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멀티싱커
점심 무렵이었다.
나는 베타와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지이잉~
침대맡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뛰어가 살펴보니 액정창에 ‘도라에몽’이라는 발신자의 이름이 흔들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남해에 다녀온 이후로 통 연락이 없어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도라에몽?”
“그래. 나야. 어제도 멋지게 해냈더구나.”
“고맙다. 근데 지금 어디냐?”
휴대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내가 물었다.
“지금 아지트로 가고 있는데 혹시 나올 수 있어?”
“당연하지.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멤버들에게 인사를 드리려고. 사실은 나 조만간 원주로 갈까 생각 중이야.”
“아…….”
인사? 원주집?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불길한 느낌은 틀리지 않았나 보다. 아예 떠나겠다는 말인가?
“부모님이 하시는 세탁소 일이나 좀 배워 볼까 해서. 엄마도 그만 내려오라고 하시고.”
“그, 그렇구나. 세탁소라고?”
“밥을 굶을 염려는 없다고 하시네. 먹고살려면 그거라도 해야지.”
결국 보람이는 꿈을 찾지 못하고, 현실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너무 급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차 키를 어디 두었더라?
전날 돌아와서 어디에 던져 놓았는지 차 키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밑까지 뒤져 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랍을 확 열어 본 순간.
또르르.
서랍 깊은 곳에서 굴러 나온 작은 물체가 내 눈길을 확 잡아끌었다. 지름 10밀리미터, 길이 20밀리미터 크기의 원기둥 형태의 쇳조각이었다.
이게 왜 여기서…….
쇳조각을 들어 올린 내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는 나도 알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보람이의 새로운 꿈이 되어 줄 수도 있겠다고.
* * *
쇳조각을 호주머니에 챙기고 나는 부리나케 집에서 달려 나왔다. 달리는 차 안에서 흥분한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아지트에 도착했을 때는 실내에 무거운 공기가 내려와 있었다. 보람이의 맞은편에 앉은 고동우와 장재준 영감은 침울한 표정에 빠져 있었다.
“어서 와라.”
보람이는 나를 보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앉자마자 고동우가 천정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도라에몽 님이 떠난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구나. 그동안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너는 알고 있었다면서?”
고동우가 물었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이런 얘기는 불필요하니까. 나는 보람이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보람이는 떠나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일할 거니까요.”
갑작스러운 내 말에 보람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른 두 사람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장재준 영감이 눈을 치켜떴다.
“그럼 어반자TV에서 함께 일한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보람이와 남해에 갔을 때, 그에게 어반자TV에서 함께 일해 볼 생각은 없는지 권해 볼까 몇 번을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보람이가 어반자TV에서 해야 할 역할이 없는 상황에서 그건 위선이자 동정일 뿐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절묘한 타이밍에 낡은 서랍 속에서 튀어나온 쇳조각.
이것이야말로 보람이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되어 줄 거라 확신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빨리 좀 말해 봐라.”
고동우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 사람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낚시 다닐 때 어디에 제일 많은 돈이 들어갈까요?”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는 말투로 고동우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야 선비겠지. 대부분 10만 원 안팎이니까.”
“그런 거 말고요. 낚시용품 중에서 말입니다.”
내 질문의 의도를 전혀 모를 보람이도 조심스레 답을 내놓았다.
“당연히 낚싯대지. 백만 원 넘는 것도 수두룩하잖아.”
아직은 아무도 정답에 근접하지 못했다. 그나마 장재준 영감이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았다.
“낚싯대나 릴은 한 번 사면 수년간 사용할 수 있죠. 내 생각에는 소모품 같군요. 내 경우에는 문어 낚시에 에기값만 족히 2만 원은 들어갑디다.”
소모품이라는 대답에 탄력을 받은 나는 술술 얘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의외로 소모품에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게 사실입니다. 제가 보람이에게 맡기려는 일이 바로 대표적인 소모품인…….”
멤버의 얼굴에 번지는 궁금증을 확인하면서 나는 탁자 위에 작은 쇳조각을 내려놓았다.
“봉돌입니다!”
멤버들의 눈동자가 동시에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잠시 후 보람이가 내가 꺼내 놓은 물건을 집어 들었다. 쇳조각의 위쪽에 암나사가, 아래쪽에는 수나사가 파여 있었다.
“처음 보는 봉돌인데?”
보람이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처음 보는 봉돌일 수밖에 없다. 그걸 만든 장본인인 나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까.
대략 2년 전의 일이었다.
회사 입사를 앞두고 홀로 떠난 출조에서 낭패를 겪은 나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내친김에 동대문으로 달려가 시제품을 만들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후 내가 회사에 입사하여 바쁜 일상에 파묻히는 바람에 그 아이디어는 서랍 속에 봉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이지. 서로 연결해서 쓸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분리 조합형 봉돌이니까. 가칭 만능봉돌이라고 해 두자.”
만능봉돌이라는 내 표현에 멤버들은 돌아가며 물건을 살피기 시작했다. 고동우가 아직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이것저것 캐묻고 나섰다.
“분리 조합형이라면 무게를 조절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5호, 10호, 20호 요렇게 세 개의 기본 단위만 가지고 서로 결합해서 쓰는 방식입니다.”
“아이디어 상품인 것 같기는 하네. 그런데 시중에 아직 이런 제품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납추 사용이 법으로 금지된 게 근래의 일이었으니까요. 납추가 워낙 싸니까 굳이 가공할 생각도 안 했지만, 뭉그러지는 특성 때문에 가공할 수도 없었던 겁니다.”
내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낚시꾼들은 한 번 출조할 때마다 평균적으로 오천 원 내지는 만 원 안팎의 봉돌을 구매한다. 물론 서투른 낚시꾼일수록 더 많은 봉돌을 사기 마련이다.
대상어마다 봉돌의 규격도 다르다.
쓰고 남은 봉돌은 다음 출조에 재활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집구석에서 녹슬다가 버려지는 경우가 다반사. 연결해서 쓸 수 있는 봉돌이 세상에 나온다면 그런 일은 획기적으로 줄어들 수 있을 거라 나는 확신했다.
어느덧 고동우의 얼굴에서 의심의 빛은 자취를 감췄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듣고 보니 괜찮은데?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나라면 사겠어. 낚시 갈 때마다 어떤 봉돌 챙겨 갈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잘만 하면 대박 아이템이 될 수 있겠는데?”
그때 난데없이 장재준 영감의 날카로운 질문이 튀어나왔다.
“연결해서 쓸 수 있다는 점은 분명 획기적입니다. 그렇지만 낚싯줄에는 어떻게 연결하죠? 고리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였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그냥 즉흥적인 생각을 늘어놓았다.
“고리부를 따로 만들어 맨 위에 끼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무게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면 플라스틱으로 말입니다.”
“재질이 약해서 가능할까요? 캐스팅을 하거나 바닥에 부딪히면 깨지기 쉬울 텐데요.”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보람이가 테이블에 놓인 봉돌을 거꾸로 뒤집었다. 수나사가 위로 향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잖아. 수나사를 위로 향하게 하는 거야. 물론 2밀리 정도로 나사 두께도 줄어야 되겠지. 거기에 1밀리 크기의 구멍을 빵 찍으면…….”
내 판단이 옳았다.
보람이가 이 물건을 세상에 내놓을 적임자임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겠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멤버들의 칭찬에 보람이는 쑥스럽게 웃으며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좋은 아이디어 같구나.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낚시를 좋아하고, 채비를 잘 만들고, 손재주가 출중한 친구는 너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넌 금속가공업체에서 10년을 일했던 베테랑이니까.”
그보다 더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았다.
내 눈빛에서 진심을 발견한 보람이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고개를 푹 숙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이건 네가 만든 아이디어잖아…….”
“낚시용품을 만드는 게 네 꿈이라고 하지 않았어? 물론 나도 함께하는 거야. 나는 방송쟁이니까 뒤에서 너를 도울 수 있어.”
보람이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아지트로 달려오는 동안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보람이는 자존심 강한 녀석이다. 그런 그를 효과적으로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결론은 도와 달라고 말하는 방법뿐이었다.
어반자TV도 아직 궤도에 올리지 못한 상황에 조구 제조업까지 진출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하나 친구를 붙잡으려면 일단 벌여 놓고 매달리는 것이 최선이다.
내 말투는 한층 더 부탁 조로 바뀌었다.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원가도 뽑아야 하고, 시제품도 만들어야 하고. 난 잘 모르는 분야니까 네가 전적으로 맡아서 해 줘.”
“…….”
“어반자TV의 자회사를 설립할 계획이다. 아직은 자금이 충분치 않으니까 처음에는 외주 제작으로 시작해 보자고. 하지만 나중에 돈이 생기면 직접 제작도 하는 거지.”
“…….”
마음을 진정시킨 보람이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내며 내게 말했다.
“나를 위해 만들어 준 일이라는 거 안다. 하지만 상관없어. 늘 꿈꾸던 일이었으니까. 돕는 게 아니라 내 일처럼 해 보겠어. 고맙다.”
보람이의 말투에서 결연한 의지가 배어 나왔다.
멤버들은 모두들 박수를 치며 그의 결정을 축하해 주었다.
한참 후 분위기가 느슨해지자 보람이는 신제품의 원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추가 가공이 들어가니까 기존 제품보다 원가가 높을 수밖에 없어. 대략 CNC 가공으로 대량 생산하면 기존 제품과 비교해서 10% 정도 올라갈 거야.”
“그 정도면 상관없어. 구피 님은 조금 비싸도 사겠다는 의견이었잖아. 내 생각은 달라. 아예 똑같은 가격으로 가는 거지. 마진은 약간 적더라도 시장을 석권할 수 있을 거야.”
기대를 섞은 나의 포부였다. 그리고 장재준 영감도 같은 의견이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솔직히 같은 가격이라면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도금을 해서 미관도 고려하자고 고동우가 말했고, 아예 세트 상품으로 만들어 간편하게 휴대하게 하자는 보람이의 생각도 보태졌다.
누군가가 아지트로 들어선 것은 바로 제품명을 뭐로 할지에 대해 분분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던 그때였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사심희였다. 그녀는 고동우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녀 또한 우리 피싱 어벤저스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근데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도라에몽 님이 어디로 가신다고요?”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바라보던 우리들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잠시 어리둥절했다. 이미 상황이 바뀐 마당에 적절한 대답을 찾은 사람은 고동우였다.
“좋은 회사 사장으로 간대. 축하하려고 모인 거야. 하하하.”
“좋은 회사요? 그렇게 좋은 일인데 구피 님 목소리에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회사인데요?”
“바로 이걸 만드는 회사라는구만.”
고동우가 장난스럽게 테이블에 놓인 쇳조각을 사심희에게 건네주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이죠?”
“가칭 만능봉돌이라고 한대. 낚시추인데 서로 결합해서 다목적으로 쓸 수 있고.”
“그래요? 그럼 영어로 멀티싱커…… 란 뜻이군요.”
멀티싱커.
사심희가 무심히 내뱉은 이름이었다.
“멀티싱커? 거 괜찮은데?”
“오호! 제품명은 그걸로 하면 되겠군요.”
제품명을 고민하던 우리들이 만장일치로 ‘멀티싱커’를 채택하는 순간, 사심희는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깜빡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