족족 팔리고 있으니까 돈은 내부에서 충분히 조달할 수 있어.”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재준 영감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 참 보기 좋네요. 좋아하는 일에 과감히 뛰어들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데, 이렇게 잘 해내고 있다니 말입니다.”

“뭘요. 이제 시작인데요.”

아까부터 홀로그램 봉돌을 만지작거리던 고동우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리바리하던 두 친구가 지금은 봉돌 시장을 석권하겠다고 벼르고 있네. 그런데 이 홀로그램이랑 야광은 언제 상품으로 나오는 거냐?”

“우럭 님이 실전 테스트 마치면 바로 하려고요.”

“아하. 그렇지. 테스트…….”

곧바로 시장에 내놓을 줄 알았는데, 신중한 보람이는 역시 생각이 달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물었다.

“주꾸미 낚시 시즌은 다음 달부터잖아. 그 전에 출시하려면 어디에다가 테스트를 해야 할까?”

“당장에 한다면 돌문어가 있잖아.”

“그렇긴 하다만…….”

돌문어는 최근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다른 어종을 선택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새로운 낚시에 도전하면서 테스트까지 겸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잠깐 동안 머리를 굴리다가 좋은 대상어가 떠올랐다.

나는 생크림 케이크에 여념이 없는 사심희를 바라보았다.

“사시미 님! 내일 설악산 간다고 했지? 거기에서 언제까지 있을 거야?”

“2박 3일 코스로 짰어요. 근데 왜요?”

보람이가 공들여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다.

나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마지막 날 설악산 근처에서 나랑 만나. 픽업해서 곧장 동해 바다로 가는 거야.”

“동해요? 거기에도 돌문어가 나오나요?”

사심희도 은근히 아는 게 많다.

돌문어는 깊고 푸른 동해에서 나오지 않는다.

제일 먼저 눈치를 챈 사람은 장재준 영감이었다.

“돌문어가 아니라면 대왕문어?”

“그렇습니다. 요즘이 잘 나올 때가 아니던가요?”

“그래도 배에서 절반은 꽝을 치는 낚시죠. 큰 거 한 마리만 잡아도 대박이지만 말입니다.”

대왕문어.

피문어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좀처럼 마릿수로 잡기 어려운 어종이라고 알고 있다.

보람이가 큰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대왕문어 낚시가 테스트로 적당할까? 아까도 말했지만 홀로그램과 야광은 60호 이하에서…….”

그때 선상 낚시에 경험이 많은 장재준 영감이 나섰다.

“대왕문어 낚시는 50호 안팎이면 충분하니까 문제는 없습니다. 그보다 내 걱정은…… 대왕문어가 테스트에 적합한 어종인지가 의문입니다. 아무리 우럭 님이라 해도 평균적인 조황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너무 걱정 마세요. 설마 꽝이야 치겠습니까?”

다소의 반대 의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도도 하기 전에 걱정부터 앞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그냥 부딪쳐 보는 거다. 안되면 그때 돌문어로 선회해도 늦지 않다.

“혹시 같이 가시고 싶은 분 없으세요?”

예의상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돌문어도 그렇지만 대왕문어는 특히 고급 어종인지라 동출을 원하는 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일이 바빠진 보람이는 고개를 저었고, 장재준 영감은 금요일에 배달 주문이 밀리는 날이라면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럼 구피 님은요?”

“나? 우리 마나님이 문어를 잡아 오면 좋아할 테지만……. 요즘 기름값도 오르고…….”

약간 망설이고 있는 고동우.

조금 더 적극적으로 그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제 차로 모실게요. 구피 님은 편하게 낚시만 하시면 됩니다.”

“……그럼. 그럴까? 기름값 때문에 망설인 건 아니니까 오해는 말아라.”

“아이고, 구피 님도 참.”

멤버들이 방송 출조에 동참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공금으로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다. 출연료까지는 아니지만 모든 경비는 회사에서 부담한다는 원칙을 세운 지 오래다.

“구피 님과는 참 오랜만에 둘이 가네요. 거제도 갯바위가 마지막이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고동우와 오랜만에 오붓한 낚시를 즐기게 되어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그러게…….”

늘 쾌활한 모습만 보이던 사람.

그 순간 나는 그의 얼굴에서 평소와는 다른 어두운 그림자를 엿본 것 같다.

* * *

다음 날 오전이었다.

나는 집 근처의 마트를 나서는 길이었다. 베타의 먹성이 날로 좋아져, 엥겔 지수는 계속 높아져만 간다.

나온 김에 낚시점에나 가 볼까?

대문어용 에기나 몇 개 사려는 계획이었다. 에기를 서너 개씩 매달아야 하는 특성상, 에기 겸용 신제품만으로 낚시를 할 수는 없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낚시점에 막 도착해서 주차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강유록 씨 핸드폰 맞나요?”

처음 듣는 여성분의 음성이었다. 젊은 사람 같지는 않고, 기운이 하나도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원숙한 분위기가 풍겼다.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불쑥 전화드려서 죄송해요. 저 고동우 씨 아내 되는 사람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말은 많이도 들었다. 하지만 직접 대면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게 무슨 용건일까?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괜찮으시면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임대 계약서 주소를 보고 근처에 와 있어요.”

“분당에 말입니까?”

“네.”

“제가 잠깐 다른 곳에 나와 있어서요. 멀진 않습니다. 근처에 보이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후닥닥 차에 올라탔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오만 가지 추측이 머리를 가로질렀다.

괜히 문어 낚시를 같이 가자고 했나?

무슨 일인지 주저하던 고동우의 모습이 떠올라 불안해졌다.

무거운 마음으로 들어선 카페에는 손님이 적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더니 구석 자리의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저어, 형수…… 님, 그러니까 고동우 씨의…….”

“아! 오셨군요. 처음 뵙네요.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커피 주문하겠습니다.”

“……네. 그럼. 아이스아메리카노로 좀.”

40대인 고동우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나는 똑같은 두 잔의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갑작스럽게 연락도 없이 찾아와 미안해요.”

“아닙니다. 혹시 낼모레 낚시 때문이라면…….”

“그건 아니에요.”

“그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녀를, 나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사실은 건물 계약 때문에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아서요. 남편에게 부탁했지만 펄펄 뛰는 바람에 이렇게 제가 왔답니다.”

건물 계약?

그렇다면 아지트 문제였구나. 혹시 보증금을 깎은 것 때문에?

“편하게 말씀하세요.”

“건물을 팔려고 내놓아야 할 것 같아서요.”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멤버들과의 소중한 만남을 이어 갈 중요한 공간이다. 더군다나 어반자의 두 회사가 움트고 있는 사무실이기도 하다.

자초지종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수족관 운영이 힘들다는 것은 알고 계실 것 같아요. 사실은 지금 우리가 생계마저 어려운 상황이에요. 큰 애가 중학생인데 학원비도 내지 못하는……. 초면에 이런 말씀 드리기가 민망하네요.”

“……아닙니다. 혹시 제가 보증금을 조금 올려 드리면 상황이 해결될 수 있을까요?”

“미안합니다. 건물에 대출이 많아요. 이자를 감당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파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답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생계의 문제.

한가로이 아지트와 사무실을 걱정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정든 곳이지만 옮겨야 할 수밖에.

문득 해맑게 웃고 있는 고동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낄낄거리면서 1층 현관문과 연결된 부저를 2층에 설치하던 얼굴……. 철없는 가장이라는 생각보다 그 얼굴이 측은하게만 느껴졌다.

“형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부모님이 물려준 유일한 유산인데 속이 좋을 리는 없겠죠. 수족관은 더 유지할 수도 없고. 당장은 그거라도 파는 방법밖에는…….”

“그렇게 장사가 안되는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다 죄송하네요.”

“물고기 키우는 게 좋다고 회사도 그만두고 시작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물고기를 잡는 걸 더 좋아하니 어쩌겠어요.”

돌이켜 보니 그가 수족관에서 죽어 버린 물고기들을, 혹은 누렇게 변해 버린 썩은 수초들을 내다 버리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그의 말대로 그냥 손님이 줄어든 건지, 아니면 아내의 말처럼 낚시에 빠져서 수족관 운영을 소홀히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멤버 중의 한 명이 또 곤경에 처했다는 사실. 나는 일단 고동우의 아내에게 정중히 세입자로서의 예의를 갖췄다.

“임대 계약은 걱정 마세요. 매매가 확정되면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사실은 임대를 끼고 내놓을까도 생각했지만, 나름 사정이 있어 그렇게 되었어요. 너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머릿속에서 이번에는 새들이 지저귀는 것 같다.

카페를 나와 그녀의 차량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터덜터덜 내 차가 있는 장소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수족관도 망하고, 이제는 부모님의 유일한 유산까지 팔아 치워야 한다니.

두 아이를 둔 40대 가장의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그렇게라도 해서 급한 불을 끄기를 바랄 수밖에.

집으로 들어가려다 꿀꿀한 기분을 달래고 싶었다.

그래서 애초의 계획대로 낚시점으로 다시 돌아갔다.

“어서 오세요! 아! 우럭 님 오셨군요.”

“잘 지냈습니까? 황 프로님!”

“AON 님과의 콜라보, 정말 명승부였습니다.”

“벌써 보셨군요.”

“완전히 대박이더군요. 반응이 장난이 아니에요.”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다.

황선태의 서글서글한 응대에 가슴속에 있던 납덩이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색깔별로 에기들을 주섬주섬 챙겨 황선태에게 내밀었다. 대왕문어 용도로 나온 것들 중에는 제일 싼 에기였다.

“이거 좀 싸 주세요.”

“오호! 이번에는 대왕문어까지 쓸어 담고 오시려고요?”

“하하. 쓸어 담기는요. 그냥 해 보고 싶어서요.”

“50% 할인해 드릴게요.”

“아녜요. 그럴 필요 없어요.”

“다음 주부터 50% 할인 들어가는 데 미리 해 드리는 것뿐이에요. 사양하지 마세요.”

“그래요? 그런데 무슨 세일을 50%나…….”

좋긴 하다만 너무 파격적인 할인 행사에 이상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평균 마진이 30%라도 들었는데 그렇다면 원가 이하라는 의미가 아닌가.

“사실은 저 낚시점 정리하려고요.”

“네에? 정말요?”

“새로운 프로그램 출연을 제안받았어요. 계속 벼르고 있었는데 이참에 낚시에만 전념할 계획입니다.”

이런……. 축하할 일인 것은 맞는데.

또 하나의 정든 공간이 사라지는 건가, 왜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오는 건가, 처음에 내 머릿속을 메운 생각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내 귓가로 고동우의 아련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나도 이런 낚시점이나 하면 좋겠구나.’

언젠가 그와 멀티싱커를 팔러 다니던 그날이었다.

이곳에 들렀을 때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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