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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로 인생 역전-14화 (14/130)

[제14화] 사시미

목구멍으로 넘기기도 아까운 초밥을 씹을 때, 내 머리를 압도한 단어는 ‘화룡점정’이었다.

화려한 퍼포먼스에 이은 완벽한 맛의 세계.

눈이 번쩍 뜨였다. 머릿속에는 먹방에 대한 그동안의 고민들을 단숨에 날려 버릴 기회가 왔다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보통의 먹방을 흉내 내어 엄청난 양으로 승부하거나 억지 감탄사를 연발할 필요도 없다.

구경하는 것만으로 군침을 돌게 만드는 퍼포먼스와 그저 한 젓가락 입에 넣는 순간의 표정만으로 충분한 먹방.

바다의 맛을 오롯이 전달하면서 동시에 다른 방송과는 차별화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이 급해졌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결국 숫기가 없는 나로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애꿎은 젓가락만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얼빠진 듯한 내 얼굴을 살피던 장재준 영감이 내 의중을 꿰뚫은 모양이다. 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덕분에 저희들 입이 호강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초밥을 그렇게 뚝딱 만들어 내시다니.”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에요.”

“요리 일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아직은 배우는 단계예요. 아빠가 미국에서 퓨전 한식당을 운영하고 계시거든요.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배우다가 저도 요리 학교를 나왔고요.”

역시 그랬다. 내 추측이 틀렸다.

그 순간 깨톡 프로필 사진에서 봤던 요리사는 그녀의 부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69’라는 숫자는 생일이었을까? 출생 연도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 한국에는 어떻게 오시게 된 겁니까?”

“사실은 여행 중이에요. 학교를 졸업하고 딱 2년 동안만 한국에 가 있기로 부모님과 약속했거든요.”

“그럼 곧 미국으로…….”

조만간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튀어나올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제 딱 일 년 남았어요. 아직 한국에 못 가 본 곳도 많고요. 그때까지는 열심히 돌아다녀야죠.”

휴우~

일 년이라면 그리 적지 않은 시간이다. 일단은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 나중의 일은 나중에 고민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제 방송은 어떻게 보시게 된 건가요?”

“아! 그거요? 한국의 해산물에 대한 관심으로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예상대로였다.

문득 정말로 낚시에는 관심이 없는 건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단순히 해산물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면 다른 요리 방송도 수두룩했을 텐데요.”

“맞아요. 하지만 아까 제게 주셨던 그런 자연산 우럭은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없으니까요.”

“아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5짜 우럭은 어부가 아니라면 낚시꾼들만이 접할 수 있는 귀한 물고기임에 틀림없다.

“그럼 낚시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씀인거죠?”

“……네. 낚시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역시 그렇군.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문제였다. 내 얼굴에서 약간 실망한 기색을 느꼈는지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식재료만 구경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한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절경들이 담겨 있더군요. 특히 최근에…….”

“아아, 거기요?”

“네. 거제도 어디 갯바위라고 하던 것 같던데. 덕분에 눈으로 대리만족할 수 있었죠. 전 바다 풍경을 몹시 좋아하거든요.”

작은 희망의 불씨가 확 타올랐다.

낚시는 아니더라도 바다를 좋아한다면 그래도 일단 의사는 물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어, 혹시…….”

“네? 말씀하세요.”

“혹시 말입니다. 제가 하는 방송에서……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저와 방송을 함께하실 생각이…….”

이런 바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아 계속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그런데 잠시 뒤 그녀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진심이세요? 이런 우연이……. 사실은 저도 오늘 뵙게 되면 한번 부탁이나 드려 볼까 했었거든요.”

“헉!”

세 명의 남자들 입에서 동시에 비명이 튀어나왔다.

“뭘 그리 놀라세요? 찾아가기 어려운 멋진 곳도 구경할 수 있고, 귀한 생선도 얻어먹고. 오히려 제가 감사한 일인데요.”

“…….”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장재준 영감이 분위기 정돈에 나섰다.

“좋은 음식 놔두고 뭣들 합니까? 천천히 먹으면서 얘기를 나눠 봅시다.”

그녀가 선뜻 나서 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벅찬 가슴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지만, 달콤한 초밥을 몇 개 삼키고 나니 이번에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야 무조건 고맙습니다. 다만 약간은 조심스러운 게……. 그렇지만 처음부터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하고…….”

“빙빙 말씀을 돌리지 않으셔도 돼요. 월급이라도 주시려는 거죠?”

하아, 너무 화끈하다.

자유로운 영혼인 점은 나와 비슷하지만, 직선적인 성격만은 정반대인 것 같다.

말문이 막힌 나를 그녀가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돈을 벌려고 한국에 온 건 아니에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공짜로 구경하고 물고기를 얻을 수 있다면 저는 대만족입니다.”

“그, 그래도…….”

“매일 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이던가요?”

“정해 놓고 의무적으로 하진 않지만, 대략 그렇습니다.”

“자유롭고 좋네요. 그럼 됐어요. 돈 얘기는 저도 부담스러우니까, 그만하시면 좋겠어요.”

“…….”

그녀의 의도는 알겠다.

하지만 그렇게 어물쩍 넘겨 버릴 문제는 아니다.

흠…….

신중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약간 강한 어조로 말투를 바꿨다.

“그래도 소정의 출연료는 드리겠습니다.”

“또 그 얘긴가요?”

“파트너라고 하던 고정 게스트라고 하던 출연료는 다른 유사 방송에서 어떤 대우를 해 드리는지 참고해 보겠습니다. 그게 합리적이지 않겠습니까?”

“…….”

“부탁합니다.”

쉽게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그녀도 한발 물러서는 눈빛이었다.

“알겠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하시다면 받아들일게요. 그럼 됐죠?”

“고맙습니다.”

마지막 산을 넘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자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은 장재준 영감과 고동우였다.

“이거 앞으로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얻어먹게 될 것 같아 너무 기쁘군요. 내게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보시겠어요?”

방송의 파트너가 생긴 사건을 기념이라도 하듯, 장재준 영감이 의견을 내놓았다.

“이참에 [우럭의 낚시 일기]라는 채널명을 과감히 바꾸는 겁니다. 파트너가 생긴 마당에 우럭 님의 닉네임만 들어가는 것도 공평치 않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우럭만 잡을 거라는 오해의 소지도 있고 말입니다.”

안 그래도 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었다. 이참에 새로운 채널명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뭐로 하면 좋을까요? 어쩐지 캡틴 님께서 생각해 두신 이름이 있을 것 같은데요.”

장재준 영감은 기다렸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반자(魚伴者) 어떻습니까? 예전부터 생각해 둔 건데, 우리 모임인 어벤저스에서 따와 봤습니다. 약간 어거지로 들릴 수 있지만 물고기의 동반자라는 의미를 담았고 말입니다.”

“오호! 그거 괜찮은데요.”

굳이 고동우가 맞장구를 치지 않았어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이었다.

우리는 만장일치로 새로운 채널명을 ‘어반자TV’로 정했다.

“허허허. 그러고 보니 아직 손님의 이름을 정확히 물어보지도 못했군요. 우리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초밥이 다 떨어져 갈 때쯤이었다. 장재준 영감이 말하지 않았으면 나도 놓칠 뻔했다.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제 이름요? 사심희라고 해요.”

“닉네임은 알겠고요, 성함을 여쭌 겁니다.”

“그러니까요. 사, 심, 희. 그게 제 이름이에요.”

이름을 두고 웃을 수는 없었다.

고동우는 간장이 떨어졌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장재준 영감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연발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멋진 이름이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심희 님.”

“저도요.”

내친 김에 멤버들 모두 통성명을 시작했다.

“강유록이라고 하고요, 우리끼리는 우럭이라고 불러요.”

“저는 고동우고, 닉네임은 구피라고 합니다.”

“나는 장재준입니다. 그냥 캡틴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우리들의 닉네임을 기억하려는 듯 귀를 쫑긋거리던 그녀는 간단히 자신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지난 1년 동안은 외삼촌댁에서 일을 돕느라 부산에 있었고, 최근에서야 본격적인 여행을 위해 안양에 자취집을 얻었다고 말했다.

“한국 나이로는 스물다섯이니까 모두들 편히 말씀 놓으세요. 한국에서는 그런 부분에 민감하시던데…….”

“오늘은 초면이니까 좀 그렇고 다음부터는 노력해 보지요. 그런데 집이 안양이라고요? 저도 그곳에 삽니다. 허허.”

“어머! 그러세요? 너무 반가워요.”

“그나저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아예 우리 모임의 일원으로 들어오는 건 어떻습니까?”

그녀는 시종일관 매우 거침없는 성격을 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동네라고 반가워하며 장재준 영감이 제안하자, 그녀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분들의 모임인 것 같은데 저야 영광이지요. 안 그래도 한국에서는 방랑자 신세인데요.”

“환영합니다. 그럼 우리 피싱 어벤저스의 새로운 멤버가 되신 사시미 님을 위하여 건배!”

술잔 대신 물컵을 부닥뜨리며 우리는 건배를 나눴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 영입한 사심희.

그녀가 앞으로 어떤 활약을 펼칠지 기대하며 나는 단숨에 물잔을 비웠다.

* * *

부푼 가슴으로 베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새벽에 그랬던 것처럼 고동우는 나와 장재준 영감을 태워다 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너도 오늘 고생했다.”

“야~~ 옹.”

하루 종일 바닷바람에 시달렸을 베타는 문지방을 넘자마자 침대로 달려갔다.

욕실에서 나와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고민거리였던 요리 파트너를 영입한 뒤라 설레면서도 한층 어깨가 무거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노트북을 열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유튜브에 접속하여 채널명을 변경하는 작업이었다.

어반자TV의 탄생.

그동안 못 보던 사이에 구독자 수는 3천 명대로 늘어나 있었다.

툭탁! 투다닥!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베타는 벌써 잠에 빠졌다. 나는 오늘의 경이로운 사건과 만남들을 정리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생애 최고의 아찔한 손맛을 안겨 준 세 마리의 개우럭.

난생처음 낚시로 돈을 벌게 해 준 수상 장면.

손맛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 준 노인의 웃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반자TV의 도약을 기대하게 만들어 준 사심희와의 조우…….

특히, 그녀의 요리 과정은 거의 손을 볼 필요도 없이 5분을 꽉 채워 주었고, 초밥을 입에 넣는 순간 멤버들의 황홀경에 빠진 멤버들의 표정은 어떠한 자막이나 멘트도 필요치 않았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잠자리에 든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 방송분이 내게는 획기적인 변곡점이 되어 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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