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42/126)

 §

 오후가 다 되어서야 일어나니 아까보다는 괜찮아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아직 다리가 후들거리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일어났어?"

 우다희가 옆에서 알몸으로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리니 우다영도 알몸으로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다.

 "……."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둘의 얼굴이 너무 뽀송하다는 점이었다.

 나랑 같은 하루를 보냈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얼굴 수척해진것좀 봐."

 "오늘 하루는 푹 쉬어야겠네요……. 이제 리뷰만 남았어요, 둘 다."

 이젠 때리면서 더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았다.

 러브젤도 거의 바닥을 보일 정도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해댔기 때문이다.

 "흐응~, 리뷰? 우리 시우꺼는 별 다섯개 줄 수 있는데."

 "……저를 리뷰하면 안 돼요……."

 우다희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일어나서는 내 가슴을 손으로 짚었다.

 "그래도 진짜 재밌었어~. 그치?"

 "……다시는 이런 사연은 채택 못 하겠네요……."

 자매덮밥 좋긴한데 주말에 몰아서 했다가는 내가 죽을지도 몰랐다. 

 조금 분산을 해둔 상태로 시나리오를 써나가야 내가 살 것 같았다.

 "그래서 리뷰는 어떻게 하면 돼?"

 "셋이서 사연을 읽고 재연 해본 경험이라던가 그런거 말씀하시면 돼요."

 "흐응~. 그래?"

  

 우다희가 이불을 걷고 나와 걷는데 커다란 엉덩이가 씰룩였다.

 우다영도 짧게 하품을 하고는 아직도 누워있는 내 배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너 죽을 것 같아. 아무리 촬영이 좋다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돼?"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보는 우다영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쭈, 이게 웃어? 웃어?"

 "엌! 자, 잠깐만……. 미, 미안……. 나는 지금 약한 사람이랍니다……."

 "그동안 나 놀렸잖아~. 댓가야."

 내 옆구리를 찔러대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읏…."

 품에 안긴 우다영이 얼굴을 붉혔다.

 "얘들아~. 얼른 나와~. 리뷰 빨리 끝내고 점심 먹으러가자~."

 "……네에. 가자."

 우다영의 손을 잡고서 방문을 나왔다. 

 우다희는 그런 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점심으로 장어 먹으러 갈까? 누나는 회춘한 것 같다 얘."

 눈빛을 보니 진심인 것 같아서 오한이 들었다.

 빠진 정기를 채우려면 아무래도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둘 다 그렇게 리뷰 찍을건 아니지? 옷은 입어야지."

 주말 동안 계속 벗고 있었던 탓에 아차 싶었던 자매가 급히 옷을 입으러 안방으로 향했다.

 그래도 길었던 이번 에피소드도 끝이 났다. 

 [#7scenario 한 지붕 한 자매]

 [등급 : 평작]

 [영향력 : 281]

 [명성 : 142]

 [평]

 [: 캐릭터 관계의 미흡함이 보임]

 [아쉬운 각본이긴 하나 볼만한 작품]

 [두 명의 배우, 새로운 시도]

 [시도가 좋아 미래가 기대가 됌]

 [point : 4]

  

 [다음 작품에서 몰입도 +0%]

 [다음 작품에서 위화감 -0%]

 [대기시간 : 6d 01h 42m]

 월요일 아침.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아직 수척했다. 

 진이 다 빠진터라 회복하려면 며칠은 필요해보였다.

 "흐아암."

 씻고 나왔음에도 퉁퉁 부은 눈의 붓기는 그대로였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7번째 시나리오의 평을 읽었다.

 "잠만……. 포인트 2개를 사용했는데 왜 평작이여."

 포인트 뿐만이 아니라 시간도 일주일을 투자했는데도 평작이라는 사실에 움찔했다.

 만약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망작에 가까운 수준이란 뜻이었다.

 "하마터면 좆 될 뻔 했네."

 망작이 되면 디버프를 받아서 다음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입맛을 다시며 관자놀이를 긁적이는데 새로운 글자가 보였다.

 [배우]

 [우다영]

 [대작 : 0]

 [명작 : 0]

 [걸작 : 0]

 [수작 : 1]

 [평작 : 3]

 [망작 : 1]

 [네임밸류 : 3%]

  

 우다영에 대한 필모그래피였다.

 입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머리를 굴렸다. 

  

 "……수작 위에 대작, 명작, 걸작……. 세 개나 있네."

    

 설명이 불친절한 능력이지만 작품이 쌓여갈수록 하나씩 해금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직접 능력을 알아내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래도 웃기긴 하네."

  

 설마 우다영의 필모그래피가 보일줄은 몰랐다. 

 다섯 개의 작품을 찍었기에 새롭게 해금된 능력 같았다.

 왜냐하면 우다희의 필모그래피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어이없는 능력에 조소를 띠고 있던 내 눈에 우다영의 필모그래피 아래에 새로운 칸이 쓰여지고 있었다.

 사각사각.

 연필로 글을 쓰듯 사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능력을 선택해주세요]

 [몰입도 상승률 : +5%]

 [위화감 감소율 : +5%]

 [영향력 : 0]

 이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하는건지 반짝이고 있었다. 

    

 "뭐야, 패시브를 이런식으로 주네. 무슨 게임도 아니고."

 시나리오 북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변함없이 빈티지 가득한 공책이었다.

 평범한 공책에 이런 능력이 있다는게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그럼 어디보자……."

 몰입도나 위화감은 시나리오를 통해 내가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영향력이라는 글자가 눈에 밟혔다.

 "시나리오가 끝나도 작품에 영향을 받는다는걸로 알고 있는데……."

  

 섹파로 만들어두면 시나리오가 끝나도 수치에 따라 영향을 받는걸로 알고 있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영향력 : 0]

 [작품을 끌어당겨 적용시키시오.]

 [#1scenario 연인(망작)]

 [#2scenario 프리미엄(평작)]

 [#3scenario 친구랑 젠가한 SSUL(평작)]

 [#4scenario 성인지 감수성(수작)]

 [#7scenario 한 지붕 한 자매(평작)]

 지금까지 그녀와 했던 시나리오들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졌다. 

 시나리오 하나를 끌어당기면 앞으로 시나리오 상황이 아닐 때 계속 영향을 받는다는 뜻 같았다.

 "망작은 당연히 빼고……."

 내용도 감동도 없는 연인은 빼버렸다. 

 스윽.

 옆에 있는 볼펜을 들어 #7을 눌렀다.

 그걸 끌어당겨 올려놓으니 다시 새겨지며 새로운 프로필이 완성됐다.

 [배우]

 [우다영]

 [#7scenario 한 지붕 한 자매(평작)][0]

 [대작 : 0]

 [명작 : 0]

 [걸작 : 0]

 [수작 : 1]

 [평작 : 3]

 [망작 : 1]

 [네임밸류 : 3%]

 하지만 영향력은 0이었다. 

 [point : 3]

 거기에 포인트까지 소모가 됐다.

 "아니, 시벌, 설명은 제대로 해줘야될거 아니여."

  

 불친절한 능력에 울컥했다. 겨우 숨을 고르고 이번엔 0이라고 써 있는 숫자를 찍었다.

 [영향력 : 281]

 0의 옆으로 현재 영향력이 떠올랐다. 

 똑같이 281의 영향력을 끌어당겨 옮겼다. 

 [#7scenario 한 지붕 한 자매(평작)][28]

  

 써진 숫자를 보자마자 쥐고 있던 볼펜을 던지듯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탁! 

 "아오, 28? 그럼…, 10분의 1? 미쳤나 진짜로." 

 남은 영향력은 0이었다. 

 한 달 반 동안 어떻게 올린 영향력인데 이걸 한 순간에 깎아먹었다. 

 "후우."

 마음을 다 잡고 쭉 읽어나갔다. 

 [#7scenario 한 지붕 한 자매]

 [등급 : 평작]

 [영향력 : 0]

 [명성 : 142]

 [평]

 [: 캐릭터 관계의 미흡함이 보임]

 [아쉬운 각본이긴 하나 볼만한 작품]

 [두 명의 배우, 새로운 시도]

 [시도가 좋아 미래가 기대가 됌]

 [point : 3]

  

 [다음 작품에서 몰입도 +0%]

 [다음 작품에서 위화감 -0%]

 [대기시간 : 6d 01h 30m]

 [배우]

 [우다영]

 [#7scenario 한 지붕 한 자매(평작)][28]

 [대작 : 0]

 [명작 : 0]

 [걸작 : 0]

 [수작 : 1]

 [평작 : 3]

 [망작 : 1]

 [네임밸류 : 3%]

  

 게임을 하다가 세이브를 안 해놓고 저지른 실수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 네임밸류는 뭘 뜻 하는지 알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이거……. 만들다가 멈춘거 아니야?"

 시나리오 북이 미완성된 물건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아이고, 시발거."

 아재스러운 탄식을 내뱉으며 공책을 접었다. 

 내 기억에 영향력 28이면 기억 아주 깊은 저편에 있는 희끄무리한 조각에 불과한 티끌같은 숫자였다. 

 이러쿵저러쿵 말해도 이미 저지른 실수였다. 

 그나마 다행인건 우다영의 필모그래피가 새로 생겼다는 것이었다. 

 §

 쏴아아아─!

 가을을 알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했던 실수는 어쩔 수 없었다고 치고 새롭게 만들어내면 될 일이었다.

  

 "시우야, 다 됐어?"

 "응, 내일까지만 하면 편집 다 끝나."

 이제 홍보영상도 마무리가 다 되어서 마지막으로 검수만 하면 끝이었다. 

 김우현은 만족한 얼굴로 파티션에 팔을 기대고서 물었다.

 "한 번 볼 수 있어?"

 "오키. 잠만."

 사실상 완성된 영상을 틀어 같이 확인을 해나갔다. 

 "흠, 좋네. 아, 참. 잠깐 유찬이랑 같이 셋이서 회의좀 하자."

 "……?"

 그 자리에 서서 김우현이 나와 원유찬을 쳐다봤다.

 "내일 인턴 들어오는데 누가 가르칠거야?"

 "내가 가르치기로 말 끝난거 아니었어?"

 이미 내가 가르치는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얘기를 꺼낸걸 보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뭔데, 뭐 문제 생김?"

 김우현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아니고 앞으로 팀을 나누려고 하거든."

 "팀?"

 "응, 외주 맡은 작품들을 편집하는 팀하고 우리 늘솜 스튜디오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할 컨텐츠를 이끌 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도 없는데 왜 팀을 나눠."

 겨우 네 명 뿐인 회사 내일 인턴이 들어와도 다섯 뿐인 아주 작은 규모의 회사였다.

  

 "슬슬 키워보려고. 알잖아, 외주만 맡는 하청 회사로 남을 생각 없는거."

 여전히 오글거리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그였다.

 나야 월급쟁이 인생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팀을 어떻게 나눌려고."

  

 김우현은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원유찬을 가리켰다.

 "유찬이가 너보다 편집속도가 훨씬 빠르잖아."

 죙일 야근만 시키는 회사에서 1년을 구르다 온 원유찬이다보니 편집속도는 물론이거니와 최근 편집 트렌드에 대해 빠삭했다.

 "그래서 스트리머나 유튜버 외주 쪽은 전부 유찬이한테 몰아주려고."

 "그리고."

 "그리고 너한테는 시 홍보 영상이나 이런거 전담하게 하려고. 이미 계획도 다 짜놨어."

 "……."

 사업을 하는 사람은 달라도 달랐다. 

 "그래서 너가 1팀, 유찬이가 2팀.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인턴은 누가 데리고 갈래?"

 김우현의 말에 나와 원유찬이 서로를 쳐다봤다. 

 "쟤."

 "형님이요."

  

 전공자도 아니고 신입을 데리고 일하기는 싫었다. 

 다만 그 생각은 원유찬도 똑같아 보였다.

 "형님, 알다시피 속도가 중요한데……. 신입 가르치면서 할 시간이 없어요……."

 "……."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마를 긁적였다.

 그걸 본 김우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시우야 부탁할게."

 "그러십쇼."

 "미안해~. 삐졌어?"

 김우현과 우다영의 말투가 비슷한게 더 열 받았다. 

 "삐지긴 신입 가르칠 생각에 골머리 아파서 그래."

   

 김우현은 내 어깨를 주무르며 말을 했다.

 "회사를 키워볼거야. 스튜디오도 저쪽에 크게 더 확장할거고."

  

 지난 주말에 우리가 고생해서 만든 스튜디오쪽을 가리켰다. 

 확실한건 앞으로도 할게 많다는 점이었다. 

 §

 다음 날.  

 전 날에 추적추적 내린 가을비 때문에 서늘한 아침공기를 맡으며 일찍 출근을 했다. 

 투욱.

 파티션을 재조립 해 새롭게 공간을 만든 후에 김우현이 공수해온 컴퓨터를 설치했다. 

 바로 내 옆자리에 앉을 신입사원을 위해서였다.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한 후에 프로그램 CD들을 꺼내 설치를 해놓고 바로 담배를 태우러 내려갔다.

 [AM 08 : 35]

 아직 출근을 하려면 제법 남은 시간이었다.

 치익.

 담뱃불을 붙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쎄한 느낌에 고개를 든채로 눈동자만 내려 보는데 앞에 그 신입사원이 서 있었다.

  

 면접을 볼 때와는 다른 옷인 것 처럼 보이는데 여튼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얼굴은 내 주먹만한게 신기하게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었다. 

 "불……."

 "여기요."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내밀었다.

 치익.

  

 라이터를 받아든 그녀가 얇은 담배를 입에 물고서 불을 붙이고는 짧게 목례를 해 감사를 하며 라이터를 돌려주었다.

 "신입사원이죠?"

 "……?" 

 내게 등을 돌려 담배를 태우던 그녀가 움찔하며 나를 쳐다봤다. 

 표정으로 보아하니 그날 면접 볼 때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 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늘솜 스튜디오에 인턴으로 들어오시는거 아니에요?"

 "……맞는데요."

 "반가워요. 남시우라고 합니다."

   

 작은 얼굴만큼이나 굉장히 슬림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로우킥을 날리면 저 젓가락 같은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안녕하세요."

 그래도 선배라고 내게 목례를 한 번 더 해주었다.

  

 "후우, 저도요."

 담배 연기를 뱉으며 능청스럽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툭툭.

 다 핀 담배 꽁초를 털어 끈 후에 양동이에 버리고서 위로 올라왔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회사.

 넓은 공간에 비해 다섯명이 차리하는 자리는 작았다.

  

 열어둔 문을 통해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이쪽으로 와요."

 정장에 어깨에는 검정색의 숄더백을 메고서 내게로 다가왔다.

 "앞으로 이 자리에서 일을 하게 될거에요. 조금있다가 사장 오면 또 설명하겠지만."

 "아…."

 앞으로 일할 자리라고 하니 그녀가 책상을 훑어봤다. 

 전에 봤던 냉소적인 표정이 아니라 뭐랄까, 낯설어하면서도 어색한 그런 감정을 느꼈다. 

 툭.

 파티션에 팔을 걸치고 비스듬하게 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저는 1팀 팀장 남시우라고 합니다. 그냥 선배라고 불러요. 그게 편할거 같으니까." 

 "……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자신의 책상을 훑고 있었다.

 나한테는 관심이 1도 없어보이는 듯 했다.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은 후에 자신의 생각만 하는 그녀를 짜증 섞인 표정으로 쳐다봤다.

 "원래 사람 말 잘 안 듣고 그럽니까?"

 "……아뇨, 그런건 아니에요."

 좆같다는 감정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진 않았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한 번 봤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제 이름은 말 했고, 이름이 뭐에요."

    

 언짢은 듯한 말투에 그제야 그녀가 나를 쳐다봤다.

 "임소율이에요." 

   

 이제야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나서도 금세 시선을 돌려서 컴퓨터를 바라보는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가르쳐주는대로 잘 따라올지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단발에 작은 얼굴 그리고 흰 피부에 고양이처럼 생긴 그녀의 눈동자 위로 짙은 검정색의 얇은 눈썹. 

 특별하게 화장을 한 건 아닌데 입술이 분홍빛이었다. 

 아마 내가 모르는 화장을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화장이 그리 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다만 피부에 수분기가 많아 굉장히 탱글탱글해 보였다.

 "쩝."

 입맛을 다시며 의자를 끌어내 자리에 앉았다. 

 생긴건 예쁜데 직장 후배로는 힘들 것 같았다. 

 띠리릭.

  

 자리에 앉자마자 문이 열리며 원유찬이 들어왔다.

 원래는 바로 내 옆자리였지만 이제는 파티션 너머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그였다.

 "안녕하십니까, 행님."

 "하위~."

 평소처럼 인사를 하다가 임소율의 얼굴을 보고는 흠칫놀랐다. 

 "안녕하세요."

 원유찬이 육중한 몸으로 꾸벅 인사를 했고 임소율도 꾸벅 고개를 숙여 받아주었다.

 신입사원이라면 긴장 할법도 한데 그것보다는 회사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책상과 컴퓨터에 관심을 보이는건 평범한 반응은 아닌 것 같았다. 

 "형님, 오다가 샌드위치 사왔는데 드실래요?"

 "아니, 안 먹어. 너 맨날 아침마다 샌드위치랑 햄버거랑 빵만 사오드라."

 매일 하루도 안 거르고 특정 브랜드 3개를 번갈아가며 사오는데 거의 한 달 동안 뺏어먹다보니 솔직하게 말하면 물렸다. 

 패스트푸드를 보면 신물이 날 정도였기에 고개를 저었다. 

 "그거 안 질리냐?"

 맞은편에 육중한 그의 몸에 맞게 커다란 가방을 내려놓는 원유찬에게 물었다.

 "넵, 이런거 너무 좋아해서요. 하핫."

 "그렇구만, 유찬아, 조금 있다가 파일 정리한거 보내줄게."

 "넵."

 회사에 샌드위치의 냄새가 퍼져나갈 때 쯤 김우현과 우다영이 손을 잡고서 들어왔다. 

 평소랑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둘을 보니 왠지 마음 한켠이 따듯해지는걸 느꼈다. 

 "둘이 얼른 결혼해라."

 여사친보다는 유부녀가 더 마음 따뜻하게 꼴릴 것 같았다.

 "뭐래, 자리 다 잡고 할거거든."

   

 우다영은 조용히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지만 못 본 척 했다. 

 "아, 소율씨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제 얼굴 기억하시죠? 이쪽으로."

 아직 서 있는 임소율이 김우현의 손짓을 따라 이동했다. 

 "시우야, 유찬아 너네도 와."

 평소처럼 회의 테이블에 모여들었다. 의자에 여분이 있어서 따로 임소율의 것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건 편했다.

 드륵.

 하나씩 자리에 앉은 후에 김우현이 활짝 웃으며 임소율을 소개해주었다.

 "아까 인사했나? 여기는 이번에 시우 밑에서 같이 일할 인턴 임소율씨."

 짝짝짝.

 영혼 없는 박수를 보내는 나와 원유찬과는 다르게 우다영은 진심으로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자기 소개 한 번 할까요?"

 과연 임소율이 자기소개를 잘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쳐다봤다.

 꾸벅.

 단정하게 배꼽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스튜디어스도 아닌데 단정하게 인사할 줄은 몰랐다.

 "안녕하세요, 임소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나다를까 그녀 다운 짧은 인삿말이었다.

 짝짝짝.

 "환영해요~."

 우다영의 밝은 목소리와 함께 다시 박수를 쳤다. 

 "면접 볼 때 설명드렸다시피 저는 사장이고 여기는 음향팀 우다영씨. 저기는 편집 1팀장 남시우씨, 편집 2팀장 원유찬씨에요."

    

 딱히 특별할 것 없는 인사가 끝나고 나는 그녀를 데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소율씨."

 "네."

 그녀를 자리에 앉혀놓고서 이마를 긁적이며 물었다.

 "편집 프로그램 다룰 줄 아는거 있어요?"

 "아뇨."

 너무 당당해서 내가 위축될 정도였다.

 "아하…, 어도비……."

 모르는 눈치였다.

 "저희는 프리미어 프로랑 에프터 이펙트를 사용하는데……."

  

 어도비를 모르는데 어도비에서 만든 프로그램을 알 턱이 없었다.

 "그럼 포토샵은 사용할 줄 알아요?"

 "아뇨."

 "그럼 당연히 피크 잡는것도 모르실테고……?"

 "네."

 "컷 잡는 것도 모르실테고……?"

 "네."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를 향해 환하게 건치를 드러내며 웃어준 후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일어났다.

 "담배 피울래요?"

 "……아뇨."

 "그래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요, 담배만 피고 올테니까."

 "네."

 담배를 한 가치만 입에 물고 나가려다가 그냥 갑을 들고 나왔다. 

 내 얼굴을 본 원유찬도 나를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치익.

 내가 불을 붙이자 원유찬도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뭐래요?"

 "……."

 지긋이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스읍, 후우우~."

 오늘 따라 담배맛이 썼다.

 "하나도 몰라."

 "초짜?"

 "쌩."

 "와우, 고생하십쇼, 형님."

 괜히 얄미운 원유찬을 향해 담배연기를 내뿜자 육중한 몸 치고 빠른 몸놀림으로 피해버렸다.

 "이 쉑……."

 "하핫, 형님 1학년 후배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해보세요."

 "내가 교수도 아니고……. FM으로 가르쳤다가는 내 명에 못 죽어 인마."

 결국 필요한것들만 가르쳐야할 것 같았다.

  

 "마감 많이 남은건 없냐."

 "2~3일이 제일 길어요. 알잖아요."

  

 편집에 주어진 긴 시간이 그나마 2~3일 정도였다.   

 대체로 받은건 당일 혹은 다음 날까지 편집을 쳐서 줘야했다.

 그 기간을 넘은것들은 대체로 야외방송인데 그건 아직 늘솜 스튜디오에 몇 개 없기도 했고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후우."

 마지막 연기를 뱉고나서 손가락으로 꽁초를 튕겼다.

 "에헤이."

 벽에 튕겨 나온 꽁초를 주운 원유찬이 양동이에 넣었다. 

 "여기서 꼰대짓 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네가 가르치던가."

 "하하하핫!"

 우렁차게 웃는 원유찬이 미워서 발길질 하는 시늉을 하자 옆으로 피해버렸다.

 돼지면서 몸이 빠른걸 보니 더 얄미웠다. 

 "올라가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올라갔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녀가 앉아서 컴퓨터를 만지고 있었다.

 "후우."

 쉼호흡을 짧게 한 후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온지 첫 날이고 아는게 하나도 없으니 속으로는 얼마나 갑갑할까라고 스스로 그녀에 대한 이미지를 세뇌하며 말을 걸었다.

 "그럼 처음부터 가르쳐줄게요. 자, 이게 마우스에요."

 달칵.

 "이건 클릭이에요."

 그러자 그녀가 멍하면서도 진심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는데 왠지 수치스럽고 능욕을 당한 느낌이 들었다.

 "여튼. 그럼 아까 오시기 전에 프로그램을 다 받아놨는데."

 쓰잘데기 없는 것들은 다 없애고 현장에서 쓰는걸 하나씩 말해주었다. 

 설명을 하면서 그녀를 보는데 고개는 끄덕이는게 보였다.

 "다 기억했어요?"

 "네."

 "그럼……."

 USB를 꽂아 파일 하나를 열었다.

 "그럼 이거를 편집해볼게요. 보시면 오디오가 비었죠?" 

 "네."

 "여기를 잘라서 붙여야하는데. 방금 알려준대로 한 번 해보겠어요?"

   

 작은 손으로 하려고 하는데 잘 되진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돌린 후에……. 다시 해보세요. 편집 다 되면 말해주세요."

 "넵."

  

 전에 마감을 다 끝내놓은 영상의 원본이라 날려먹어도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부욱.

 옆에 대충 세워놓은 공책을 한 장 찢어서 자주 쓰는 단축키를 적기 시작했다. 

 최근에 손으로 적는걸 많이 해서인지 글씨가 제법 늘어난 상태였다.

 "흠, 만족."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듯 적은 후에 그녀에게 물었다.

 "편집은 어느정도 됐어요?"

 "……반 정도요."

 "흠, 봅시다."

 의자를 끌고와 그녀의 옆에 붙어서 확인을 해보았다. 

  

 "잘 하셨네요. 오늘은 이걸로 연습을 계속할거에요. 여기 자주 쓰는 단축키 적어놨거든요. 외우실 수 있겠어요?"

 "네."

  

 그녀가 영상으로 연습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모르는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가르쳐 드릴게요."

 일주일은 그녀를 붙잡고 하나씩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우선은 내 할 일 부터 끝내기 위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타다다닥.

 빠른 키보드 소리에 옆에서 임소율이 힐끔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저 보시면 안 되고 연습 하셔야 돼요~."

 "네."

 고저 없는 목소리 톤이 재미 없는 친구였다. 

 점심시간. 

 우다영이 먼저 일어나서 말했다.

 "나랑 우현이랑 밥 먹고 올게."

 "그래라~."

 둘이 나가고 이번엔 원유찬이 일어났다.

 "형님 밥 드시러 가시죠. 앞에 보쌈집 한 번 조져야죠."

 "그래, 조지러 가자. 소율씨. 가죠."

 그 말에 임소율이 일어났다. 

 힐끔 그녀의 모니터를 보는데 내가 알려준것만 익숙해질때까지 오전 내내 했던 것 같았다. 

 시선을 내려 책상을 훑는데 내가 적어준 것들을 자신의 공책에 옮겨 적어놓은게 보였다.

 말은 없어도 나름 노력을 하고 있는게 보였다.

  

 "근데 보쌈집이 근처에 있었냐?"

  

 회사 문을 닫고 나오며 묻자 원유찬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럼요."

 "……그런건 어떻게 다 알고 있는겨."

 원유찬이 데리고 가는 곳은 웬만하면 전부 다 맛이 있었다. 

 "점심이 사람들이 몰리는 곳 따라 가보니까 있더라고요."

 "……와우."

 덕분에 오늘 뭐 먹을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서 그건 편했다. 

 주변에 작은 회사들이 제법 있어서 점심임 되면 식당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점심특선으로 시키면 정갈하게 잘 나오는데 보통 이런 곳은 팀장급들이 잘 아는데 신기할 따름이었다. 

 톡. 

 톡.

 밥을 먹는데 옆에 앉은 임소율이 보쌈의 기름진 부분을 떼어냈다.

 유별난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맞은편에 앉은 원유찬이 불편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이유는 나중에 '기름이 있으니까 맛있는건데.'라고 혼잣말을 듣고나서야 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