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시그니처
민어.
충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떠올린 그것은 아버지를 위한 물고기의 이름이었다.
허나 지금은 6월이라는 시기적 문제가 있다.
민어는 7월은 되어야 서해 남부 해안을 중심으로 본격 시즌이 시작된다.
서두를 것은 없다. 7월이 되는 대로 나는 민어를 잡으러 갈 것이다. 아버지를 위한 출조는 그렇게 다음 달로 미루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그보다 내 머릿속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고민거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뒤로 마음은 가벼워졌지만 묘하게도 어깨가 한층 무거워졌다.
어반자TV.
불과 두 달 만에 비약적인 성과를 올렸다. 유료화에 성공했고, 이제는 거의 평균적인 낚시채널의 지위에 성큼 올라와 있다.
이대로 안주해서는 안 된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법인을 설립하고, 직원까지 영입하고, 심지어 사무실까지 얻은 것은 더욱 큰 그림을 염두에 둔 준비였다.
진지하게 새로운 도약을 고민할 시점이 왔다.
멋진 픙경, 진한 손맛, 그리고 최고의 요리를 선보이는 것으로 과연 충분할까?
뭔가 나만의 차별화 포인트를 추가할 수는 없을까?
어반자TV하면 떠올릴 수 있는 내 방송만의 시그니처는 무엇일까?
그렇다! 나는 물속을 볼 수 있다.
분명히 남들보다 우월한 조과를 낼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나만이 가능한 포인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만은 또렷했다.
판교 톨게이트 근처에서 나는 별안간 차를 돌렸다. 혼자 고민하기 보다는 멤버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졌다.
아지트에는 늘 그랬던 것처럼 장재준 영감과 고동우가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들어선 나를 보고 고동우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충주에 간다더니 벌써 온 거냐?”
“예. 지금 올라오는 길입니다. 저 그런데…….”
장재준 영감은 은밀해진 내 목소리에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모양이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고민은 아니고요. 어반자TV만의 어떤 색다른 콘텐츠가 없을까 해서요.”
“지금도 잘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낚시의 3대 즐거움을 고루 담아내고 있잖아요.”
“그건 다른 방송들도 대강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어요.”
“흠……. 더 잘해 보고 싶다는 말이군요.”
장재준 영감이 생각에 잠기고 나자, 고동우가 끼어들었다.
“요즘 부쩍 잘 잡잖아. 아예 마구마구 잡는 컨셉으로 차별화해 보는 건 어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이미 정리를 끝낸 문제다.
어시장을 방불케 하는 마구잡이 사냥은 나와 시청자 모두를 즐겁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이건 어때? 내기 낚시나 대결 낚시를 하는 거야.”
“내기 낚시요?”
“대중들은 승부에 열광하지. 예술의 영역까지 등수를 매기는 세상이잖아.”
연거푸 거절하면 고동우가 실망할 것 같아 머뭇거리고 있을 때 장재준 영감이 정리를 해 주었다.
“좋은 의견이지만 승부에 대한 집착이 낚시의 즐거움을 훼손할 수 있어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콜라보라면 모를까.”
“아이고,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요? 조회 수만 올라가면 그만이지.”
세 사람이 한참 동안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그렇지만 뾰족한 해답이 나오지 않자, 고동우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다음 출조는 어디로 갈 건데?”
“당장은 한치를 생각하고 있어요. 7월에는 민어를 생각하고 있고요.”
“민어? 요즘 몸이 좀 허해지셨나? 젊은 사람이. 하하.”
“제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한테 보내 드릴까 해서요.”
“오오, 은근히 효자일세. 덕분에 우리도 간만에 몸보신 좀 하는 건가? 하하하.”
아버지와 민어!
아아. 어쩌면 그게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또 올게요.”
부리나케 아지트를 빠져나가는 나를 두 사람은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차의 시동을 켜고 달려가는 동안 내 생각의 고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원점으로 돌아왔다.
물속을 보는 나의 능력.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탁월한 조과를 선보일 수 있다. 간혹은 절제의 경계를 넘어 많이 잡을 경우도 많았다.
내가 잡은 물고기에 즐거움 말고도 다른 의미를 부여할 방법은 없을까?
언젠가 마릿수의 대광어를 잡고 허탈해하고 있을 때 장재준 영감과의 대화 직후부터 싹트기 시작한 숙제였다.
해답의 실마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민어였다.
내가 아버지를 위해 민어를 원하는 것처럼 다른 누군가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물고기를 절실하게 원하고 있을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을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거다!
이참에 본격적인 나눔 낚시를 표방하는 거다.
나와 독자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낚시.
높은 조과가 가능하다는 나의 장점을 살리면서 손맛에 새로운 의미를 더할 수 있는 낚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집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책상에 앉아 실행에 돌입했다.
“음음.”
책상 위에 고정시킨 카메라 앞에 앉아 나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조금은 긴 얘기를 시작했다.
“어반자TV를 사랑해 주시는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우럭입니다. 앞으로 저의 방송에 작은 변화가 생겨 이렇게 번외편으로 공지드리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급해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목이 말랐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카메라를 응시했다.
“앞으로는 다음 편의 출조 대상어가 정해지면 지금처럼 번외로 미리 예고하겠습니다. 이유는 조과물의 나눔을 위한 목적입니다. 참고로 다음 출조는 한치 낚시입니다. 생물 한치가 필요하지만 구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분들은 제 이메일로 사연을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먹방에 필요한 양을 제외하고는 꼭 필요로 하는 분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일단 해야 할 말은 다 한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마치려 하니 덧붙여야 할 말이 떠올랐다.
“낚시꾼이다 보니 충분한 양을 드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매회 최소한 한 분께는 꼭 보내 드리겠다고 감히 약속드립니다. 우리 어반자TV 애독자분들은 모두 양보의 미덕을 갖추신 분들이라 믿습니다. 선정되지 못하시더라도 미리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매회 최소한 한 분께는 보내 드린다는 약속.
돌려 말하면 절대로 꽝을 치는 방송은 없을 거라는 은근한 자신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약속이었다.
즐거움을 위해 잡은 물고기.
그것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위해 쓰일 수 있다면 단지 손맛의 의미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 만났던 맹인 노인이 손맛에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담지 않았던가.
새롭게 시도하게 된 나눔 낚시.
나는 그것이 어반자TV만의 시그니처가 되어 줄 거라 굳게 믿었다.
* * *
이틀 후.
아지트에 들어가 보니 고동우가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럭 님! 그럴 수 있는 거야? 앞으로 공짜 생선 얻어먹을 수 없게 됐잖아.”
“아이고, 구피 님도 참. 우리 멤버들에게는 제일 먼저 맛있는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먹방이 있잖아요.”
“일전에 대물 참돔을 남에게 선뜻 넘겨줄 때 알아보긴 했지만. 아휴.”
소파에 앉아 있던 장재준 영감은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준다지 않습니까? 구피 님이나 나는 언제든지 바다에서 꺼내 오면 그만이지요.”
“농담입니다. 농담! 하하하.”
내가 소파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자, 화두는 곧바로 한치 낚시로 바뀌었다. 장재준 영감은 어디로 갈 건지부터 물었다.
“낼모레 한치 낚시는 어디로 가십니까?”
“여수 국동항에 예약을 해 놓았어요.”
“여수라……. 밤낚시인 거는 알고 있죠?”
“네. 사실은 그래서 한치로 정한 거예요.”
그동안 나는 한 번도 야간 낚시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환하게 집어등을 켜 놓고 암흑의 바다에서 펼쳐질 풍경이 무척 궁금했다. 이번 출조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펼치게 될 갈치, 볼락 등 야간 낚시에 대비한 전초전이 될 예정이었다.
연세가 지긋한 장재준 영감은 젊은 사람들 못지 않게 예리하다. 그는 이틀 전 내가 올려놓은 한치 예고편의 숨은 의미를 간파하고 있었다.
“허어, 그런데 참 대단한 자신감이더군요.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오는 출조는 절대 없을 거라는 의미가 아닙니까.”
고동우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러네. 요즘 부쩍 실력이 늘은 건 맞지만. 그러다 못 잡으면 어쩌려고?”
“글쎄요. 이왕 좋은 일을 시작했으면 저도 노력해야겠지요. 하하.”
나는 좀처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내 레이더망에 물고기가 전혀 없지 않는 한, 발밑에 있는 대상어를 놓칠 일은 없을 테니까.
고동우가 식은 커피를 들이키며 내게 물었다.
“나눔 요청 메일은 좀 오더나?”
“생각보다 많이 오고 있어요.”
“아직 대상자를 정하지는 못했겠지? 나도 신청해도 될까?”
“하아, 구피 님도 참. 아직 신청 받고는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이번에 좀 많이 잡아야 할 것 같아요.”
“벌써? 도대체 어떤 사연이길래…….”
“두고 보시면 압니다.”
나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의 표정으로 보아, 이번 출조에는 같이 갈 의향은 없어 보여, 굳이 묻지는 않았다.
“참! 이번 먹방 촬영은 아지트에서 못 하고, 현지에서 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조심히 잘 다녀와요.”
“에엥? 이런 비보가 있나.”
울상을 짓는 고동우를 뒤로하고 나는 아지트를 나왔다.
제일 처음에 도착한 나눔 요청 메일.
아직 출조까지는 이틀이나 남았지만, 나는 그 메일의 발송자가 첫 나눔의 수혜자가 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 * *
다시 이틀 후, 안양 모처의 대형 주차장.
사심희와 만난 시각은 오전 9시경이었다. 대형 농수산물 마트에 딸린 주차장이었다.
“사시미 님! 잘 지냈어?”
“덕분에요. 오늘은 편하게 다녀오겠네요. 베타도 잘 지냈니?”
귀에 익은 목소리에 베타가 백팩 투명창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예전에 갑오징어에게 쏘였던 먹물 자국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야간 낚시라서 아침에 출발하는 것도 큰 변화였지만, 오늘은 버스 출조를 선택했다. 나야 상관없지만 먼 거리를, 그것도 밤샘 낚시를 하고 돌아오는 일은 사심희에게는 무리라고 판단했다.
“억지로라도 자 둬. 밤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알았어요. 휴게소 도착하면 깨워 줘요.”
버스에 오르자마자 사심희는 눈을 붙였다. 나는 딱히 잠도 오지 않고 해서 휴대폰으로 이메일을 검색했다.
불과 두 시간 만에 또 2통의 요청 메일이 들어와 있었다.
조만간 시아버지 회갑 잔치에 한치회 무침을 놓아 드리고 싶다는 며느리.
군 생활 중인데 내무반 동료들과 한치회 파티를 열고 싶다는 말년 병장.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기껏해야 서너 건의 신청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벌써 20여 통의 이메일이 날아왔다.
내용 또한 나름 꼭 필요한 이유가 명확했다. 그러나 아직도 첫 번째 메일을 압도할 만한 신청 건은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부담감과 새로운 낚시에 대한 설렘으로 여수 국동항에 도착한 시각은 점심 무렵이었다.
인근 식당에서 버스 출조비에 포함된 식사를 마치고, 22인승 낚싯배에 올랐다.
갈치 낚시 전용선이라는 Y호.
항구에는 갈치가 뜸한 시기를 이용해 한치를 잡으러 떠나려는 배들이 늘어서 있었다.
오후 3시.
배가 출발했다. 선장은 장장 4시간의 긴 항해가 될 테니 모두 선실로 들어가 자라고 했다.
“네 시간이나요? 설마 제주도까지 가는 건 아니겠죠?”
사심희가 혀를 내둘렀지만 수일간 여러 한치 조행기들을 탐독했던 나로서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선실로 가서 쉬자. 밤에 멋진 폭죽놀이를 보여 줄 테니까.”
“폭죽놀이요?”
“한치가 만들어 내는 폭죽이 있다고 하네.”
선실에 누워서도 눈은 말똥말똥.
장재준 영감과 고동우가 왜 따라오겠다고 하지 않았는지 대강 알 것 같았다. 서울에서 가려면 포인트까지만 해도 무려 반나절 이상이 걸리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다들 준비하세요.”
포인트에 도착했다는 선장의 멘트에 밖으로 나와 보니 서쪽 바다로 해가 잠기고 있었다,
내 자리는 선미 구석의 10번.
9번의 사심희가 낚시를 하지 않으니, 넓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선장과 사무장이 분주히 풍닻을 내리는 동안 나는 장비 세팅에 여념이 없었다.
소위 이카메탈 채비.
한치 전용이라는 수박색 에기 하나와 봉돌을 겸한 알록달록 에기 하나를 매단 2단 채비였다.
로드는 연질의 한치 전용대가 좋다고 들었지만, 나는 그냥 평소에 쓰던 주꾸미대를 들고 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3단이나 4단 채비에 번쩍거리는 형광 물체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전의에 불타고 있었다.
삐이!
낚시의 시작. 모두들 앞다투어 채비를 담그는 가운데 나는 물속으로 은은한 휘파람을 불어넣었다.
제철을 맞아 물 반 한치가 반일 거라는 6월 중순.
선장이 제대로 포인트를 짚은 모양이다. 수심 15미터 아래에 몇 마리의 한치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 집어가 되지 않을 시간임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조짐이었다.
33명이라고 했던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나는 배의 난간 너머로 채비를 툭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