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낚시로 인생 역전-15화 (15/130)

[제15화] 법인 설립

다음 날 아침, 아니 거의 정오경.

나는 소고기 스프를 만들어 베타와 나눠 먹었다. 전날 출조와 동영상 작업의 여파로 느긋한 아침을 시작했다.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초인종 벨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등기 우편입니다.”

웬 등기 우편인가 했더니, ‘면허증 재중’이라 적힌 봉투였다.

드디어 왔구나.

동력수상레저기구 조종면허. 봉투 안에서 번쩍거리는 플라스틱 카드를 꺼내 들고, 나는 조만간 바다에서 직접 보트를 몰고 있을 내 모습을 그려 보았다.

때마침 아지트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장재준 영감도 와 있으니, 별일 없으면 와서 커피나 마시고 가라는 고동우의 전갈이었다.

아지트가 생긴 이후로 장재준 영감은 사랑방 드나들듯이 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 별로 할 일도 없었지만, 다음 출조에 대한 의견을 나눌까 겸사겸사해서 나는 베타와 함께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 생각난 것이 있어 마트에도 들렀다.

새로운 파트너가 마음껏 요리의 장을 펼칠 도구들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아지트에 있는 건 달랑 라면 냄비 하나와 낡은 도마가 전부였다.

“어서 와요. 안 그래도 혼자 적적했습니다.”

“구피 님은 아래층에도 없던데 어디 가셨나 봅니다.”

“잠깐 외출한 거 같아요. 커피?”

“조금 이따가 마시겠습니다. 우선…….”

나는 자리에 앉기 전에 먼저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그 짐은 다 뭔가요?”

“요리 도구들이 부족해서요. 오는 길에 좀 사 왔습니다.”

전기밥솥, 프라이팬, 냄비, 도마, 심지어 설거지 세제와 수세미까지. 나는 새로 사 온 주방용품들을 주방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고 소파로 돌아왔다.

“파트너가 생겨 책임감이 더 커진 모양입니다.”

“그럼요. 기본적인 것들은 제가 구비해 놓아야지요. 주방도 공짜로 쓰고 있는데.”

“어허. 구피 님이 들으면 서운해하겠습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장재준 영감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커피 잔을 건네주었다. 그가 타 준 믹스커피를 마시면서 나는 자랑스럽게 지갑에서 면허증을 꺼내 들었다.

“이게 뭡니까?”

“오늘 보트 면허증이 나와서 자랑하려고 가져왔어요.”

“이야. 축하할 일이 매일 생기는군요. 올해 아홉수라고 하더니 다 헛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그때였다. 드르륵 문을 열고 고동우가 들어왔다.

“두 분이 뭔 밀담을 그렇게 나누고 계세요?”

“밀담은요, 면허증 자랑하고 있었어요.”

“아, 이거. 나도 10년 전에 땄지. 그런데 보트라도 한 대 사려고?”

“어휴. 제가 지금 돈이 어디 있습니까? 하루 빌려서 하면 모를까. 안 그래도 캡틴 님께 보트 출조할 만한 곳을 여쭤보려던 참이었어요.”

자연스럽게 세 사람이 마주 앉아 다음 출조에 대한 의견을 나누게 되었다. 장재준 영감이 먼저 운을 떼었다.

“보트 출조를 하고 싶다고요? 대상어가 뭡니까?”

“이번에는 따로 정하지 않으려고요. 바다를 질주하며 포인트도 내 마음대로 정하고, 다양한 물고기를 잡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굳이 컨셉을 말한다면 ‘자유’라고 할 수 있죠.”

“흐음. 그것도 한 편의 괜찮은 낚시가 될 것 같군요. 그럼 어디가 좋을까…….”

장재준 영감이 생각에 잠긴 사이 고동우가 끼어들었다.

“쇠뿔도 단 김에 빼겠다는 거구나. 그래 장롱 면허가 되기 전에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저번에 갔던 거제도 쪽이 어때?”

“거제도요? 거긴 너무 멀지 않나요?”

“뭐 어때? 서해 쪽이야 지금은 우럭이나 광어가 빤하잖아. 저번에 멀리서 봤던 한려 수도를 이번에는 코앞에서 감상해 보는 거지.”

장재준 영감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고 나섰다.

“그거 좋겠군요. 어차피 보트야 현지에서 임대하면 되고. 거제도도 좋지만 근처의 통영이 어떻습니까? 요즘 봄철이라 다양한 어종들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만.”

멤버들은 늘 나의 고민을 씻어 주는 해결사들이다.

더 들어 볼 필요도 없이 나는 다음 출조지를 통영으로 정했다.

“너무 좋습니다. 두 분 정말 고맙습니다.”

“다만…….”

장재준 영감은 아직 할 말이 남은 듯했다.

“초보 운전이 쉽지 않을 겁니다. 그것도 낯선 곳에서.”

“맞아.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했어.”

면허를 따자마자 직접 보트를 몰겠다는 내 계획에 두 사람 우려가 앞서는 것 같았다. 장재준 영감이 선뜻 동출에 나서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럼 나도 같이 갑시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정말이십니까? 그렇게만 해 주시면 저야 너무 든든하죠.”

고동우도 귀가 솔깃했는지 일정을 물었다.

“언제 갈 건데?”

“낼 모레쯤이 날씨도 좋고 물때도 좋던데요. 수요일 정도?”

“그럼 안 되겠네. 두 분이서 잘 다녀오세요. 저는 가게에 묶여 있는 몸인지라. 대신 좋은 거 잡으면 바로 여기 아지트로 달려오는 거다.”

“그럼요. 하하.”

모든 계획이 정해진 순간, 문득 보람이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평일이라 같이 갈 수는 없지만 전화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신호음이 시작되고 한참 만에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도라에몽?”

“아…… 우럭이구나. 그날 우럭 잘 먹었다며?”

“우리끼리 먹어서 미안하더라.”

“새로 방송 파트너도 구했다면서? 그 사시미라는…….”

“들었구나. 그렇게 됐어. 이번 주 수요일 저녁에 아지트로 올 수 있어? 남도의 물고기들을 싹 잡아 올 계획이거든.”

“아……. 글쎄다. 시간을 한번 맞춰 볼게. 잘 다녀와라.”

전화를 끊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원래 말수가 적은 친구이지만, 어딘가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니면 야근에 지친 건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나는 남아 있는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사시미 님에게도 출조 날짜를 알려 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렇군요.”

장재준 영감의 말에 내려놓았던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그녀와의 통화는 처음이라 슬쩍 긴장이 되었다.

“우럭 님? 어제 잘 쉬셨나요?”

그녀의 쾌활한 목소리.

어색한 분위기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내고 말았다.

“네. 이번 주에 조금 멀리 출조를 갈 예정인데 괜찮으실까요?”

“어디로요?”

“통영에서 보트를 임대할 계획입니다.”

“좋아요. 그런데 어제 말 편히 하기로 약속하지 않으셨나요?”

“제가 성격이 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런데 언제 출발인가요?”

“낼모레 수요일 어떠십니까?”

“딱이네요. 제가 내일 기차로 부산 외삼촌댁에 갈 계획이거든요. 잔짐이 남아 있어서요. 모레 아침이면 합류할 수 있어요.”

역시 시원시원하다.

되면 된다, 안 되면 안 된다, 너무나 분명해서 좋다.

그녀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니까 고동우가 통영에서 요즘 나오는 물고기들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쏨뱅이는 꼭 잡아 와야 해. 매운탕거리로 최고거든. 운이 좋으면 붉바리나 한 마리 턱 걸리면 좋겠지만 그건 그림의 떡일 테고.”

“붉바리요?”

“횟감으로는 최고라 할 수 있지. 한 점에 만 원이나 되는 고급 어종이야. 하긴 잡고 싶다고 잡을 수 있는 흔한 물고기가 아니니까…….”

장재준 영감도 붉바리를 잡아 본 적은 없지만 먹어 본 적이 있다며 군침을 삼켰다. 은근히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다.

“아차차!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가 볼 데가 있어서요.”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지막으로 장재준 영감과 수요일 약속 시간을 정하고 나는 아지트를 빠져나왔다.

* * *

하남을 출발한 나는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고, 판교역 부근에서 차를 멈췄다.

상금을 타면 캣 타워를 사 주겠다는 베타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예전에 출퇴근하던 거리에서 펫 숍을 봤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린 시각인지라 빌딩 입구마다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양떼들처럼 빠져나오고 있었다.

한때는 나도 저 무리들 틈에 끼어 있었지.

그러고 보니 회사를 그만두고 불과 한 달이 지났는데도 까마득하게 먼 일처럼 느껴졌다.

묘한 감상에 젖어 건물 모퉁이를 돌고 있을 때였다.

“강유록 씨? 맞지? 이게 얼마 만이야? 하하.”

식당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회사에서 같은 팀에 근무하던 선배였다.

“아! 대리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강유록 씨가 없는데 잘 지낼 턱이 있나? 마침 잘됐어. 함께 들어가자고. 지금 우리 팀 회식 중이거든.”

그가 손가락으로 식당 안을 가리켰지만 나는 약간 망설여졌다. 사람들이 보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즐거운 그들만의 자리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가기 없기야. 오늘 정 과장님 환송회거든. 대만 법인으로 주재원을 나가게 되셨어. 유록 씨 보면 반가워할 거야.”

“……알겠습니다.”

마지못해 그의 손에 끌려갔다. 아주 잠깐 인사만 드리고 나올 생각이었다.

초저녁인데도 안에는 팀원들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동자들 안에는 반가움 내지는 호기심이 가득 차 보였다.

고개를 내밀고 누군지 나는 살펴보던 팀장이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치켜떴다.

“이게 누구야? 행복을 찾아 떠나신 강유록 선생님이 아니신가?”

“많이 취하셨군요.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팀장의 말에는 약간의 조롱이 섞여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의 곱지 않은 눈빛에 가슴이 쓰렸겠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일관성 있는 그의 태도가 갸륵해 보이기까지 했다.

“얼굴이 더 새카매졌군. 낚시 다니느라 아주 즐겁겠어. 그래, 밥은 먹고 댕기나?”

“하하. 그럼요.”

“낚시가 무슨 밥을 먹여 준다고. 번듯한 회사 명함도 없이 무슨 행복이냐 이 말이야. 쯧쯧.”

계속 비아냥거리던 팀장이 내 앞으로 불쑥 잔을 내밀었다.

“등에 지고 있는 고양이는 또 뭐야? 요즘 백수들 컨셉인가? 우하하하!”

나는 가만히 그가 내민 빈잔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가득 소주를 따라 주며 말했다.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십시오.”

기분이 상한 건 사실이지만, 꼭 그래서 일어난 것만은 아니었다. 나의 꿈을 이해하지 못할 그들에게,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근처의 펫 숍에서 캣 타워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베타와 부랴부랴 저녁 식사를 해치웠다.

설거지를 마치고 뭘 할까 궁리하던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무심코 유튜브 창을 연 순간이었다.

나는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느 정도 좋은 반응은 예상했지만 혁명적 변화가 벌어져 있었다.

구독자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1만 명에 가까워져 있었다. 전날 밤에 올려놓은 동영상의 조회 수는 하루 만에 10만.

퇴사 후에 올린 영흥도 대광어 편과 참돔 거제도 편은 이미 50만을 훌쩍 넘겼다.

유튜브 수익 정산의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얼마가 나올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얼마가 되었든 조만간 첫 수익금이 나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때였다.

문득 팀장의 조롱하는 듯한 말들이 귓가를 맴돌기 시작했다.

‘번듯한 회사 명함도 없이 무슨…….’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 버린 종이 쪼가리. 꼭 그것이 갖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불현듯 어떤 회사가 번듯한 회사인지 보여 주고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날 밤 뜬눈으로 누워 있던 침대 위에서, 나는 법인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의 몸담고 있는 곳과는 너무나 다른 나만의 회사.

형식적인 보고서도 없고, 정해진 근무 시간도 없으며, 심지어 매일 나오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회사.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집 근처의 법무사 사무실을 찾았다. 약간의 생활비만 남기고 통장에 남은 돈을 모두 자본금으로 털어 넣었다.

주식회사 어반자TV.

나의 첫 회사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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