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세탁소에 맡겼던 겨울 옷들을 드디어 꺼냈다.
걸쳐져 있는 비닐을 뜯어내고서 흰색의 숏패딩을 걸치니 좀 따뜻해졌다.
간단하게 청바지를 입고서 회사로 향하는 길이 왠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아암."
늘어지는 하품 속에 찬 공기가 들어왔다.
"겨우 2박 3일인데 왜 이렇게 오랜만인거 같냐."
임소율과 10일 동안 있었을 땐 이런 느낌이 아니었었다.
한 번 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버스정류장에 섰다.
이른 아침부터 출근과 등교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취익.
버스에 오르면 고전적인 표현처럼 콩나물 시루처럼 가득 찬 사람들 때문에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회사 근처 정류장에 내려 걸으니 저 앞으로 원유찬이 걸어오고 있었다.
역시나 한 손엔 아침으로 먹을 토스트와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오~, 유찬이. 머리도 깎았네?"
"앗, 형님, 안녕하십니까. 주말에 깎았어요. 형님은 주말에 뭐 하셨습니까."
주말 동안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자매와 왕게임을 했다고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뭐 집에 있었지."
"아하~. 그럴 줄 알았으면 주말에 불러서 같이 한 잔 하는건데 아쉽네요."
"그러게, 나중에 한 번 불러라야."
구김 없는 성격과 빠른 일 처리 때문에 회사에서는 나름 믿고 일을 맡기는 친구였다.
밑에서 담배 하나를 태우고 올라갔다.
"환기좀 시키자."
가방을 내려놓고 창문을 열으니 찬공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구석진 자리에 있는 청소기를 들고와 한 번 돌리고나니 뒤이어 다른 애들도 출근을 했다.
"안녕~."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인사를 건네오는 우다영의 목소리에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주말에는 여행 잘 갔다왔냐."
확인도 할겸 먼저 주말 얘기를 꺼냈다. 김우현과 시선을 맞추더니 지들끼리 실실 웃었다.
"뭐여, 왜 웃어."
"아니~, 재밌게 놀았지. 진짜 영흥도 너무 좋았어."
영향력이 200 가까이 되었음에도 나와 같이 갔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너도 꼭 가봐."
"뭐하고 놀았는데?"
나에게도 추천을 하는 그녀에게 뭘 하고 물었는지 좀 더 디테일하게 들어갔다.
"어? 스파도 하고 그냥 수, 술게임도 하고?"
알기 쉽게 변하는 표정을 보니 영향력에 의해 영향을 받은게 나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술게임에 대한 것만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알고 싶은건 다 알았기에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랴? 나중에 나도 여친 생기면 갈게."
"으그~, 여친 만들 생각도 없으면서."
"지금 당장은 뭐 그렇지.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
마치 여자에게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 처럼 굴었다.
"서울에 친구 하나 소개 시켜줄까? 대신에 막 바람피고 이러면 안 돼."
"바람은 핀 적 없어."
"……다 헤어져서 문제지."
우다영은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만나고 한 달도 안 되서 헤어지고 그러냐."
"만나보니까 안 맞아서 그런거지. 너무 집착하잖아."
"집착도 사랑이야~. 집착 없으면 그게 사귀는거야?"
나를 혼내는 우다영의 이마에 딱밤을 때리고는 김우현을 쳐다봤다.
"우현아 얘 좀 말려라, 얘는 나만 보면 가르치려고 하냐."
"그럴 수 있지."
"하여튼 커플끼리 그냥, 아오."
질리는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이번 시나리오가 끝났으니 영향력은 우다영에게만 적용되는건 아닐 것이다.
분명히 우다희에게도 어떤 영향이 있었을건데 그걸 확인할 수 없는게 아쉬웠다.
§
우다희.
아침 일찍부터 오픈한 헬스장에 가서 남편과 함께 웨이트를 하고 돌아온 그녀.
쏴아아아.
씻고나와 샐러드로 밥을 먹고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해주었다.
"조심히 갔다와~."
떠난 뒤에 밀렸던 빨래를 하고 밖에 나가 할인을 하는 마트에서 장을 봐 와서 밑반찬을 만들었다.
아침은 샐러드로 채워도 점심과 저녁은 웬만하면 집밥을 만드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아침일과를 마무리하고서 tv를 켜놓고 소파에 앉았다.
"흠~. 여행 갔다온거 확인해야하는데."
오랜만에 남편과 같이 한 여행이었기에 신나는 얼굴로 찍은 사진들을 펼쳤다.
"이쁘긴 했어."
사진에 보이는 빛나는 바다는 사진으로 봐도 그때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한 장씩 넘겨 확인을 했다.
"이거는 보정 조금 해서 올리면 되겠다."
잘 찍은 사진들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비록 연극을 위주로 또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단역으로 밖에 나오진 않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덕분에 사진을 올리면 마지막 남은 팬들과 소통을 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젠 결혼한 아줌마가 됐으니 팬이라기보다는 친구가 되었지만 말이다.
"……?"
그런 기분 좋은 생각을 하면서 사진을 넘기는데 큰 위화감을 느꼈다.
사진 속에서 남편과 스파에서 같이 다정하게 찍은 사진.
"뭐지……."
전혀 이상할게 없는 사진이었다.
남편과 동생 커플과 같이 가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위화감이 들었다.
"잘 나오긴 했는데……."
사진 속 그녀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남편 역시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들었다.
허나, 그 속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뚜렷하게 무엇인지 보면서도 인지를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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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ge 세계관
남편이 이렇게 젊었었나. 그런 생각을 했다.
평소에 이런 옷도 입지 않았었던 것 같은데 모든 부분이 이상했지만 그 옆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진짜였다.
"흠…. 기억도 제대로 남아있구……."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재생되는건 여행에서 즐거웠던 기억 밖에 없었다.
그녀의 옆에는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완벽한 기억속에서 자꾸 어딘가 어긋나는 그런 기억의 편린이 있었다.
그 편린에서 그녀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다희는 생각을 곱씹어보다가 다시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흐음…….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보다."
하긴 돌아오고나서 같이 사진을 보며 웃었는데 기억이 잘못 될리가 없었다.
툭.
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놓고서 다른 할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났다.
다만 그녀는 보고 있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사진 속 그녀가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끌어안고 있는 사진의 주인공이 남시우라는 것을 말이다.
§
퇴근하고 돌아온 나는 다시 시나리오 북을 열고 능력을 확인했다.
내게 처음으로 생긴 특성.
[매소드]
[: 감정, 표정, 신체의 표현 증가]
[싱크로율]
[: 캐릭터에 대한 몰입도 증가]
[프롭스]
[: 시나리오에 필요한 소품 생성]
셋 다 괜찮은 능력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매소드는 말 그대로 매소드 연기 한다는걸꺼고……. 싱크로율은……. 다희 누나 처럼 새로운 관계로 상식개변을 해도 이해하고 연기한다는 거겠고……."
마지막 프롭스.
"프롭스는 소품을 준다는건데……."
소품을 만드는게 귀찮기는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체로 시나리오 속에서 보조를 해줄 물건들이었으니까.
게다가 초반에 이미 많은 소품들을 만들어놨었고 재탕도 가능했다.
러브젤 같은 경우에는 내가 아닌 상대방의 돈으로 구입을 하면 되니 딱히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흐음."
그렇다면 오히려 매소드와 싱크로율에 더욱 눈이 갔다.
시나리오를 진행할 때 포인트가 없으면 위화감을 느낄 때마다 내 심장도 철렁할 때가 있었으니까.
"음…, 차라리 위화감 느끼는걸 에피소드로 써볼까."
제정신이지만 몸은 내 시나리오 대로 따라오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건 그거 나름대로 꼴리는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사각사각.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공책에 새로운 컨셉을 적었다.
언젠가는 쓰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하는 일이었다.
"이제 다음은……."
지금까지는 관계의 변화 없이 상황을 연출했었다. 하지만 이번 시나리오를 하면서 관계를 바꿀 수 있는 상식개변도 통한다는걸 깨달았다.
포인트만 있다면 앞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상황이기에 이제는 등급에 더 초점이 맞춰졌다.
"못해도 포인트 2개는 기본적으로 얻어야하는데."
걸작이 나온다면 더할나위 없었지만 못해도 수작은 뽑아야했다.
그렇다면 남은건 시나리오였다.
시나리오에 좀 더 힘을 줘야했다.
"세계관을 새롭게 써봐야겠네."
팔락.
종이를 넘겨 세계관 컨셉들을 살펴봤다.
[사극]
[바이러스]
[좀비]
[괴물]
[전대물]
적어놓은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었기에 나 스스로도 민망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보다 더 그럴듯한 세계관을 만들어야했다.
"흐음…. 아니면 부부사이조사원이라던가 최면에 걸린 세계라던가 그런건……."
혼잣말을 뱉으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손을 저었다.
"말도 안 되긴 해. 일부다처제도 좀 꼴리긴 하는데."
세상에 최면이라는게 있을리가 없었다. 막상 말도 안되는 능력을 쓰고 있는건 나면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턱을 괴고서 한참이나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펜을 내려놓았다.
"특성도 못 정하겠고 아우, 모르것다."
§
원유찬.
전에 다니던 직장에 비하면 지금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 없었다.
낮에 일을 끝내면 굳이 야근을 할 필요가 없었고 덕분에 아침에 쪼들리듯 일어나지 않아도 됐다.
사람도 다 대학 선배들이었기에 불편한 것도 없었다.
대학교에서도 살갑게 대해주던 사람이었기에 자신을 스카웃 한 것 일테니.
"흐음……. 흐음……."
그런데 최근 파티션 맞은편에 있는 남시우 선배한테서 한숨이 여러개 나오고는 했다.
"형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땅 꺼지겠습니다."
원유찬의 말에 남시우가 퀭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항상 밝기만 하던 사람이 잠을 잘 못 잤나 싶었다.
"일이 많습니까 형님?"
"아니, 일은 뭐, 그럭저럭 있지. 소율씨도 있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임소율이 귀를 쫑긋하며 우리쪽을 쳐다봤다.
그녀와 일적인 얘기 말고는 해본 적이 없었기에 아직도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럽니까?"
담배를 손에 들고 일어선 남시우가 고갯짓을 했다.
그도 담배 하나 들고서 같이 밑으로 내려가 담배 하나를 물었다.
치익.
차가운 공기와 함께 들어온 담배연기를 뱉으며 다시 물었다.
"뭔 일 있습니까?"
"스읍~, 하아~. 별건 아닌데. 게임 같은건데 말이야."
"게임이요?"
선배가 게임을 했었나 잠시 돌이켜봤지만 들어본 적은 없었다.
"특성을 셋 중에 하나 골라야하거든?"
"무슨 게임인데요?"
"그냥 뭐, 음. 친구가 만들고 있는 게임인데. 여튼간에 매소드, 싱크로율, 프롭스. 셋 중에 하나 골라야 돼."
이렇게만 들어선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가 좋은거 같냐."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러니까 매소드는 뭐랄까, 캐릭터가 그러니까 입체적으로 변한다고 봐야하고, 싱크로율은 캐릭터를 더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거고, 프롭스는 아이템을 줘."
설명을 다시 들어도 도저히 무슨 게임인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선배의 친구는 어떤 게임을 만들고 있는건지.
"그래도 아이템이 좋지 않을까요?"
"아이템은 근데 이미 있어."
"싱크로율은요?"
"음…, 설명을 어케하냐 이걸, 아, 현질로 해결이 돼. 포인트가 있거든."
그럼 남은건 하나였다.
"매소드는요."
"이것도 현질로 해결이 되지 않을까?"
"……."
어떤 대답을 원하는건가 싶어서 뚫어져라 쳐다보니 그도 느꼈는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니까 셋 다 애매해서 그래."
"흐음……."
그래도 선배가 고민하는 모습을 처음 봤으니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말했다.
"현질로 가능하면 두 개 다 현질하면 되지 않아요?"
"근데 하나 밖에 못하는 상황이야."
"……게임이 이상하네요?"
"그치? 만든 놈이 좀 이상해서 그래."
아직 알파버전도 제대로 만들지 못 한 것 같았다.
"그러면 제일 위에 있는거 고르는게 낫지 않을까요?"
"매소드?"
"그게 제일 위에 있었어요? 그럼 그게 나을 거 같은데."
"흐음, 그래, 도움이 됐다."
영혼이 1도 없는 대답이었지만 자세하게 알 수가 없었으니 조언도 깊게 해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게임에 대한 고민인지라 깊게 생각할 수도 없긴 했다.
§
내 한숨이 컸는지 원유찬이 물어볼 정도가 됐다.
상담을 해봤지만 역시 전부 공개할 수가 없었기에 그렇다할 조언도 얻지 못했다.
퇴근을 하고 돌아와 tv를 켜놓고 영감을 받을게 없나 채널을 무한으로 돌려봤지만 딱히 끌리는게 없었다.
"이게 뭐라고 진지하게 고민하냐……."
처음엔 가볍게 시작을 했는데 어느새 시나리오 북에 푹 빠져버렸다.
그러다보니 더 잘하고 싶게 되고 더 높은 등급을 받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겨났다.
"일단 하나 고르고 생각해야하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우웅.
액정을 쳐다보니 [우다희 누나]라고 적혀 있었다.
"……?"
영향력을 우다영 특성에 꼴아박고 또 시나리오가 끝나면 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텐데 뭐지?싶었다.
"여보세요."
[시우야~, 오랜만이야~.]
"네네. 무슨 일이에요 누나?"
[아~, 다른건 아니고~. 잠깐 볼 수 있을까? 마침 근처 지나가고 있어서~.]
직접 만나봐야 알 것 같았다.
§
우다희.
"안녕~."
후드티 위에 패딩을 걸친 남시우가 저벅저벅 걸어오는게 보였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역시 아직 자신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때 촬영을 위해 며칠 만난게 전부였으니 어색한게 어쩌면 당연했다.
가끔 회사에서 만나긴 했지만 그를 보러 간게 아니었으니 갑자기 연락한 자신이 의아할 수도 있었다.
"어쩐일로……."
예상했던 대로 왜 불렀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잠시 카페라도 갈까?"
"어…, 저는 괜찮은데 남편 분은요?"
"응? 아~, 오늘 야근이라서~."
지나가다 들린게 아니라 자꾸 위화감이 들어 그걸 알고 싶어서 찾아왔다.
카페에 들린 둘은 커피를 앞에 두고서 근황을 얘기했다.
"며칠 전에 애들이랑 여행갔다왔거든."
"아~, 다영이가 보여주더라고요."
"어머, 그랬니? 흐응~, 시우도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한 번 가봐."
"다영이도 똑같이 얘기하던데……. 이번 생에는 글른 것 같아요."
낙담하며 말을 하는 남시우를 보니 어린 동생 같고 귀엽게 느껴졌다.
"여행 간 사진 보여줄까?"
"네? 아뇨아뇨, 괜찮은데."
"아냐, 봐봐."
그녀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자꾸 여행사진 속 남편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남편이랑 찍은건데."
여전히 그녀의 눈에는 남편인 최혁의 얼굴이 보였다.
스윽.
사진이 뜬 핸드폰을 그의 앞으로 밀었다.
루프탑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