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몸맛
미터급 부시리였다.
놈이 바늘에 걸린 순간, 내 머리를 강타한 생각은 ‘과연 내가 이걸 끌어 올릴 수 있을까?’였다.
난생처음으로 겪은 대물의 몸부림.
12킬로에 육박하는 부시리 한 마리의 저항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동안 내가 감당할 수 있었던 최대 무게는 낚시 대회에서 5짜 개우럭 세 마리였다.
개우럭 세 마리는 동시에 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부시리가 한 번만 방향을 틀어도 강한 힘에 이끌려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놈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왼쪽으로 홱!
반대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그리로 홱!
내가 녀석을 잡은 건지, 녀석이 나를 잡은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끄으응!”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단은 버텨 보는 게 최선. 약간 풀어 놓은 드랙을 치고 놈이 좌우로 째는 통에 심장이 콩닥거렸다.
시간은 흐르고 놈의 저항이 서서히 무뎌지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적응한 것인가?
순간 이 대단한 녀석을 끌어 올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슬슬 피어올랐다. 이때다 싶어, 나는 천천히 릴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AON은 70센티미터 정도의 부시리를 이미 포획하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빅원(Big One)을 잡으셨나 보네요. 축하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다시 보일링이 피어오르는 곳으로 두 번째 캐스팅을 시도하는 AON. 또다시 현란한 손기술을 시연하던 그의 낚싯대가 일순간 출렁거렸다.
대단한 실력이군. 일타일피라니.
속으로 감탄을 하면서도, 나는 조금씩 대물과 나의 간격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느덧 몸이 풀렸는지, 어느덧 허리의 통증은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는 기분 좋은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우와와!”
드디어 수면에 희뿌연 물고기의 형체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카메라 뒤에서 사심희가 탄성을 자아내자 선장이 황급히 뜰채를 들고 달려왔다.
“오른쪽으로!”
선장의 외침에 낚싯대를 오른쪽으로 틀어 보았지만, 놈이 마지막 바늘털이를 시도하며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하지만 놈도 나와 마찬가지로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
나는 드랙을 조이고 다시 힘차게 놈을 수면으로 유도한 뒤, 그대로 뜰채로 골인시키고 말았다.
“첫수부터 똘똘한 놈으로 잡으셨네요. 빵이 아주 좋습니다.”
“뭘요.”
아까와 비슷한 크기의 부시리를 한 마리 추가한 AON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마릿수로는 1:2 상황이지만 무게가 어찌 될지는 나도 가늠할 수 없었다.
어쨌든 첫 번째 목표는 달성했다.
빅게임에 입문하자마자 얻어낸 화끈한 몸맛에 한층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번에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두 번째 즐거움을 만끽해 볼 생각으로 나는 또다시 물속을 탐색했다.
그때 내 귓가에 AON과 선장이 뭔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권에도 잡힌다고?”
“어탐기에 그렇게 나오네. 씨알은 잘 모르겠지만.”
“방금 저분이 잡는 거 못 봤어? 훨씬 컸잖아.”
“그럼 알아서 해 봐.”
AON은 파핑대를 접고, 거치대에 꽂혀 있던 지깅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메탈지그가 매달린 채비를 그대로 퐁당 빠뜨렸다.
나도 그를 따라 다시 채비를 담갔다. 제3의 시야를 활짝 열고 내려다보니, AON의 메탈지그가 바닥에 닿았다가 살짝 떠올라 있었다.
이번에도 AON의 액션은 현란했다.
그의 메탈지그는 마치 살아 있는 갈치처럼 몸을 세운 상태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동작을 살피다가 일순간 줄 풀림을 멈췄다.
이번에는 중층이었다.
아까보다 큰 물고기 한 마리가 휙 지나가고 있었다. 사뿐히 내려앉은 내 미끼를 본체만체 놈이 그냥 지나치는가 싶었다. 아차 싶어 AON이 했던 것처럼 초릿대를 살랑살랑 흔들어 보았더니.
옳지!
놈이 고개를 돌려 어슬렁 내 미끼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가라! 가! 인마!
작은 부시리였다. 근처에 있던 녀석이 겁도 없이 내 메탈지그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휘리릭!
나는 이왕이면 아까보다 더 짜릿한 몸맛을 원했다. 작은 놈이 물기 전에 재빨리 릴을 감아올리자, 다가오고 있던 대어가 입을 벌린 채 더욱 빠른 속도로 돌진하는 게 아닌가.
덜컥!
성공이다. 미터급 대어가 잔챙이를 밀어내고 내 미끼를 덥석 차지하고 말았다.
“히트!”
그 순간 공교롭게도 AON의 세 번째 히트를 알리는 경쾌한 소리가 뱃전에 울려 퍼졌다
허허. 참. 정말로 대단한 실력일세.
나는 숨을 죽인 채 또 한 번의 진한 몸맛을 위해 파이팅 벨트를 더듬었다.
“우와! 오늘 날을 제대로 잡았네요.”
들뜬 사심희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힘껏 몸을 뒤로 젖혔다. 방금 전에 한 마리를 끌어 올렸던 경험을 얻은 뒤라 불안하거나 초조함은 없었다. 그야말로 순도 100%의 아드레날린이 목덜미를 휘어잡았다.
뒤늦게 내 모습을 발견한 AON 측의 카메라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뭡니까? 또 더블 히트?!”
흔치 않은 광경이 연속으로 일어나자 AON도 릴을 감으면서 내 쪽을 주시했다. 물속에서 크게 동심원을 그리면서 올라오는 그의 포획물은 이번에도 7짜 정도의 크기였다.
잠시 후 선장이 뜰채를 들고 AON의 곁으로 달려갔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사이즈에 AON의 얼굴에는 약간의 실망감이 감돌았다.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져 나는 은근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야! 완전히 크네요!”
내 발밑으로 올라온 대어를 보고 지른 사심희의 탄성이었다.
이번에는 한결 안정되고 완성도가 높은 낚시였다. 우왕좌왕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한 몸맛을 느낄 수 있어 나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다.
선장의 도움으로 1미터가 조금 넘는 물고기를 뱃전에 내려놓자마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시리가 아니다……!
아까와는 약간 다른 색채에 나는 그것이 방어라는 것을 직감했다.
방어와 부시리는 거의 유사하여 나란히 놓아도 쉽게 구별하기 힘든 어종.
주상악골의 형태로 확실한 구별이 가능하나, 대개는 옆구리에 노란 줄무늬가 선명한 것이 부시리라고 보면 된다.
“방어를 잡으셨네요. 손맛이 좋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미리 정해 놓길 잘했군요. 그것도 대상어잖습니까. 당연히 카운트하셔야죠. 하하.”
방어와 부시리가 항상 몰려 다닌다는 특성을 잘 아는 AON.
AON과 미리 합의한 룰에 따르면 방어와 부시리 모두 포함하여 총 무게를 합산하기로 했다. 그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와 보니 다행이었다.
현재 스코어 마릿수는 2:3.
다만 내가 잡은 두 마리의 무게가 AON의 세 마리와 거의 비슷할 거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거의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서 슬슬 승부에 대한 열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정신없이 첫수를 낚고, 두 번째는 여유롭게 대물의 몸부림을 즐기고 난 뒤였다. 특히 두 번째 물고기는 크기를 골라 잡았다는 사실에 은근한 자신감이 발동했다.
어쩌면…… 잘만 하면…….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나의 신비로운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지금까지 나는 굳이 다른 사람과 조과를 비교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물속을 보는 재능을 나의 부족한 경험과 테크닉을 어느 정도 보완해 주는 정도로만 여겨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머릿속 어탐기의 효과는 너무나 탁월했다. 특히 대상어의 크기를 골라서 잡을 수 있다는 점은 실로 가공할 만한 무기였다.
나는 AON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오늘 촬영이 몇 시까지라고 하셨죠?”
“오후 1시까지입니다. 반쯤 지났으니까 파이팅하세요.”
이제 남은 시간은 두어 시간.
머릿속으로 슬픈 해단식을 맞게 된 시골 축구 소년들을 떠올리며 나는 바다를 살피기 시작했다.
AON은 계속 버티컬 지깅을 고집하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고이 모셔 두었던 파핑대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수면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한 무리의 대어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낚싯대를 뒤로 젖히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비 내리는 M 좌대에서 수없이 연습했던 캐스팅.
과연 멋지게 성공할 수 있을까?
곁눈질로 보니 AON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휘이익! 촤르륵!
목적한 위치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나는 머쓱한 미소를 보이고는 채비를 회수하고 다시 목표 지점을 정조준했다.
휙! 처억!
시위를 떠난 채비가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사뿐히 목표 지점에 안착했다.
채비가 약간 물에 가라앉기를 기다린 나는 천천히 줄을 회수하면서 액션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푸드득!
무리 중에 대장격으로 보이는 놈이 포말을 일으키며 내 미끼를 덥석 물었다. 나는 곧바로 낚싯대를 번쩍 들어 녀석의 위턱에 깊숙이 바늘을 꽂는 데 성공했다.
“히트!”
당당한 내 목소리에 주변의 시선들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수월한 싸움이었다. 당황한 대어가 반대쪽이 아니라 곧장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휘리릭! 휘리릭!
빠르게 줄을 회수하면서도 나는 대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차 싶었는지 어느새 놈은 방향을 바꿔 아래로 수직 하강을 시도했다.
드륵! 드르륵!
드랙을 치고 나가는 소리가 뱃전에 울려 퍼졌다. 힐끗 AON 쪽을 살펴보니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걸렸다! 이놈!”
힘차게 낚싯대를 흔들던 AON의 입에서 튀어나온 음성이었다. 내려다보니 그 또한 처음으로 꽤 큼직한 녀석을 걸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배 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상황에서 두 사람의 릴에서 나는 소리만 들려왔다.
드르륵! 드르르륵!
폭군의 몸부림에 맞춰 내 몸도 같이 움직였다. 그렇게 밀고 당기고 쉬기를 거의 20여 분.
마침내 뜰채에 담겨 뱃전에 떨궈진 물고기는 1미터가 훌쩍 넘는 부시리였다.
잠시 후 AON도 미터급 부시리를 낚아 올렸다.
그의 포획물 또한 내 것과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는 크기였다. 승부의 향방은 짙은 안개 속에서 한 치의 예측도 불허하고 있었다.
팔목이 아려와 잠깐 쉬어야 했다.
빠르게 흘러가던 조류도 점점 죽어 가며 그나마 활발하던 물고기의 입질도 뜸해지고 있었다. AON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고 나를 향해 빙긋 미소를 건넸다.
“대단하시네요. 그런 줄 알고는 있었지만.”
“AON 님이야말로 고수십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이제 남은 시간은 불과 한 시간 남짓.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나마 낱마리로 보이던 대상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바닥을 살펴봐도, 주변의 먼바다를 둘러봐도 바닷속은 텅 비어 있었다.
AON도 열심히 액션을 취하고는 있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이 이제 다 잡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누가 이겼을까?
무게 계측은 낚시가 끝나고 할 예정이어서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전부 대물로만 잡았지만 마릿수에서 하나가 적다는 사실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이대로 끝인가?
이왕이면 내가 이겨서 나눔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룰을 뒤늦게 한탄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온다…….
하릴없이 파핑대를 흔들고 있던 내 시야에 바닥권에서 두어 마리의 부시리가 어슬렁거리는 광경이 감지되었다. 잡념에 빠져 한눈을 판 사이에 슬그머니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들고 있던 파핑대를 내려놓고 옆에 세워 놓은 지깅대를 더듬었다. AON은 무표정한 얼굴로 열심히 파핑대를 흔들고 있었다.
선장이 뛰어나와 크게 외쳤다.
“바닥권에 대어 출현! 서두르세요!”
어탐기를 확인한 모양이었다.
선장의 말에 AON도 지깅대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어탐기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AON보다 조금 앞서서 채비를 입수시킨 사람은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