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힐링
“포인트는 잘 알아 둔 거냐?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다 도망갔을 테지만.”
승합차에서 내리자마자 고동우가 내뱉은 썰렁한 농담이었다.
“하하. 밤새 달려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베타는 안고 부둣가에서 멤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사심희는 차 안에서 푹 자고나온 얼굴이었고. 장재준 영감과 보람이는 거의 날밤을 새운 몰골이었다.
“아침은 드셨어요?”
“오다가 장어탕 한 그릇씩 먹고 왔습니다. 허허.”
“그럼 바로 떠나시죠. 문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그들을 보트로 안내했다.
“채비와 에기들은 충분히 사 놓았어요. 여기다 둘 테니까 마음껏 꺼내 쓰세요.”
미리 준비한 소품들을 보트 뒤쪽에 내려놓자마자 나는 카메라 앞에 섰다.
“어반자TV를 사랑하시는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멀리 남해군 남단의 미조항이라는 아름다운 항구에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돌문어철을 맞아 오늘은 특별히 저의 방송을 도와주시는 동료분들을 모셨습니다.”
카메라가 멤버들의 얼굴을 한 번씩 비추는 동안 나는 얼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사심희는 선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베타의 모습을 담는 것 또한 놓치지 않았다.
“이번 출조에서는 조금 특별한 봉돌을 사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멀티싱커라는 이 제품은 우리 어반자의 관계 회사에서 출시했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여러분들을 깜찍한 돌문어의 세계로 안내해 보겠습니다. 출발!”
북 치고 장구 치고.
나는 멘트를 마치자마자 조타석에 올라 시동을 켰다. 그리고 천천히 후진을 시작했다. 장재준 영감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오오!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군요. 오늘은 마음 놓고 낚시만 해도 되는 건가요?”
“그럼요. 오늘 선장은 접니다. 다들 낚시에만 집중하시면 됩니다.”
그냥 해 본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오늘 제대로 선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낼 작정이었다. 낚시는 멤버들에게 맡기고 보트의 위치를 문어의 바로 위에 올려다 놓은 것이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보트가 설리 해수욕장의 황금 어장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15분 후였다. 어제의 그 자리에 멈춰 휘파람을 부는 순간, 내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다 어디로 갔지?
어제와 다른 것이 바다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너무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바닥에 널려 있는 빈 조개껍질들 사이로 드물게 문어들이 들러붙어 있을 뿐, 어제의 문어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여기가 우럭 님이 발굴한 황금 어장인가? 그럼 낚시 시작해도 되나?”
“그, 그럼요. 일단 시작해 보시죠.”
낭패였다.
그나마 낱마리로 건질 수는 있을 것 같아 그래도 여기서 시작해 보기로 했다. 더구나 딱히 다른 포인트를 알지도 못해 다른 방도가 없었다.
고동우가 제일 먼저 낚싯대를 펼쳐 들고 채비에 에기들을 주렁주렁 매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반경 100미터 이내의 바닷속을 계속 탐색하고 있었다.
“아아…….”
설상가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심희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면서 쪼그리고 앉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시미 님! 무슨 일이야?”
내가 달려가서 묻자 그녀는 말없이 뱃전에 나뒹굴고 있는 에기들을 가리켰다.
한두 개도 아니고 대략 20개의 날선 바늘이 달린 에기.
사심희의 지병이 도지고 말았다. 얼른 달려가 보니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괜찮아?”
“바늘이 너무 많아요. 조금 쉬면…….”
“조수석에 앉아서 쉬어. 얼른.”
“촬영은요?”
“지금 그게 걱정이야?”
멀티싱커를 제대로 찍으려면 근접 촬영이 필요하다
멀리 카메라를 고정해서는 찍으나 마나 한 상황. 다행히 보람이가 선뜻 나서 주었다.
“카메라는 내가 맡을게. 사시미 님. 얼른 저기 가서 앉아요.”
“예……. 고마워요.”
보람이는 여전히 사심희와는 말을 높이는 사이였다. 그녀를 부축해 조수석에 앉히고 나는 다른 멤버들에게 크게 외쳤다.
“오늘 쓰시는 에기들은 전부 가방에 넣어 두세요. 못 쓰게 된 것들도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두시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알았다. 사시미 님! 아깐 미안했어.”
“조심하겠습니다.”
바늘이 한두 개뿐인 다른 낚시에서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미끼가 바늘을 덮고 있으니까 바늘이 잘 눈에 띄지 않았으리라.
일전의 한치 낚시에서도 에기를 썼지만, 그때는 야간이라 그마나 괜찮았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모두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날이었다.
“미안해요. 괜히 따라와서 짐만 되는 것 같아서…….”
“무슨 소리야. 오늘은 그냥 바다나 구경한다고 생각해.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게 문제였어.”
발등의 불을 끄고 나자 다시 낚시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나는 제3의 눈에 불을 켜고 바닥을 샅샅이 수색하고 나섰다.
그나마 저기가 좋겠군.
부릉부릉 보트의 위치를 미세 조정하면서 문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을 때 고동우가 능숙하게 홍보 멘트를 날렸다.
“수심이 낮아 일단 20호 봉돌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본격적인 밀물이 몰려오는 시각이었다.
사선으로 뻗는 낚싯줄을 살피던 고동우가 휘리릭 채비를 회수했다.
“수심 낮아 괜찮을 줄 알았는데 무게를 높여야 되겠군요. 30호로 바꾸겠습니다.”
고동우는 씩 웃으며, 케이스에서 10호 봉돌을 꺼내 도르르 하단에 맞춰 끼웠다.
툭!
다시 물에 빠진 채비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고동우는 다시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겠습니다. 사릿물때라 30호도 무리네요. 약간 무게를 더 추가해 보겠습니다.”
고동우가 다시 5호 봉돌을 추가하는 모습을 보람이의 카메라가 열심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제 된 것 같습니다. 문어는 절대로 물 위에 뜨지 않습니다. 바닥을 읽지 못하면 문어의 얼굴을 볼 수는…….”
그가 신나게 떠들고 있을 무렵 옆 자리의 장재준 영감에게서 첫수의 신호탄이 들려왔다.
“히트!”
물방울을 뚝뚝 흘리면서 기역자로 휘어진 그의 초릿대.
신중한 손놀림에 이어 여덟 개의 다리를 날개처럼 퍼덕이며 돌문어가 올라왔다.
알록달록 붉은 꽃무늬의 돌문어.
그리 큰 사이즈는 아니지만 800그램 정도는 될 법한 괜찮은 씨알이었다.
“돌문어 포인트가 맞기는 하네요. 허허.”
장재준 영감은 활짝 웃으면서 문어를 잡아채어 아이스박스에 던져 넣었다. 고동우가 장난스럽게 그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하아. 한참 동안 떠들고 있는데, 선수를 치시면 어떡합니까?”
“저는 처음부터 35호로 시작했습니다. 물살을 딱 보면 모르겠습니까?”
두 사람의 미묘한 신경전이 느껴졌다.
아마도 오늘 두 사람의 승부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보트는 물살을 따라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그나마 드문드문 있던 돌문어도 보이지 않아 속을 태우고 있던 그때였다.
“아싸! 나도 히트!”
이번에는 고동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묵직한 게 장난이 아니군. 좋았어!”
잇몸을 완전히 개방한 그가 낑낑거리며 채비를 걷어 올린 순간.
“이게 뭐야?”
에기 바늘에 걸려 온 것은 문어가 아니라 아기 머리통만 한 돌덩이였다. 장재준 영감이 배를 움켜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구피 님. ‘돌’을 잡으셨으니, 이제 ‘문어’만 잡으면 되겠습니다. 허허허허.”
“이런…….”
시커먼 돌덩이에서 에기들을 떼어 내던 고동우는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바닥을 아무리 뒤져 봐도 돌문어는 커녕 주꾸미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어떤 일이냐? 한 시간째 도통 소식이 없으니.”
“어제만 해도 바글바글했었는데…….”
“그럼 정말로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간 거냐?”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시간만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새로운 포인트를 찾아 나서는 수밖에.
“잠깐만 쉬고 계세요. 금방 좋은 포인트를 찾아낼 테니.”
그렇게 큰 소리쳤지만, 솔직히 눈앞이 캄캄했다.
일단 설리 해수욕장 근처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굴곡진 해안선을 따라 넓은 바다로 나온 뒤에 나는 그야말로 을지로 교차로의 길모퉁이에 선 기분이었다.
어제 그 많던 돌문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간밤에 죽었을 리가 없다면 분명이 어디론가 이동한 것이다.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오른쪽으로 더 나가 볼까? 아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거기는 해수욕장이 계속 펼쳐진 모래밭. 문어들이 좋아할 곳이 아니다.
그렇다면 왼쪽으로?
거긴 미조항이다. 어제부터 죽 지켜봤지만 배가 드나드는 곳이라 역시 문어들이 몰려들 이유가 없다.
결론은 직진이다.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바닥을 보니 양쪽에 어초가 피어오른 틈으로 물골이 지나간 흔적이 보였다.
아름다운 물속을 자세히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물골을 따라 천천히 보트를 움직이던 그때였다. 섬의 근처에 이르러 드디어 조개껍질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몇 가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큰 섬이었다.
역시 그곳에 있었다.
울퉁불퉁한 돌무더기 틈으로 드디어 돌문어들의 무리들이 마그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낚시 시작하세요!”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멤버들이 다소 미덥지 않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엥?”
담그자마자 찾아온 입질.
고동우는 또 돌멩이가 아닌가, 의심하며 조심스레 릴을 감았다.
“정말이네? 문어잖아? 크하하.”
“나도 한 마리 걸은 것 같습니다. 허허허.”
고동우과 장재준 영감이 동시에 끌어 올린 돌문어들이 난간을 타고 넘어왔다.
툭!
그중의 한 마리는 무거운 돌멩이를 안고 있다가 뱃전에 툭 떨어뜨렸다. 돌문어라는 이름을 실감케 하는 광경이었다.
신나는 낚시 타임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던지는 족족 문어를 건져 내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 이 맛이지!”
“쭉쭉 잡아당기는군요. 허허허.”
두 사람의 너스레로 시끌벅적한 사이, 나는 사심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도 이제는 안정을 취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바닷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녀의 무릎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베타를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베타는 내려놓아도 괜찮아.”
“또 먹물을 뒤집어쓸까 봐서요.”
“문어는 그렇게 먹물을 쏘지는 않아. 안전한 보트니까 그냥 편하게 놔둬도 돼.”
그녀가 내려놓자, 베타는 기다렸다는 듯이 보트의 구석구석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아이스박스 뚜껑에 올라탔다가, 보람이의 바짓가랑이를 앞발로 건드리면서 녀석도 오랜만의 외출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베타야! 안 돼!”
사심희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온 것은, 고동우가 묵직한 문어 한 마리를 올리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보트 바닥에 털썩 내려놓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반사적으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베타가 커다란 문어 앞에서 몸을 바짝 낮추고 서 있었다. 처음에는 먹물을 맞을까 봐 사심희가 놀란 것으로 오해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베타가 앞발로 붙잡고 있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문어에게서 저절로 풀려나 바닥을 뒹굴고 있는 에기들의 뭉치였다.
베타가 상처를 입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조타석에서 뛰어나왔다. 그런데 나보다 한발 앞서 베타에게 달려간 사람이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베타야 괜찮지?”
베타에게서 에기 뭉치를 빼앗아 들고 있는 사람은 바늘 공포증을 앓고 있는 사심희였다.
“사, 사시미 님…….”
“이것 봐요. 내가 붙잡고 있어야 했다니까요.”
“그게 아니라……. 지금 들고 있는 그거…….”
사심희의 시선이 자신의 오른손을 향해 스르르 내려갔다.
“어어? 이게 내 손에 있었네요?”
“빨리 던져!”
“정말 이상하네.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에게 생긴 놀라운 변화였다.
베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바닥을 기고 있는 문어에게 다가가 시비를 걸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예리한 바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낚시 와서 진짜 힐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