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선상의 빌런
본격적인 민어철을 실감할 수 있는 바다였다. 격포에서 알아준다는 선장의 포인트 선정도 탁월했다.
옮기는 포인트마다 서너 마리의 크고 작은 민어들이 올라왔다. 대다수의 손님들은 오전 중에 최소 한 마리씩 챙기는 상황이었고, 나도 준수한 씨알의 민어 한 마리를 추가하여 여유로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일은 나와 동행한 오경환이 첫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고패질을 하다가 멈추면 입질이 들어올 겁니다. 고패질은 너무 세게 하지 마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오경환은 의지를 불태우며 내가 말해 준 대로 열심히 낚싯대를 흔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오경환은 줄을 너무 많이 풀어 바닥에 채비를 질질 끌고 있었다.
아차 싶어, 그에게 릴을 두어 바퀴 감아올리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어어? 이거 입질 맞지요?”
뭔가 걸렸다고 싶었는지 오경환은 화들짝 놀라며 릴을 감기 시작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몹시 엉성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챈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뭐여? 나랑 걸린 거여?”
노인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경환의 채비가 물속에서 노인의 채비와 서로 엉킨 것이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어째 오늘 초짜들이 많이 왔다 싶더니 하필이면 내 옆에서…….”
노인은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직접 채비를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엉킴을 풀려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쪽가위를 꺼내 들고 있었다.
투둑!
결국 노인은 쪽가위를 꺼내 채비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 그가 끊어 낸 채비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것이었다.
무례한 행동이다.
옆 사람과 채비가 엉키는 일은 선상 낚시에서 다반사.
엉킨 채비를 푸는 사람이 자신의 채비를 절단하는 것이 낚시꾼들의 불문율이다. 그러나 노인은 당연히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듯 상대방의 낚싯줄만 싹둑 잘라 버린 것이다.
“조심 좀 하쇼. 초보 때문에 신경 쓰여서 낚시하겠나!”
“네네. 죄송합니다. 어르신.”
굽신거리는 오경환의 모습에 어쩐지 기분이 언짢아졌다. 문득 그의 측은한 모습에 겹쳐 내가 처음 선상 낚시에 도전했던 그 날이 떠올랐다.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제대로 낚시도 즐기기 못했던 쓰라린 기억이었다.
노인의 험악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면서 나는 오경환을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내 옆으로 붙어서 하세요. 그리고 채비를 약간 띄워야 해요. 계속 말하지만.”
“미안해요. 생각대로 잘 안되네요.”
그 후로도 노인이 오경환의 낚싯줄을 끊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두 번, 세 번…….
거참, 좀 심하시네. 한 번만 더 그러면 뭐라고 한마디 해야겠어.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은근히 노인에게 신경이 쓰여 좀처럼 낚시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럭저럭 오전 시간이 지나고 점심을 먹은 직후, 내게 세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히트!”
등 뒤에 고정된 카메라를 응시하며 나는 힘차게 릴을 감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거의 8짜에 가까운 민어였다.
휴우! 드디어 기본 목표는 달성했군.
내심 안도하면서 다시 채비를 정돈하고 있을 때였다. 노인이 채비를 거두는가 싶더니 내 쪽으로 성큼 다가오는 게 아닌가.
“왜? 여기 빈자리 아녀?”
“…….”
노인은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내 왼쪽에 서서 채비를 휙 던졌다. 내 근처에서 잘 나온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내 왼쪽이 빈자리는 맞지만, 자리를 옮겨 다니는 것 또한 그리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다.
어차피 배는 정박된 게 아니므로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법이다. 금방 물고기가 나온 자리라고 해서 다시 나온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안 그래도 신경이 쓰였는데 이젠 내 옆으로 오다니.
어쩔 도리는 없었다. 아니, 오경환이 아니라 내 옆자리라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어들이 다 어디로 도망간 거여? 어째 오늘은 이 모양인감?”
슬금슬금 내 쪽으로 다가오는 노인의 낚싯대.
결국 불상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왠지 이상하다 싶어 휘파람을 불어 보니 그의 채비가 나의 것과 달라붙어 있었다.
“어르신. 채비 올리세요. 저와 엉켰어요.”
“정말이여?”
나와 노인은 동시에 채비를 감아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또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나보다 빠르게 채비를 올린 노인이 올라온 두 쌍의 채비를 움켜잡더니 곧바로 싹둑 잘라 버린 것이다.
허공에서 힘없이 축 처진 내 낚싯줄을 바라보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부아가 치밀어 길게 심호흡을 내뱉으며 억누르려 애를 써야 했다.
연세가 지긋한 상대지만 한마디는 해야 했다.
“어르신! 남의 채비를 그렇게 말도 없이 잘라 버리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무신 소리여? 눈이 잘 안 보여서 대충 자른 건디. 노인이라고 괄시하는 겨?”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채비를 다시 매고 있을 때 노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네. 싫으면 지가 자리를 옮기든가.”
나보고 자리를 옮기라는 말이었다.
차라리 자리를 옮길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카메라를 고정시킬 적당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낚시에 집중하려 할 때, 두 번째 줄엉킴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릴을 감아 들이고 뒤엉킨 채비를 내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신속하게 노인을 줄을 툭 끊어 버렸다.
“자네 지금 뭐 하는 짓이여?”
“죄송합니다. 어르신 저도 노안이 일찍 왔나 봅니다. 내 것을 자른다는 게 그만.”
“지금 나를 놀리는 거여?”
“아닙니다. 그래도 불쾌하셨다면 다른 자리를 찾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인은 붉으락푸르락 분기를 내뿜으며 원래의 자리로 휙 돌아가 버렸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러하듯, 낚싯배에도 반드시 매너가 좋은 사람만 있지는 않다. 낚시를 하다 보면 지나치게 탐욕적이거나 몰상식한 행동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노인에 대한 내 언행 또한 치졸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녀노소와 무관하게 낚시꾼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예의를 말해 주고 싶었다.
“잘하셨어요. 내 속이 다 후련하네요.”
오경환이 다가와 귓속말로 소곤거렸을 때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조심하세요. 오경환 님 옆으로 갔으니까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설마요.”
다시금 낚시에 열중하던 나는 또다시 민어 한 마리를 끌어 올렸다. 총 네 마리. 나눔을 두 명에게나 할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한 일이지만 내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아버지를 위해 민어를 잡고 싶다는 또 한 명의 낚시꾼.
바로 나와 동행한 오경환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지켜보고 간혹 조언도 건네 보았지만, 역시 초보는 초보였다.
바닥을 읽지 못하고 계속해서 채비를 질질 끌거나 지나치게 띄우는 통에 물고기가 왔다가도 돌아갈 판이었다.
얻은 물고기보다 잡은 물고기를 원한다는 사내.
그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끝까지 낚싯대를 꼭 쥐고 있는 모습에서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초보 낚시꾼에게 첫 고기를 잡는 경험은 특히 소중하기 때문에 내 마음도 그와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선장의 멘트가 이번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흘려 보고 안 나오면 접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어렵겠군.
안타까운 눈으로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였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커다란 민어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대민어 한 마리가 내 발밑을 스치고 지나간다 싶었다. 휘파람을 길게 불며 확인해 보니 그것이 축 쳐진 오경환의 미끼를 덥석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닌가.
옳거니!
1미터는 됨직한 대민어였다. 낚시의 종료를 앞두고 벌어진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다.
먹성이 좋은 놈이었다. 미끼를 삼킨 채로 달아나려 하자, 오경환의 낚싯대가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몹시 당황한 그가 나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어? 뭐지? 이거 온 건가요?”
“왔어요. 얼른 감으세요!”
휘청거리는 낚싯대를 주체하지 못하고 오경환은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로 다가가 몸을 고정시키고 침착하게 릴링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좋아요! 그렇게만 올리면 됩니다. 천천히! 거의 다 왔어요.”
어어?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중간 부근까지 올라오던 민어가 갑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트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다른 힘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반사적으로 노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열심히 뭔가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우럭 님! 이게 왜 이러죠? 분명히 내가 끌어 올리고 있었는데.”
감격의 첫수에 쾌재를 부르던 초보 낚시꾼.
그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완전히 덮여 있었다.
두 사람의 채비에 걸린 민어.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잠시 후 벌어질 어두운 분쟁의 그림이 그려졌다.
“이야호! 대민어가 걸렸구나!”
노인의 환호 소리가 뱃전에 울려 퍼졌다. 그는 민어의 입가에 엉겨 붙은 채비를 민첩한 행동으로 뚝뚝 끊어 냈다. 그리고 거대한 물고기를 의기양양하게 번쩍 들어 몰려든 구경꾼들 앞에 흔들어 보였다.
선장이 달려와 노인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이고, 어르신! 축하드립니다. 오늘 최대어입니다.”
“이 정도면 수십만 원 나가겠지? 크하하.”
“그럼요.”
“하마터면 또 저 보초 애송이 때문에 놓칠 뻔했어. 이 귀한 대민어를 놓쳤어 봐. 아마 가만 안 놔뒀을 거여.”
그 순간에도 오경환에게 핀잔을 늘어놓는 노인의 모습에, 내 입가에는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노인과는 대조적으로 오경환은 나라를 잃은 듯이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끝에는 노인에 의해 잘려진 낚싯줄만이 힘없이 걸려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나는 눈알을 굴리며 방금 벌어진 사건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민어가 초보 사내의 미끼를 물고 늘어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팩트였다. 내가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간까지 올라오던 민어가 방향을 바꿨다.
그건 둘 중의 하나다. 먹성이 좋은 민어가 근처 바닥에 있던 노인의 미끼까지 물었든가, 아니면 노인의 늘어진 채비가 오경환의 채비에 엉켜 버렸든가.
“아따. 너무 커서 쿨러에도 안 들어가는구먼. 크하하.”
노인은 커다란 민어를 아이스박스에 대각선으로 쑤셔 넣으며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다. 오경환에게 최소한 50%의 지분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결국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는 굳은 얼굴로 노인에게 다가갔다.
“저어, 어르신. 제가 보기엔 그 민어의 주인이 아직 누구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뭐여? 점심에 나온 도시락이 뭐 잘못된 거여? 무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여?”
“분명히 제 일행이 입질을 받아 한참 동안 끌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내 줄을 걸었으니 그렇게 착각했겠지. 그 친구가 하루 종일 나를 성가시게 그랬던 거 못 봤어?”
“이번에는 바늘에 걸었던 게 분명했습니다.”
“그걸 어케 알어? 자네가 보기라도 했어?”
봤냐고? 그래 봤다.
그렇게 뱉어 버릴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묘안 하나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