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루티 커틀렛 (1) >
루티 커틀렛. 인간 같지 않은 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영민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애초에 그녀와 농담 따먹기 같은 말을 하던 것도 그녀를 기만하기 위한 위장이었을 뿐, 그녀에게 좋은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영민이었기에 분위기는 급냉각되었다.
“이 미친 년이··.”
대를 위한 소의 희생. 이미 간접적으로나마 미래의 상황을 접한 영민은 어떤 상황이 되었을 때, 필요하다면 다른 이들을 희생 시킬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달랐다.
애초에 미래에서도 그녀가 사람들을 희생 시키고 힘을 키운 이유 자체부터 대의나 명분,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영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녀가 S등급 최상위, 아니 그것을 넘어서려 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데스 나이트를 되살리기 위함.
정확히는 그녀의 약혼자였던 이를, 순리를 거슬러 되살리기 위해 힘을 쫓고 진리를 탐욕했다. 온갖 아이템을 소유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섯 군주 중 하나인 죽음의 왕과 손을 잡기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민도 때를 봐서 먼저 그녀의 뒤통수를 치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 때문에 일이 꼬이는가 싶더니 결국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순서와 과정은 엉망이지만 영민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더 강해지기 전에 끝장을 보는 편이 낫겠지.
네크로맨서의 고유 능력을 지닌 그녀의 특성상 더 고레벨의 던전이 열리고, 강력한 몬스터의 시체가 늘어날수록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최대한 일찍 승부를 보는 편이 좋았다.
“너도 네 애인이랑 똑같이 해골바가지로 만들어주마. 명계에 가서 사이좋게 지내면 되겠네.”
그 순간, 여유를 잃지 않고 생글거리던 루티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살기와 죽음의 기운이 뒤섞이며 해일처럼 일어났다.
“감히··.”
북풍한설이 이보다 차가울까. 주변이 산 채로 얼어붙을 듯한 냉기가 그녀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영민의 도발이 제대로 먹힌 것이다.
하지만 영민은 기뻐할 틈이 없었다. 그녀가 작정하고 내뿜는 죽음의 기운에 저항하기 위해 온갖 버프들을 짧은 시간 뒤집어써야했다.
애초에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고 던전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기 위해 존재감을 크게 감추지 않은 영민이지만 그대로는 위험할 만큼 날이 선 기운들이 전신을 옭죄었다.
‘쉽지는 않아.’
온 몸이 저릿한 기운에 대항하며 영민은 속으로 셈을 해보았다. 과연 지금 그녀의 전투력은 어느 정도일까. 8~9레벨 던전의 몬스터들을 언데드로 만들어 부리던 그때와는 상대가 안 될 것이 분명한데, 이쪽도 패널티는 있었다. 뇌신강림과 성역선포, 럭키포텐
의 쿨타임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아무리 시간을 끈다해도 쿨타임을 모두 채우기는 어려워보였다.
그렇다는 것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비벼봐야 한다는 소리인데, 버서크와 신성폭발이 최후의 보루가 되어준다지만 시간 끌기에 능한 네크로맨서인지라 그것도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왜, 뼈다귀랑 쿵짝쿵짝 하는 시체성애자 아니었나? 본인까지 해골이 되면 더 좋겠군!”
그래서 더욱 그녀를 도발했다.
“흥. 같잖은 짓을 하는 군.”
하지만 그녀는 지독한 살기를 유지하면서도 최대한 침착을 되찾았다. 약혼자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집착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이성의 끈은 놓지 않은 모양이었다.
‘젠장, 이쪽이 먼저··.’
실패를 깨닫자마자 영민은 그녀에게 들이닥칠 준비를 했다. 조작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네크로맨서를 상대로 시간을 줄수록 불리하니 거리를 좁혀 시체를 일으킬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시작도 전에 막혀버렸다.
“이들을 상대하고도 입을 나불거릴 힘이 남아있을지 볼까?”
휙하고 손을 내젓자 공간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아공간이 열리며 죽은 자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미친!!”
하나 둘 수를 늘리는 언데들의 낯이 묘하게 익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프랑스 팀’이었다. 프랑스 팀 전원이 그녀의 언데드가 된 것! 아니, 어쩌면 애초부터 그녀의 언데드였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마도 대부분이 S등급일 놈들이 모조리 그녀의 종이 되었다니? 아직 수준 높은 몬스터들의 시체가 공급되지 않았다고 얕보던 영민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이길 수 있을까?’
오랜만에 눈 앞이 아찔해졌다.
이길 수 있을까, 탈출석을 써야하나. 도망 갈 수는 있을까.
지금이 아니라면 더 상황이 악화될텐데.
하나하나의 능력으로는 자신의 상대가 아닐 게 분명하지만 상대는 무려 일백. 그것도 언데드의 힘을 얻고 네크로맨서인 루티의 보조까지 받는 놈들이다.
‘아니, 어쩌면 기계 능력까지 갖췄을지도··.’
거기에 한 가지 더. 어쩌면 이미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개조 시술까지 받은 몸일지 몰랐다.
애초부터 루티 커틀렛이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손에 넣었거나 최소 손을 잡은 상태였으니 그것에 대한 가능성도 무시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개조 되지 않았을 확률이 더 낮을 터였다.
그런 놈들이 섬세한 조종까지 받아 일시에 덮쳐온다면 신성폭발을 쓰고도 위태로울 수 있었다.
꿀꺽
침이 절로 넘어가고 온 몸에 땀이 번졌다.
이 모든 것들은 그녀의 곁에 있는 최강의 데스나이트 마크가 움직이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약혼자의 영혼을 강제로 가두어둔 그릇인 만큼 루티가 심혈을 기울이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든 그가 움직인다면 싸움은 훨씬 어려워질 게 분명했
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질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죽여라. 가장 비참하게.”
이내 그녀의 명령에 따라 일백의 언데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월한 조종을 위해 최소한의 본능을 제외한 모든 것을 삭제해버린 놈들이었다.
오직 그녀의 명령에 따라 목표한 적을 죽여야한다는 본능이 놈들을 휘감았다.
S등급 헌터 특유의 강대한 고유 능력이 태산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차핫!”
영민도 지지 않고 달려들었다.
S등급의 헌터?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일백이나 되는 머릿수? 똥개 백마리가 덤벼도 범 한 마리는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마도 공학과 죽음의 기운으로 강화된 육체? 이쪽에는 무지막지한 템빨이 있다!
놈들의 기운과 상반되는 신성의 힘을 극도로 끌어올리며 영민이 거칠게 검을 내질렀다.
까가가강!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로봇 만큼은 아니지만 마나와 사기, 마도공학 합금으로 만들어진 놈들의 육체는 +13 봉인의 드래곤 슬레이어를 막아냈다. 꽤나 힘을 쏟은 첫 번째 일격에 적중 당하고도 신체 일부가 움푹 패인 채로 날아가 쳐박히는 것이 고작인 것이다.
신성의 힘까지 깃든 만큼 쉽게 복구가 되지는 않았지만 더듬더듬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영민이 혀를 찼다.
“이건 어떠냐!”
강력한 신성을 담은 고속의 연참, 헤븐즈 드라이브!
다시 한 번 밝게 빛난 드래곤 슬레이어가 근접해오는 세 놈을 동시에 베어버렸다.
“젠장.”
이번에는 제대로 먹혔다. 세 놈 중 둘은 오른 팔을 잃고 한 놈은 팔 하나와 다리까지 한 쪽이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놈들이 기계인간이자 언데드라는 것이다.
남들 같으면 고통에 몸부림치거나 출혈과다, 혹은 쇼크사까지 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팔이 날아가건, 피가 철철 흐르건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만약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고유 능력을 이용해 원거리 공격을 시도하거나 자폭을 하겠지.
쓰러지는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로 덤벼드는 놈들을 간신히 막고 베어내며 영민이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모두가 격퇴한다는 생각대신 마음 속으로 입체적인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들어오는 놈들만 골라서 베었다.
체력과 마나의 소모는 컸지만 아주 효과적인 전투법이었다. 백기나 되는 언데드 중 무작정 달려들던 십여 기가 박살이 났으니까.
‘어쩌지. 이대로는 힘들다.’
그러나 영민은 그것에 만족 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힘의 소모가 빨랐고 장기전으로 갈수록 누가 불리해질지 명확했으므로.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놈들을 ‘조종’하는 사람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발버둥 쳐봐라. 그래봐야 너는 가장 비참하게 죽게 될 테니까.”
[영혼 분리의 저주에 저항했습니다.]
[침묵에 저항했습니다.]
[쇠약의 저주에 저항했습니다.]
[부패의 저주에 저항했습··.]
영민이 버텨내자 루티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온갖 저주를 쏟아 붓는가 하면 언데드들의 스펙만 믿고 덤비던 것을 전략적인 움직임으로 바꾸어 조종하는 것이다.
영민의 ‘영역’안으로 언데드들이 들어오는 빈도는 낮아졌고 원거리 공격과 위력적인 이능 공격을 더 자주 뿜어댔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
턴 언데드를 떠올렸지만 이내 지웠다. 일반적인 언데드라면 모를까, 기계 인형의 속성까지 함께 지닌 놈들인 만큼 그런 방법이 통하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그에게 주목했다면 루티 역시 그가 사용하는 신성 주문 ‘턴 언데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터, 대비가 되어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 마당에 턴 언데드처럼 준비 동작과 시전 시간이 필요한 능력을 사용한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몇 번이나 놈들을 떨치고 루티를 직접 타격하려 시도를 했지만 번번히 데스 나이트 마크에 막혀버렸다.
‘내 아래가 아니야.’
심지어, 그녀의 곁에 있는 데스 나이트 마크는 자신과 일대일로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거물이었다.
‘분명 실패했을 텐데··.’
짧은 공방이었을 뿐이지만 영민은 놈의 수준과 이유를 알아차렸다.
놈의 심장부에 박혀있는 신비한 돌.
바로 그가 양보한 바 있는 ‘생명의 돌’이 힘의 원천인 것이다. 분명 강태성의 기억 속에서는 그녀가 생명의 돌을 다루는 것에 실패해 오히려 적잖은 손해를 보고 생명의 돌을 팔아치웠는데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성공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때처럼 ‘손상된 생명의 돌’이 아니라 온전한 상태였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거의 맞았다. 생명의 돌을 타락시키려던 그녀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몇 가지 장치를 통해 생명의 힘을 역전환 시키는 것에는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생명의 힘은 죽음의 힘으로 변환되어 마크의 원천이 되었고, 놈은 S등급 헌터의 힘을 뛰어넘
는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도박을 하는 수밖에.’
이쯤되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신성 폭발을 쓴다면 인형들은 처치 할 수 있어도 마크와 루티까지 어찌하기는 어려워보였다.
그렇다면 믿을 것은 한 가지.
가진의 운 뿐이다.
“홀리 노바!”
영민의 힘에서 순백의 빛이 뿜어져 모든 존재를 밀어냈다. 삿된 존재들에게는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파동이지만 ‘속성 전환’을 통해 기계 속성을 앞세운 놈들에게는 위력이 급감 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루티와 마크에게는 속성 전환 따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위력에 불과했고.
하지만 홀리 노바 속에 녹아 있는 또 다른 효과, ‘피스 메이커’가 발동하며 일시적으로 인형들이 전투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귀여운 짓을 하는 구나.”
때문에 루티가 다시금 손을 흔들어 공격을 명령하려는 순간, 진짜 영민의 노림수가 발동했다.
“럭키 박스!”
모든 것을 건 행운의 상자가 물음표 가득한 모습으로 그들의 사이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희망이 튀어나왔다.
[오래된 시계 태엽(에픽)(소모)을 얻으셨습니다.]
< 138화 - 루티 커틀렛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