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임소율의 옆에서 기본적인 것들을 가르쳐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행인건 표정이 워낙 담담한 아이였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해도 내가 알지 못하니 그건 좋았다.
"흐응~, 안녕~."
오전에 우다희가 손을 흔들며 등장하는데 회색의 블레이저와 그 안에 세미시스루인지 블라우스인지 어렴풋이 속이 비치는 흰색의 나풀 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가 너무 짧은거 아니야?"
우다영의 핀잔에 자신의 회색 치마를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어른의 패션이지~. 우현아~. 가자앙~."
준비하고 있던 김우현의 팔에 팔짱을 끼며 끌고가려고 했다.
"시우도 안녕~."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어쩐지 전과 다른 그런 눈빛은 아니었다.
영향력 0에 대한 효과를 톡톡히 실감하는 중이었다.
"잠깐만요 누나. 나 갔다올게."
김우현도 오랜만에 정장을 쫙 빼입고서 짐들을 챙겼다.
이번에 완성한 홍보영상의 반응이 좋아 관계자들과 식사자리가 잡혔기 때문이었다.
"가서 일 따오진 마라."
장난어린 내 말에 김우현이 웃음소리만 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시간이 더 흐르고 일이 끝난 우다영이 일어나 김우현과 전화를 하며 퇴근을 했다.
"형님 저도 가볼게요."
"그래에."
나도 당분간은 잡힌 일이 없었기에 원유찬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걸 접고 일어나는데 옆에 앉은 임소율이 집중해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몇 개의 영상을 건네줬는데 질리지도 않고 하는걸 보면 생각보다 근성은 있었다.
"퇴근하죠, 소율씨."
적당히 선을 긋는 말투로 말을 했다.
"……조금만 더 하고요."
"그래요, 갈 때 불 다 끄시고 문은 그냥 닫으시면 돼요."
"네."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계속 남아 연습을 하다가 퇴근을 하는 것 같았다.
몇 시에 퇴근하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
집에 돌아와 펜으로 이마를 긁적이며 다음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영향력 스읍, 너무 아쉽네."
아쉬운건 아쉬운거고 이번엔 새로운 스토리를 짜볼 생각이었다.
"세계관을 아예 바꾸는 것도 재밌을 것 같은데……."
아포칼립스를 가져와서 좀비물이나 핵전쟁 생존물도 해보고 싶었지만 내가 감당 못할 것 같았다.
단편소설을 시나리오 북에 손으로 써나갈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위화감이 미친듯이 치솟을테니 포인트가 필수였다.
"자매 덮밥을 한 번 더 해볼까……? 자매 보지 중에 뭐가 더 좋나 이런걸로 경쟁하게 하면 그것도 재밌긴 하겠네."
다만 좆이 뽑힐 각오는 해놔야했다.
불알을 벅벅 긁으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놉시스들을 낙서하듯 적어나갔다.
§
며칠이 다시 지났다.
쿨타임도 지난 상태고 몰입도도 떨어져 0%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임소율은 새롭게 알려준 것들을 가지고 하루종일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거 봐도 돼요?"
그녀가 무언가를 끄적이는게 보여서 넌지시 물어보니 그녀가 힐끔 나를 봤다.
"아뇨."
"……그래요, 그럼."
딱히 볼 필요도 없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찾아온 퇴근 시간.
하나둘 퇴근하고 역시나 남아 연습을 하는 임소율의 모습에 잠자코 지켜봤다.
몇 시에 퇴근하려나 싶어서 지켜볼 요량이었다.
[PM 07:00]
[PM 08:00]
[PM 08:45]
해가 저물고 밤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연습하는 그녀를 보면서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근성이고 나발이고 이건 미친게 분명했다.
"……."
힐끔 그녀를 보는데 연습에 집중하느라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문득 왜 이렇게까지 하는건가 싶어서 작은 궁금증이 생겼다.
바스락.
가방에서 시나리오 북을 꺼내 펼친 후에 가볍게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겨우 한 시간 정도의 분량.
하도 말이 없는 그녀에 대해 가볍게 알아볼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사각사각.
다 적고난 후에 공책을 덮었다.
"소율씨, 연습 다 끝났어요?"
"……아직이요."
"보통 몇 시까지 해요?"
"아홉 시까지 해요."
시간을 보니 9시가 거의 다 된 시점이었다.
"그럼 저랑 잠시 얘기 좀 할까요?"
스튜디오.
직접 만들다보니 군데군데 미흡한 부분들이 보였다.
탁.
앉은 그녀에게 따뜻한 녹차를 건네주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우선 긴장하며 나를 보고 있었기에 긴장을 푸는게 먼저였다.
"그래서……. 회사생활에 조금 적응 됐어요?"
"……네."
"진짜로요? 마음에 들어요?"
"네, 마음에 들어요."
하도 말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의외였다.
이번 시나리오에 단 하나의 절대적 명제가 하나 있었다.
내 질문에 진실로 대답하도록 말이다.
"그럼 다행이네요."
거짓말을 못하는 그녀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임소율이죠? 이름이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명제를 걸어놓으니 진심이라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제가 준건 할만합니까?"
"네, 재밌어요."
여전히 대답은 짧지만 그게 거짓말은 아니었으니 다행이었다.
어느정도 긴장이 풀어진건지 앞에 놓인 따뜻한 녹차를 들어 한모금을 마시는 임소율.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다 알긴 아는데 가볍게 몇 개만 물어볼게요. 그냥 선배 입장에서 하는거니까 가볍게 대답해주시면 돼요."
"네."
짧은 시나리오에 섹스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에 위화감이 올라갈 일도 없었다.
정말 평범하게 선배와 후배의 대화로 컨셉을 잡고 질문을 던져나갔다.
"저는 27살인데, 소율씨는 몇 살이에요?"
"23살이요."
막힘없이 대답을 해주는 그녀에게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다음 질문을 했다.
"첫 직장이기도 하고 할텐데 어때요, 늘솜 스튜디오."
"마음에 들어요. 재밌고요."
그래도 이번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를 해주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도회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눈이 똑바로 보였다.
눈이 생각보다 크다는것도 일주일만에 처음 알았다.
"첫 직장이기도 하고 전공도 아닌데 우리 스튜디오에 온 이유가 있어요?"
"……배워보고 싶었어요."
말없이 다음 대답을 기다리며 그녀를 쳐다봤다.
임소율은 잠자코 내 눈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동생들 사진을 찍어주고 싶어서요."
많이 생략된 기분이 들지만 그래도 자신의 얘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동생들이요? 많이 어려요?"
"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사진이랑 영상 예쁘게 찍어주고 싶은데 학원은 너무 비싸고……."
"……."
"……공부를 못해서……, 대학교를 못 가요."
공부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 멈칫하는게 아무래도 트라우마가 있어 보였다.
"동생들이 몇 살인데요?"
"……7살이요."
"오, 늦둥이네요. 다른 한 명은요?"
"쌍둥이에요."
얘기를 하면 할수록 처음 듣는 얘기들이 나왔다. 그래도 겨우 동생들 사진 찍어주기 위해 취업을 하는 인간이 있을리가 없었다.
실제로도 그녀가 배운건 가편집의 일부분이었지 찍거나 혹은 영상 보정을 하거나 하는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겨우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서 온건 아닌 거 같은데 이유가 있어요?"
심문하는 것 같아 느낌이 묘하긴 했지만 임소율에 대해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우다영과 우다희. 자매에게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실험용으로 연습할 상대가 있으면 했기 때문이다.
좀 더 다루기 편한 상대가 필요했다.
"집에 할머니 밖에 안 계셔서요."
"음……?"
사진과 영상을 남길 사람이 자신 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갈수록 더 복잡해지는 사안에 이마를 긁적였다.
대답이 짧아 빡쳐서 했던 간이 인터뷰였는데 어째 가정사가 복잡했다.
"어릴 때 사진이 하나도 안 남아서요. 일 때문에 동생들이 아팠을 때도 뒤늦게 알아서……. 그래서 늘솜 스튜디오에 왔어요."
임소율의 눈동자가 이번엔 나를 또렷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전부 듣고나니 했던 행동들이 전부 이해가 갔다.
9시까지 연습을 하고 가도 기존에 퇴근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시간이었을 것이다.
공부를 못했다고 했으니 들어갈 수 있는 곳도 별로 없었을 것이고.
하나씩 조각이 맞춰지고나니 임소율이 다르게 보였다.
"기특하네. 대단하기도 하고. 철이 빨리 들었구나?"
별 생각없이 순수하게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아서 해준 말이었는데 임소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애를 시나리오 북을 사용해 나 혼자 즐길 생각을 하다니 일말의 동정심이 들었다.
'외박은 힘들겠네. 당일치기로 할 수 있는걸로 시나리오를 짜야겠네.'
물론 시나리오 북에서 배제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건 그녀의 사정이었고 그 사정 안에서 나는 내 방식으로 살아가면 됐다.
우다영과 우다희 역시도 그녀들의 사정 안에서 잠시 빌려 즐겼을 뿐이었다.
다만 우다희에게 했던 것 처럼 내가 사고 싶었던 물건들을 대신 사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쓰레기 같은 계획을 머릿속으로 세우는데 갑자기 임소율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뭐가요."
"……어른한테 칭찬을 받는게 처음이라서……."
고개를 든 임소율의 눈동자에 작지만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톡 치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처럼 볼이 상기되어 있었다.
"……."
여기서 이미지 작업을 조금 해둬야 할 것 같았다.
시나리오가 끝나면 영향력 밖이기에 지금 이 상황을 까먹겠지만 시나리오는 시리즈로 이어붙일 수 있었다.
지금 작업을 해놓고 다음 시나리오에 붙여넣으면 될 일이었다.
"늘솜 스튜디오에 잘 왔어요. 내가 팀장이고 소율씨 사수니까, 힘든거 있으면 뭐든 물어봐요."
"……네……."
"선배니까 도와줄 수 있는건 도와줄게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퇴근할까요. 많이 늦었네."
"……네."
스튜디오를 나와 가방을 챙겼다.
달칵.
나가기전에 불을 끄고서 뒤에 서 있는 임소율을 쳐다봤다.
"내년에 입학이면 아직 시간 많이 있으니까 사진 찍는것도 알려줄게요."
"……감사합니다."
"근데 카메라는 있어요?"
"아뇨."
애는 착한데 사람을 답답하게 하는 재주가 발달해 있었다.
이마를 긁적이며 문을 닫고 아래로 내려와 담뱃불을 붙였다.
옆에서 그녀도 나를 따라 담뱃불을 붙였다.
"후우…."
길게 담배연기를 뱉으며 옆을 보는데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굳이 등 안 돌려도 돼요."
대충 얘기를 듣고나니 행동들이 어느정도는 이해가 갔다.
"버스는 어디서 탑니까."
"반대편에서……."
그녀의 말을 따라 반대편 도로를 봤다.
버스 정류장 옆 쪽에 치킨집이 보였다.
툭툭.
다 핀 담배를 끄고 횡단보도 앞에 서서 그녀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오세요."
"……?"
의아해하면서도 내 손짓에 따라 착실하게 따라왔다.
표현을 못할 뿐이지 말은 잘 듣는 친구 같았다.
"후라이드, 양념 반반이요. 콜라 큰걸로 바꿔주세요. 네네."
핸드폰을 내밀어 결제를 한 후에 멀뚱히 뒤에 서 있는 임소율에게 말했다.
"취업하고나서 집에 뭐 사간적 있어요?"
"……아뇨……."
"그럼 나오면 가져가요."
"아! 아, 아뇨! 괜찮아요!"
괜찮다고 허둥지둥 손을 젓는데 취소를 하라는 말도 못하고 어버버 거렸다.
그 모습에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를 텁하니 잡았다.
"안 먹을거면 놓고 그냥 오는 버스 타고 가요. 신호 바뀌기 전에 갑니다 그럼."
신호가 바뀌기 전에 뛰어 겨우 넘어왔다.
때를 맞춰 오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을 보니 치킨집 앞에서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해주었다.
피식 웃으며 창문을 열고 손을 저어 인사를 해주었다.
부우웅.
버스가 출발하며 시야에서 멀어지는 그녀.
인터뷰가 끝난 이후부터는 이미 시나리오는 끝이었다.
하늘엔 이미 달이 가운데에 떠 있었다.
겨우 집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고서 귓볼을 긁적였다.
"스읍, 망작이면……. 다음 시나리오를 개빡세게 쓰고 포인트까지 써야겠네……."
쉼호흡을 한 후에 가방에서 시나리오 북을 꺼냈다.
§
임소율.
덜컹.
흔들리는 버스에서 소중하게 치킨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엔 보름달이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미소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
괜시리 얼굴이 붉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물을 받았던 탓이었다.
오늘 아니, 2시간 전만 해도 회사의 상사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
지금도 그 관계가 바뀐건 아니지만 임소율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남겼다.
[#8scenario 칭찬]
[등급 : 평작]
[영향력 : 7]
[명성 : 143]
[평]
[: 인터뷰 형식의 새로운 형태]
[감독의 새로운 배우]
[단편이지만 새로운 배우의 설명]
[앞으로가 기대되는 배우]
[point : 5]
[다음 작품에서 몰입도 +0%]
[다음 작품에서 위화감 -0%]
[대기시간 : 00d 00h 31m]
평작.
집에 도착해 등급을 확인하자마자 손으로 입을 쓸어내렸다.
망작이라고 예상했던것과는 다른 결과였다.
"등급에 영향을 주는건 시간이 아니라는거네."
어느정도 영향을 주긴 하겠지만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시나리오를 구상하는데에 커다란 도움이 됐다.
시나리오 하나하나가 시간을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 화끈하게 하나의 실험을 위해 소모할 수도 없었다.
"괜찮네."
내가 내린 평이었다. 느리지만 시간을 들여 하나씩 새로운 것들을 알아낸다.
탁.
수첩을 꺼내 펼치니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이 무질서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한 줄을 더 추가했다.
사람이란건 이해를 했다해도 적어놓지 않으면 까먹으니 말이다.
수첩을 넣고 이번엔 공책을 꺼냈다.
무수하게 적혀져 있는 시나리오의 컨셉들.
"위화감 때문에 두 달 가까이 사이 좋은 친구를 빌렸었으니까……."
최대한 본연의 성격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건드려왔었다.
앞으로도 웬만하면 그걸 바꿀 생각은 없었다.
그래야 그녀들 특유의 표정을 가진채로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사락.
제법 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후우."
등을 기대 아까 임소율과 했었던 인터뷰를 돌이켜봤다.
평범하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왔으니 금수저라고 해도 될만했다.
이렇다하게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흐음……."
많은 부분이 결여된 친구였다.
"어른한테 칭찬을 듣는게 처음이라……."
눈썹을 긁적이며 새로운 시나리오의 구상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