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다희.
찌르찌르!
세차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집에 돌아온 우다희는 넓은 소파에 앉았다.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는 소리만이 넓은 집에서 유일하게 시끄러운 존재였다.
"……."
홀로 앉아 있는데 왠지 적적함이 느껴졌다.
남편은 출장 때문에 오려면 금요일은 되어야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하는 일도 딱히 없었다.
배우를 하기에는 이미 은퇴를 했고 복귀하기에도 그렇다할 작품도 없었기에 인지도도 없었다.
"……."
뭐 재밌는 드라마가 없을까 하다가 곧 지루함을 느꼈다.
봐봤자 비슷비슷한 드라마였고 중간에 자신이 아는 지인이 나오면 보기가 껄끄러웠다.
진심으로 지인을 응원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전부였던 꿈에 자신은 없었으니 말이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엌에서 차를 가지고 식탁에 앉아 무료하게 창 밖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훅하고 몸을 휘젓고 지나갔다. 안에 있는 반찬들을 보다가 조심스레 챙겼다.
쓰지 않아 접어둔 쇼핑백 하나를 집어 반찬통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부우웅.
집에 있어도 할게 없으니 밖이라도 나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차를 몰아 도착한 곳 2층 문에 작지만 회사 이름이 붙어 있었다.
[늘솜 스튜디오]
여동생의 남자친구가 만든 회사.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길래 한 번더 세차게 두드렸다.
쿵쿵!
그제야 문이 열리며 이름은 잘 모르는 살집이 많은 남자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우다희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저 아시죠?"
"아, 네."
"안에 애들 있나요?"
"네네, 들어오세요."
노래를 들으며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안쪽에서부터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녀를 발견한 김우현과 우다영이 일어났다.
"흐응~, 안녕~."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기에 살짝 놀란 눈이 귀엽고 웃겼다.
"무슨 일이야, 언니?"
우다영의 말에 쇼핑백 두 개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거~, 직접 담근 물김친데 부모님 줘. 이거 아빠 좋아하잖아. 아, 참. 여기 아래에 한 통 더 있는데 그건 우현이가 가져가~."
"오, 웬일이래?"
동생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우현이 보려구 왔지~."
김우현은 방긋 웃으며 같이 안에 든 김치통을 확인했다.
"저희가 가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흐응~, 감사는 무슨~."
그러면서 김우현을 안으려고 하는데 한 발자국 물러나며 선을 그었다.
어딘가 굉장히 서운함을 느꼈다.
그래도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항상 선을 긋는 그에게 말이다.
어떤 흑심도 없이 그저 친한 누나동생 사이이고 싶은데 말이다.
"그럼 누나 서운해~."
"하핫, 죄송합니다."
그는 선을 긋지만 우다영은 오히려 괜찮은 얼굴이었다.
김우현의 성격을 알고 있고 언니인 우다희의 마음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다른 하나는 뭐야?"
우다영의 말에 힐끔 돌아보니 아까 문을 열어준 남자가 있었다.
솔직하게 이름이 기억이 안났다.
"집에서 물김치 드세요? 하나 가져가요~."
"……넵, 감사합니다."
눈치없게 받아드는 그였지만 방긋 웃었다.
혹시 몰라 충분히 가져온게 다행이었다.
"아, 그럼 남은건 시우꺼야? 내가 줄게."
우다영이 쇼핑백을 가져가려고 하자 다급히 챙겼다.
"아~, 이건 내가 줄려고~. 시우가 누나 데리고 2박 3일 동안 진짜 고생했으니까. 미안해서~."
"언니 데리고 움직이려면 힘들었겠지."
"근데 시우는?"
아침에 헤어지고나서 터미널에 간다고 들었지만 지금 시간은 이미 점심을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아, 거기서 찍고 바로 집으로 간다고 했었어요."
"아~, 그래? 흐음~, 어떡하지~."
이미 답은 알고 있었지만 난감한 척 말을 하자 우다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니면 나랑 우현이가 퇴근하면서 갖다줄게."
"아냐~. 너네 차도 없잖아. 내가 갖다주고 오지 뭐."
쇼핑백을 챙기고 다시 돌아가려는데 김우현이 뒤에서 물었다.
"누나, 그럼 시우 보려고 온 거에요?"
"응? 그치, 겸사겸사 너네도 보고. 고생 많이 했거든 시우가~."
자연스럽게 알리바이를 만들고서 바로 회사를 나왔다.
한 통 밖에 남지 않아서 아쉽긴 하지만 괜찮았다.
한편 회사 안에 남은 김우현이 우다영을 보며 말했다.
"시우가 고생 많이 한 것 같지……?"
"응…, 언니 성격 받으려면 힘들텐데……. 저거 또 갖다주면서 붙잡고 한 시간은 떠들거 아니야……."
그녀의 말에 김우현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
촬영을 끝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전히 뜨거운 햇빛과 버스에 틀어진 시원한 에어컨을 맞으며 말이다.
취익.
버스에서 내려 가방을 고쳐메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스읍, 배고픈데……."
편의점에서 김밥과 컵라면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삑삑삑삑.
문을 열고 들어와 가방을 한 쪽 어깨에 걸치는데 부엌에서 소리가 났다.
"……."
순간 등골이 오싹하면서 도둑이 들었나 싶어 주먹에 힘을 꽉 주고 발끝을 세워 부엌으로 들어갔다.
탁탁탁.
도마에 칼질을 하는 소리에 누가 우리 집에 와서 요리를 하나 싶었다.
그럴 사람이 없을텐데 말이다.
"……?"
거실이 보이고 칼질을 하고 있는 우다희가 보였다.
"누나?"
시나리오가 끝났기에 그녀가 집에 있을리가 없었다.
"어~, 우리 시우 왔어?"
"……누나가 왜 여기에……?"
"아니이~."
우다희가 칼질을 멈추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보니까 라면이나 이런거 밖에 없더라고~. 그래서 누나가 반찬 가지고 왔어."
"엥…? 왜요……?"
진짜 궁금해서 순수하게 물어봤다. 그녀가 해줄 의무가 없을텐데도 온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에이~, 누나가 자취하는 동생 밥 해주는 것도 못하니?"
"아…, 그, 그렇죠."
영향력이 이렇게 강하게 남을 정도인가 싶었다.
그래도 차마 시나리오 때처럼 그녀를 뒤에서 꽉 잡거나 섹드립은 치지 못하고 조심스러웠다.
"촬영은 끝났어?"
"네? 네…."
"그럼 얼른 짐 풀고 와봐. 간 좀 봐줘~."
"네에."
이상하긴 해도 일단은 짐을 풀었다.
[몰입도 : 99%]
[위화감 : 7%]
아직 시나리오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몰입도가 높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몰입도의 탓이라고 하기에는 우다영 때에는 이렇지 않았다.
"역시 영향력이네……."
들키지 않도록 가방 안 쪽에 다시 시나리오북을 넣고 부엌으로 나가니 여러 반찬들을 만들고 있었다.
"오다가 재료 사오긴 했는데, 네 입 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네?"
"아…, 근데 비번은 어케 알았어요?"
"응? 치는거 봤잖니?"
"아하…."
나 몰래 들어왔다고는 해도 딱히 화가나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뭐 만들고 있는거에요?"
물으며 슬쩍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자 움찔하는게 느껴졌다.
확실히 시나리오가 끝나니 영향력이 있어도 위화감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슬며시 손을 풀고 그녀가 건네주는 반찬을 맛 봤다.
"진미채랑 콩자반은 좋아해?"
"어, 음…. 좋아하죠. 있음 먹어요."
"그거랑 오래 먹을 수 있게 간단하게 김치도 만들어 봤어. 참."
입에 묻은 양념을 쪽 빨아먹은 그녀가 행주에 손을 닦고 냉장고에서 통 하나를 꺼냈다.
"이거도 직접 담근 물김치인데 한 번 먹어봐봐."
"아…, 네."
엄마처럼 다 챙겨주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낯설었다.
군대를 포함해서 타지에 산지가 벌써 7년이었기에 이런 챙김은 생소했다.
집에서도 반찬은 커녕 뭔가를 들고 오는 걸 딱히 싫어했었고 여자친구들 중에서 이렇게 챙겨줄 정도로 착한 여자는 만난 적도 없었다.
"……이래서 누나를 갖고 싶은건가봐요."
옛날 대학 동기 중에 자신도 누나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 있었는데 왠지 그 친구 생각이 났다.
"푸흣, 그랬어? 저녁은 아직 안 먹었지?"
"네, 아직 안 먹었어요."
시나리오가 아니다보니 일단 나부터가 이 상황이 어색했다.
"저녁 차려줄게. 앞으로는 밥 해먹어. 반찬 해둘테니까."
"앗, 넵."
아마 시간이 지나고 영향력도 내려가거나 여러 작품들을 거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겠지만.
지금은 이 어색한 상황을 최대한 즐기려고 했다.
탁.
다 만든 찬들을 적당히 그릇에 옮겨 담은 후에 통을 닫아 냉장고에 넣었다.
달그락.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데 나를 흐뭇하게 쳐다보는게 영 어색했다.
만났던 사람 중에 연상이 없어서 그런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우선 시나리오가 아니니 이 모든 상황이 예측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맛있어?"
"넵, 누나도 얼른 먹어요~."
"푸흣…. 그래에. 시우는 여자친구 왜 안 만들어?"
같이 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자극적이지도 않았고 정말 누나와 동생이 할 법한 그런 대화들이었다.
영향력이 있어도 시나리오의 표면적인 관계에만 영향을 준 것 같았다.
"누나가 설거지할게."
"제가 해도 되는데……."
결국 설거지까지 그녀가 한 후에 차까지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친구들도 다 결혼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같이 놀 사람 없는거 있지?"
"아하. 그렇구나……."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리액션을 해주는 기계가 되었다.
§
다음 날.
전 날 우다희가 해준 반찬에 찬밥을 전자렌지에 돌려 대충 배를 채우고 회사로 향했다.
버스에 타서 영향력에 대해 고민을 했다.
"……이런식으로 효과가 있으면……."
앞으로 이걸 활용해서 써볼법한 스토리들이 있었다.
분명한건 어제 우다희가 해주는 행동들이 나쁜 점이 없었다는 것이다.
취익.
회사에 도착해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후에 자리에 앉았다.
공책을 펼쳐놓고 펜대를 굴리며 생각했다.
지금 나와 우다희의 관계는 너무나 친한 누나동생 사이였다.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는……. 그건 그대로 유지하면 될 것 같고……."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동생을 귀여워하는 누나로 만들면 될 것 같았다.
나중에 혹여라도 임신을 한다면 모든걸 그녀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럼 다영이인데……."
시나리오 북을 갖게된 이후에 정해진 목적이나 목표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했던터라 우다영과 나의 관계가 적립이 안 된 상태였다.
그나마 원래 갖고 있던 친구 정도라는 것.
"……누나처럼 내 말이라면 다 들어주는……, 그런 느낌쓰로 가야되는디…."
펜대를 인중에 올려놓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보며 곰곰히 생각했다.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우다영이 들어왔다.
"하위~."
등에 기댄채 손을 흔들자 우다영도 피곤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앙녕~, 올만이네~."
"엉~. 피곤해보인다?"
"으~, 너가 없으니까 일을 우리 셋이서 다 해야되잖아~."
"나도 일하다온겨, 왜 그래~."
우다영은 손을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알지이~. 그래서 촬영은 다 끝났어?"
"응, 이제 편집 하면 돼. 이것도 한 일주일 걸릴거 같은디?"
첫 번째에 쓴 연인이라는 시나리오를 제외하고 3개의 작품에서 섹스를 해댔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진 않았다.
그녀의 작품 영향력도 많이 옅어진 듯 했다.
옅어진게 아니라 없다고 보는게 맞긴 했다.
"……전 작품에만 영향력을 미치나보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가 혹시 새로운 시나리오에도 전 작품에 대해 짤막하게 적으면 영향력이 그대로 유지가 될까 궁금하긴 했다.
"……나중에 한 번 해봐야지."
우다영이 일어나 회의 테이블 옆으로 가더니 물을 받았다.
"뭐여, 정수기 생겼어?"
"엉~, 너 촬영 나가는 동안에 도착했어."
"와 씨."
새롭게 생긴 정수기로 다가갔다.
텀블러에 물을 받은 그녀가 내 옆구리를 쿡하고 찌르며 말했다.
"언니랑 같이 있으면서 힘들었지?"
"응? 아니, 괜찮았어. 배우는 배우드라. 내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던데."
물론 중의적인 표현도 섞여 있었다.
그걸 모르는 우다영은 내 어깨를 토닥여 줄 뿐이었다.
"진짜 괜찮았는디…."
"괜찮아~. 내가 동생이지만 언니 성격 아니까~."
"……."
지가 그렇다는데 할 말은 없었다. 오해할 수 있게 그냥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후에 차례로 오는 김우현과 원유찬.
다 모이고 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편집은 일주일 정도 생각하고 있거든?"
"흠, 혹시 필요한거 있으면 말해줘."
나는 지금 당장 필요없었기에 어깨를 으쓱하는데 우다영이 지친 얼굴로 말했다.
"사람 뽑자아~. 일이 너무 많아아~."
김우현이 쌓아놓은 인맥과 평판 덕분에 일이 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김우현도 난감한지 볼을 글적이며 말했다.
"나도 다 계약이 될 줄 모르고 이리저리 다 넣어봤는데……. 다 되버렸네……. 하하……."
보통은 기존의 거래처와 계속 거래를 하는 편인데 평소 좋게 봤던 김우현의 창업 소식에 이곳저곳에서 일이 쏟아졌다.
그걸 보면서 얘는 사업에 재능이 있구나 싶었다.
김우현의 아버지와 형도 사업을 한다는데 거기서도 도움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일 많은건 좋지 뭐……. 아, 나는 이거 편집 때문에 시키지 말어."
홀로 쏙 빠져나가는 나를 보며 우다영이 으~ 하며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을 동시에 보냈다.
나는 피식 웃으며 혀를 내밀어 약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가 약한척하며 김우현을 쳐다봤다.
"쟤 좀 봐아~. 진짜 사람 열 받게 하잖아아~."
"하하하!"
친구와 여자친구의 친한 모습에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면 정직원으로 뽑기에는 아직 좀 그래서……. 일단 인턴으로 한 번 모집해볼게."
인턴이란 말에 옆에 앉은 원유찬이 움찔했다.
"왜?"
"인턴에 대해 안 좋은 기억이 조금 있어서요……."
"뭔데."
"인턴으로 오면 한 달 못 버티고 나가는 친구들이 많아서……."
직업 특성상 대학을 막 졸업한 이들이 오는데 아무래도 어리다보니 격한 근무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네가 워낙에 빡센데서 일해서 그래."
매일 야근을 했던 곳이라고 들었으니 어쩌면 인턴이 도망가는게 자연스러운 회사였을 수도 있었다.
"그럼 공고는 일단 내볼게."
수입은 괜찮았지만 아직 많은 빚 때문에 인건비를 겨우 주고 있었다.
"그려, 그럼. 회의는 여기서 끝?"
"예스."
회의가 끝나자마자 원유찬과 함께 담배를 태우러 밑으로 내려갔다.
치익.
"스읍, 후우. 거기 인턴 추노 많이 함?"
"후~. 네. 일이 좀 빡세기도 하고 급여도 짜서……."
"너도 참 고생했구나."
1년 새에 원유찬의 살이 빡 찐데에는 다 이유가 있던 모양이었다.
학교에서는 통통 느낌이라면 지금은 후덕한 아재가 되어 있었다.
"뭐 인턴오면 잘 하겠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가 걱정하는건 다른거였다.
"일을 다 가르쳐야하잖아요……. 특히 비전공자 오면……. 아, 그래도 형님이 팀장이니까 형님 밑으로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후배가 가르쳐야지."
"……그거 후배혐이에요."
"뭐래, 이 쉑. 하극상이야 그거."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막연하게 괜찮은 애가 오겠지 싶었다.
정직원이 아닌 인턴이었기에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다.
원유찬의 말처럼 이상한 놈만 아니면 된다는 마인드였다.
§
다시 찾아온 주말.
쏴아아아─!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컴퓨터 의자 앞에 앉아 공책을 펼쳐놓고 여러 낙서들을 했다.
"다영이랑 다희누나……. 잠깐만……."
우르릉!
문득 생각이 났을 때 밖에서 번개가 번쩍하고 방을 비췄다.
"오, 타이밍 보소."
밖을 보며 감탄하다가 공책에 새로운 컨셉들을 적었다.
"스읍, 한 번도 쓰리썸 해본 적 없는데 이거면 할 수도 있겠네."
포인트도 충분하니 뭐든 가능할 것 같았다.
"일단은……. 누나 부터 확실하게 캐릭터 컨셉을 맞춰놔야겠다."
몰입도가 100%를 찍었긴 하지만 그건 그 작품에 한해서였다.
"이번엔 포인트 없이……."
우다영을 통해 대충 없어도 어떻게 해나가야할지 눈에 보였다.
평작 정도는 이제 클리셰로 만들 수 있었다.
"스읍……."
시나리오가 끝나고도 찾아와서 내게 해주던 누나의 모습이 생각보다 괜찮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부부로 하면 몰입도랑 위화감이 팍 떨어지니까……."
개연성없이 그저 부부로 설정하면 위화감이 아주 빠르게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러니 개연성을 집어넣어야했다.
그녀가 나와 부부놀이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일단 배우니까……."
사각사각.
우다영에게 써보려고 했던 스토리를 보정해서 우다희에게 적용을 시켰다.
"사이 좋은 친구……, 시즌 2."
우다영으로 10화 정도 찍었고 이제 우다희로 진행할 예정이었다.
"남편은 일하는걸 싫어한다고 했으니……."
공책에 끄적이는 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어우러졌다.
대충 짜놓은 스토리를 보면서 흡족하게 웃었다.
"전작에 썼던 시나리오를 대충 요약한 후에……. 캐릭터는 그대로 가고……."
영향력에 대해 실험해보기 위해 전에 썼던 시나리오를 요약했다.
캐릭터 설정 역시 그대로 가져와 적었다.
"……나중에 몇 번 하다보면……. 사람이 바뀌는지도 궁금하긴 하네."
과연 같은 캐릭터로 몇 작품을 연기하면 사람이 어떻게 변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사각.
공책에 점차 완성되어가는 컨셉들.
다음 날, 일요일이 되자마자 바로 컴퓨터에 시나리오를 적었다.
내가 생각해둔 여러 컨셉들을 전부 다 옮겨 적다보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나중에 내가 진짜 남편이 되는 것도 스읍…, 개꼴리겠는데? 최혁? 맞나? 그 사람은 전 남편으로 하고……. 일단 그건 나중에……."
지금은 영향력에 대한 실험이었기에 짧은 스토리를 짰다.
"이것도 2박 3일이긴 한데……."
포인트를 쓰지 않으니 하루는 꼬박 몰입도를 올리는데 써야했다.
[사이 좋은 친구]
사연을 받아 그 사연을 직접 재연한 후에 리뷰를 하는 컨텐츠.
당연하게도 사연 역시 내가 써야했다.
"부부놀이를 한 번 제대로 해봐야지."
결혼한지 몇 년 된 부부로 설정을 잡고 시나리오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일요일도 다 지나갈 쯤에 겨우 완성한 시나리오.
"……흠…, 사연을 준 사람도 이름이 필요할텐데……."
내 이름을 적어넣을 순 없기에 그럴싸한 닉네임을 생각했다.
"입에 착 감기는거 없나?"
그렇게 지어낸 닉네임을 적었다.
이제는 시나리오를 적용할 최적의 시간을 정해야했다.
"평일로 하는게 낫겠지……?"
가장 좋은건 주말이겠지만 일주일 동안 야동이나 볼 순 없었다.
"어차피 짧으니까."
이 짧은 시나리오를 위해 밤을 새 시나리오를 북에 옮겨적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중간중간 손목을 풀어주며 적은 시나리오.
[AM 01:45]
"아오…, 아파, 시발…. 능력 이거 좋은거 맞아?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직접 적어야되는겨! 아놔."
쥐 날 것 같은 손을 털면서 이번엔 소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대본을 만들어 usb에 넣었다.
다음 날 아침.
사무용품점에 들려 대본을 뽑은 후에 가방에 넣고 시나리오 북을 확인했다.
[로딩 : 100%]
로딩은 끝난 상태였다.
시작하는 시간은 내일 오후부터였다.
"누나하고 나의 관계부터 확실하게 해놓고…. 다음엔 다영이."
자매와의 쓰리썸을 목표로 몇 개의 에피소드를 이어지도록 구상해놓고 있었다.
사무용품점을 나오는 나는 따뜻한 햇살을 맞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쏴아아!
그러나 내가 맞은건 추적추적 내리는 습한 소나기였다.
아무래도 나는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너무 쓰레기인 것 같았다.
월요일은 딱히 다를거 없는 하루였다.
시나리오의 시작은 화요일 부터였기 때문에 느긋하게 월요일은 일이나 하면서 쉴 수 있었다.
타다다닥.
편집을 하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고 옆에 앉은 원유찬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봤다.
"형님, 오늘따라 빠르십니다?"
"응? 그런가?"
"오늘 대충 전체적인 스케일만 잡아놓으려고."
"흐음."
드륵.
의자를 끌고와 내 옆으로 붙더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동안 찍었던 우다희의 영상들이 보정하나 없이 펼쳐져 있었다.
"와…, 여긴 어딥니까?"
"응? 아, 수영장."
모니터 속 우다희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으며 웃고 있었다.
확실히 배우를 했었고 또 은퇴를 한 지금에도 관리를 한 탓에 복근이 남아있었다.
밑가슴과 잘록한 허리 하복부에 있는 스트랩은 자꾸 시선을 고정시키게 만들었다.
"배우라 다르긴 하지?"
내가 묻자 원유찬이 나도 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원유찬의 머리를 턱하니 짚어서 헝클어 뜨렸다.
"그러다 닳긋어~."
핀잔을 주며 다시 편집을 이어갔다.
하늘이 흐린것만 제외한다면 딱히 다를거 없는 평범한 직장생활이었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화요일. 시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금…."
오후 4시. 바로 우다희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누나, 부탁할게 있는데 볼 수 있어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답장이 왔다.
[무슨 일이야?]
[사이 좋은 친구 찍으려고 하는데……. 다영이는 안 한다고 해서ㅠㅠ]
거절할리는 없지만 카톡을 보냈다.
[불편하시면 거절 하셔도 돼요!]
[아냐~, 해줄게! 괜찮아! 그럼 저녁에 볼까? 누나가 그쪽으로 갈게!]
시나리오 안에서는 어떤 상황이든 내가 갑이었다.
길에서 우다희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절만 한다면 내가 원하는 시간과 상황으로 가능했다.
이번 시나리오에는 그녀의 남편까지 영향력에 들어가도록 조절했다.
그렇게 심한건 아니었고 그저 자그마한 장치를 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