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낚시로 인생 역전-38화 (38/130)

[제38화] 가상 훈련

작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휴대폰 안에 들어와 있었다. AON이 보낸 미열람 메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조금 더 장문의 편지였다.

‘아쉽군요. 아주 좋은 취지로 낚시를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연락드렸던 건데. 사실 우럭 님의 최근 방송을 모두 확인해 보았습니다. 제 방송 컨셉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에 놀랐습니다. 저는 사실 대결을 중심으로 하는 흥미 위주의 방송을 추구합니다. 서로 다른 느낌의 유튜버와 콜라보를 시도해 보고 싶었습니다. 서로에게서 배울 점이 많을 거라 기대도 했고요. 의미 없는 대결이라고 표현하신 것으로 미루어 저와 같은 생각이 아닌 것 같네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멀리서 우럭 님의 활약을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AON 드림.’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많을 것 같았다는 대목에서 내 눈길이 한동안 멈췄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다.

심지어 작은 오해도 있어 보이고. 단박에 거절한 이유는 그게 아니었는데. 나는 얼른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AON 님의 의도를 모른 상태에서 거절 메일을 보낸 것 같습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콜라보라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답장을 보내자마자 보람이가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에게서 AON에 대한 얘기를 좀 더 듣고 싶어졌다.

“일단 가능성은 열어 두었어. 그런데 AON은 어떤 사람이냐?”

“All or Nothing! 그게 AON이 추구하는 방송의 컨셉이야.”

“모 아니면 도? 알아듣게 설명 좀 해 봐라.”

“이기는 사람이 잡은 고기를 몽땅 가져가는 방식. 무슨 뜻인지 알겠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독특한 컨셉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한몫했지.”

“한 번도?”

“지금까지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반자TV로서는 또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물론 내가 질 확률은 매우 높다. 하지만 함께하는 과정에서 누구의 말처럼 배움의 기회가 적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눈 딱 감고 도전해 봐?

내 마음은 이미 이번 콜라보 제안을 수락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 * *

태풍의 여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AON과의 첫 콜라보 무대는 사흘 앞으로 불쑥 다가와 있었다, 그동안 상대방과 여러 번의 통화 끝에 함께할 방송의 컨셉을 확정했다.

AON은 의외로 거의 모든 것을 내게 일임했다.

심지어 대상어도 그의 주력인 지깅 낚시를 포기하고 서해로 넘어오겠다는 의향까지 내비쳤다.

반면에 빅게임을 원하고 있던 나로서는 오히려 삼척 인근에서 부시리 낚시를 하자고 그를 설득해야 했다.

다만 AON은 승부의 방식에 대해서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AON의 룰을 적용하고 싶어요. 승자가 모든 조과물을 독식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미 예상했던 터라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다.

AON의 과거 방송분을 살펴본 결과,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다. 긴박한 승부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재미. 비록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많이 다르지만, 이런 채널이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좋습니다. 승부로 가시죠. AON 님이 이기면 내 물고기까지 다 가져가시고, 내가 이기면 몽땅 우리 독자들에게 나눔을 하겠습니다.’

내가 이길 거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두 방송의 특성을 살리면서 아름다운 승부를 펼쳐 보고 싶었다.

이제 사흘만 지나면 삼척의 임원항으로 달려가 고대하던 빅게임의 날이 밝을 것이다. 거의 모든 준비도 이미 마쳤다.

단골 낚시점에 가서 지깅과 파핑 장비를 각각 구입했고, 유튜브 동영상을 검색하며 머릿속으로 수백 번 부시리 낚시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되풀이했다.

그렇지만 시뮬레이션만으로는 부족하다.

바다에서 실전 훈련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주르륵, 주르륵…….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바로 날씨가 장애물이었다.

일기 예보상으로는 촬영 날짜 당일에는 낚시에 무리가 없는 기상이 예고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전날까지 계속 많은 비가 내릴 예정이라 현장 실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질 때 지더라도 어설픈 낚시로 망신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를 응원할 어반자의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부끄럽지 않은 승부를 펼치고 싶었다.

―본때를 보이고 오세요^^

―AON 만만치 않을 텐데. 생중계해 주시면 안 되나요?

―동해안에 부시리 씨가 마르겄네. 우럭 님이 뜬다. ㅎ

하루 전날 올려놓은 부시리 예고편에는 무수한 댓글들이 달렸다. 첫 콜라보 방송이라는 점에서 독자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이번 콜라보 방송에서 나눔 또한 모 아니면 도가 될 거라는 예고를 해 놓았다. 재미있는 현상은 아직까지 나눔 요청 메일이 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청자들이 승부에 집중하라고 일부러 자제하고 있는 걸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면 다들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해서?

씁쓸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상대는 웬만한 프로 조사 수준의 실력자가 아닌가.

물론 어반자의 팬들은 나를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승부에 있어서만은 냉정한 예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헛둘! 헛둘!

벌써 며칠째 방 안에서 푸쉬업과 스쿼트로 몸을 단련해 왔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것 말고는 없었다.

캣 타워에 올라 있는 베타가 듣기 싫은지 무거운 눈꺼풀을 올렸다가 그대로 외면해 버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실전 훈련을 하지 않고는 망신을 당할 수도 있겠다. 거기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되겠어.

운동을 하다가 그럴듯한 차선책이 떠올랐다. 낚싯배를 대신해 모의 훈련을 할 수 있는 장소는 그곳뿐이었다.

혼자 가기는 약간 심심한데…….

나는 보람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지트에 푹 박혀 일에만 빠져 있었다.

“도라에몽? 너 내일 뭐 하냐?”

“일해야지. 그런데 왜?”

“나랑 M 좌대에 바람이나 쐬러 가자.”

“비 오는데?”

“차양이 있는 곳에서 하면 되지. 그리고 시원하게 비 좀 맞으면 어때?”

“……그, 그럴까? 안 그래도 사무실에만 있으니까 답답했는데.”

“오케이. 그럼 내일 아침에 네 집으로 데리러 가마.”

“좋았어.”

우럭을 잡으러 가려는 건 아니다.

지금까지는 머릿속으로만 시뮬레이션 훈련을 해 왔다. 이제는 실제로 낚싯배와 유사한 환경에서 그동안 학습했던 여러 가지 액션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였다.

* * *

“베타야, 너도 갈래?”

“어~~~ 웅.”

싫다는 소리다.

며칠 동안 집구석에만 있는 베타에게도 바람이나 쐬라고 말했지만, 녀석은 집이 좋은가 보다. 이른 아침 나는 하는 수 없이 혼자 집을 나섰다.

차를 몰고 보람이가 사는 수원으로 달리던 도중이었다.

휴대폰이 울려와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뜻밖에도 사심희의 전화였다.

“사시미 님이 웬일이야?”

“섭섭하네요. 나만 빼고 바람을 쐬러 가신다니.”

“어떻게 알았어?”

“어제 도라에몽 님이 전화 받을 때 나도 아지트에 있었죠.”

“오늘은 방송 촬영이 아니라 부르지 않은 거야.”

“알아요. 어쨌거나 나도 갈래요. 집구석에만 있기 심심해서요.”

“……나야 좋지.”

그렇게 사심희와 보람이를 차례로 태운 내 차량은 빗속을 달려 서산의 삼길포항에 도착했다.

퇴사 직전에 보람이와 마지막으로 낚시를 했던 곳.

평일인데다 비까지 내리니 선착장에는 아이스박스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감상에 젖은 눈빛으로 우럭의 눈알과 마주쳤던 그곳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작은 배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거의 독좌대입니다. 텅텅 비었습니다요.”

검은 안경을 쓴 선장이 반갑게 우리들을 맞았다.

하긴 어떤 미친놈이 이런 날 낚시를 오겠는가. 나야 훈련을 목적으로 왔다 치고, 보람이가 유일하게 우럭을 잡으려는 유일한 손님일 것이다.

“바다 좌대라는 곳은 처음 와 보네요.”

배에 올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사심희는 소풍 나온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린 작은 보냉 가방을 가리켰다.

“도시락이라도 가져왔어? 내가 컵라면 챙겨 왔는데.”

“별거 아니에요. 우럭 회무침 용으로 채소랑 양념장 좀 싸 왔어요.”

“우럭? 나는 오늘 훈련하러 왔어. 보람이가 말 안 했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모르고 있었던 눈치다.

“그럼 도라에몽 님이 오늘 실력 발휘를 해 줘야겠네. 미안하지만 네가 세 마리만 잡아 봐라.”

“그, 글쎄…….”

보람이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보람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때 나는 속으로 컵라면을 가져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좌대 위에는 서너 명의 열혈 조사들이 빗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우리는 예전에 와 봤던 화장실 근처에 짐을 풀었다. 비를 막아 주는 차양이 있어, 쉬거나 낚시하기에 좋은 위치였다.

점심을 위해 홀로 무거운 짐을 맡게 된 보람이는 두 대의 낚싯대를 펼쳤다. 하나는 내림 낚시요, 다른 하나는 소세지찌 채비였다.

사심희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서 쉬고 있어. 난 저쪽에 가서 연습하고 올게.”

일행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나는 좌대의 바다 끝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급적이면 수심이 깊은 곳이라야 연습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자리에 서서 나는 새로 산 지깅대를 꺼내 들었다.

‘30킬로는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장비입니다. 두고두고 쓰시면 괜찮을 거예요.’

황선태가 골라 준 낚싯대에 갈치 모양의 메탈지그(지깅 낚시에 쓰이는 메탈 재질의 가짜 미끼. 바늘과 봉돌의 역할을 겸하고 있음)를 매달았다.

먼저 버티컬 지깅 낚시(대상어가 깊은 물속에 있을 때 지그를 수직으로 내려 취하는 낚시) 훈련을 해 볼 생각이었다.

퐁당!

은빛 찬란한 지그가 빠른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닿는 느낌과 동시에 나는 릴을 멈췄다. 그리고 교과서로 배워 둔 다양한 액션을 시도해 보았다.

이런…….

처음이라 그런지 메탈지그의 움직임이 엉성하다. 나는 동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위아래로 좌우로 낚싯대를 흔들었다.

간간이 휘파람으로 지그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그렇게 한참을 연습에 매진했다. 두 시간 가량이 지나자 메탈지그가 그런대로 살아 있는 미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지깅 연습은 그럭저럭 이만하면 됐고…….

이번에는 파핑 낚시(대상어가 수면에 떠 있을 때 채비를 멀리 던져 끌어당기는 방식으로 유인하는 낚시) 방식으로 연습을 해 볼 차례다.

펜슬(파핑 낚시에 쓰이는 가짜 미끼)이 달린 낚싯대를 꺼내고 있을 때였다. 보람이와 사심희가 뭘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멀리서 살펴보니 보람이는 아예 의자에 길게 누워 있었다. 예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심희의 모습도 변함이 없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에 장단을 맞추는 모습이었다.

나는 씩 웃으면서 다시 훈련에 집중했다.

파핑 낚시의 절반은 캐스팅이 관건이다. 나는 낚싯대를 뒤로 젖히고 힘차게 정면을 향해 던져 보았다.

추르르! 척!

원투 낚시를 자주 해 봤던지라 그리 어설프지는 않아 보였다. 생각보다 멀리 나아간 채비가 수면에 안착함과 동시에 릴링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좌우로, 위아래로 낚싯대의 끝을 흔들면서 펜슬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다. 근처에 도사리고 있던 부시리가 펜슬을 발견하고 쏜살같이 달려드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멀리서 누군가의 함성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와와! 잡았다!”

보람의의 목소리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그는 좌대 위에서 팔짝팔짝 뛰고 있었다.

그래도 한 마리는 잡았나 보네. 그럼 오늘 우럭 회무침을 맛볼 수 있는 건가?

흐뭇한 시선을 거두려 할 때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금 뒤를 뒤돌아보았다.

어어?

낚싯대를 번쩍 들고 준수한 씨알의 우럭을 끌어 올리고 있는 사람은 보람이가 아니라 사심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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