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배후 (6) >
“다들 괜찮아요?”
던전에서 빠져나온 아렌은 곧장 탈출한 미국 팀원들을 살뜰히 챙겼다.
‘바뀌었군.’
목소리의 톤 부터가 다른 것이 아무래도 아렌에서 아리스로 바뀐 모양. 그들의 등장에 민호와 가람도 얼른 달려왔지만 강중만만 꼴이 엉망이고 척 보기에도 가장 멀쩡해보이는 철우와 영민이기에 소란을 떨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국 팀의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그들을 따라 함께 안으로 진입했던 열 다섯 명의 헌터 중 무려 열이나 죽고 셋이 중상을 입은 것이다.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마구 날뛴 탓에 나머지 인원들의 몸에도 사기가 침투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시간
을 들여 신성력으로 정화하면 무리 없이 완치 할 수준은 되었다.
S등급 헌터 열이라니. 아무리 S등급 헌터를 많이 보유한 미국이라도 상당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말이 열이지, 대한민국의 S등급 헌터 전부보다 많은 숫자가 아닌가? 물론 질에서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아리스와 요한은 살아남은 이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남
은 신성력을 쏟아 부었다.
우우우웅-
그때, 그들이 빠져나온 던전에 변화가 일어났다.
“초기화 되는 건가?”
던전이 스스로 클리어되고 초기화를 진행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마지막 대폭발에 휘말린 던전 보스 몬스터가 죽어버린 모양이었다.
“어머, 여기들 모여 있었네?”
던전이 다시 리셋되는 것을 구경하고 있던 영민이 뒤통수에 들려 온 목소리에 와락 인상을 구겼다.
‘아, 쟤도 있었지.’
루티 커틀렛의 등장이다.
상극의 힘을 지녔기 때문인지, 성향이 안 맞아서인지 이전에도 사이가 안 좋던 성녀 아리스 때문에 내려오지 않나 싶었는데 일이 다 끝나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양민 학살에 특화된 고유 능력을 지닌 만큼 어쩌면 그게 더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나 몰래 재미난 일들을 벌였나봐? 이런 맛있는 기운들을 어디서 얻었을까?”
이런 전쟁터와는 어울리지 않는, 매혹적이고 육감적인 몸매가 더욱 돋보이는 옷을 입고 나타난 그녀는 살랑살랑 치료 중인 미국의 헌터에게로 다가가 쑤욱 어떤 기운을 뽑아올렸다.
“어?”
몸속 깊숙이 침투해 신성력에도 쉽게 뽑히지 않던 사기가 너무도 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요한이 쏟아 붓던 신성력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급속 회복을 일으켰다. 회복을 방해하던 기운이 사라진 덕분이었다.
“같은 계열이라는 건가?”
실실 미소를 띄운 루티는 맛있는 음식을 빼어먹듯 그들의 몸을 파고 든 사기들을 쪽쪽 빨아먹었다.
덕분에 중상을 입은 채로 회복도 쉽지 않던 헌터가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영민이나 철우 모두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끄응. 괜히 어려운 길로 돌아간 기분이군.’
그들을 그렇게도 곤란하게 만들었던 사기를 너무도 쉽게 다루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어째 바보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위는 정리가 된 건가요?”
하지만 표정에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얽히기 싫은 상대인 만큼, 당장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생각도 없는 것이다.
“아마도?”
루티는 그저 빙긋 웃어보일 뿐이지만 영민은 뜨끔 마음이 저렸다. 아무도 문제 삼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 팀이 단독 행동을 한 것은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영민도 모르는 한 가지가 있었다.
이들 중 정확히 약속을 맞춰 움직인 팀은 단 한 곳도 없다는 것. 미국은 미국 대로, 프랑스는 프랑스 대로 제각각 움직이며 일을 벌인 것이다. 단지 한국이 그 중 가장 빠르게 움직였을 뿐. 누가 누구를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었다.
“나 없는 동안 재미들을 본 것 같은데, 이건 내가 가져도 되지?”
“물론입니다. 누님.”
어차피 다른 이들이 가져봐야 독 밖에 되지 않는 기운이기도 하니, 그녀를 제지 할 사람은 없었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치료가 가능해진 미국 팀은 부상자를 추슬러 위로 올라갔고 한국 팀도 적당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갔다.
뭔가 흔적이나 자료, 아이템 따위가 남아있지는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인형들이 가지고 있던 아이템들도 던전이 폭파되며 몽땅 사라져버린 상황.
나머지 뒤처리와 사태 수습은 뒤늦게 나타난 헌터협회에 맡기고 세 팀은 각자 휴식에 들어갔다.
‘아깝다··.’
한국 팀 역시 나이트메어를 이용한 장거리 이동으로 안전 지대에 도착했다. 하지만 영민은 진한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번 작전 도중 ‘어떤 일’을 벌이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하지만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그 인형들의 등장으로 모두 엉망이 되어버렸다.
‘기회였는데··.’
마지막까지 고민이 많았지만, 힘이 너무 많이 빠져버렸다. 성역 선포와 럭키 포텐이 쿨타임 중이라 믿을 것은 버서크와 신성 폭발 정도였는데, 그것만 믿기에는 부족함이 있던 것이다.
아쉬움에 몇 번이고 입맛을 다신 영민은 어쩔 수 없던 상황을 인정하고 다시 현재에 집중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죽이고 얻은 ‘특성’을 확인했다.
“마도 공학 전문화라, 이러니 그런 짓이 가능했지.”
놈이 가진 고유 능력이자 이제는 영민의 특성이 된 ‘마도 공학 전문화’는 그 자체로 방대한 마도 공학에 대한 지식을 가르쳐주는 능력이었다.
문과를 나온 영민이 마도 공학의 총학을 줄줄이 꿰게 되었으니 그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거, 비슷한데?”
가만히 앉아 마도 공학 전문화에 대해 연구를 하는 동안 영민은 이것이 강태성의 기억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것을 떠올리면, 거기에 대한 정보와 이론이 줄줄이 딸려나온다.
현재까지 개발된 모든 마도석 무기들을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구동 원리와 구조, 가상의 설계도가 머릿속에 나타났고 심지어는 개량할 방법까지 떠올랐다.
그저 무기의 형태와 스펙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말이다.
아니, 그 뿐이 아니었다. 아직은 만들어지지 않은 무기들.
즉 강태성의 기억 속에만 있는 무기들을 떠올려도 마찬가지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그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식이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휘유. 장난이 아니군.”
영민이 엄살처럼 혀를 내둘렀지만 그 지식의 양이나 깊이는 상상 이상으로 방대했다.
이러니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그 미친 인형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겠지. 충분한 상상력과 합리적인 사고만 있으면 어떤 무기든, 장비든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말도 안 되는 상상에 대해서는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드래곤도 한 방에 죽이는 무기’ 같은 것은 너무나 막연한 상상일 뿐이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여러 합리적인 조건들이 갖추어진다면 비슷하게나마 방법이 떠오를 테지만 허무맹랑한 상상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계속 연구하고 상상할수록 강해지는 능력이랄까.
영민은 마도 공학 전문화에 대해 그렇게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그 자신이 가장 잘 활용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도.
“그것들을 이제 만들 수 있겠는데?”
영민에게는 미래에 대한 정보가 있으니, 미래에나 등장할 보조 도구들을 당장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나 농도 측정기부터 던전 제어기까지. 다양하고 효율적인 도구들이 머릿속에 마구마구 떠올랐다.
‘가만?’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행복감에 젖어있던 영민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석고처럼 굳어졌다.
“미친!”
소파를 박차고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
소환한 것은 나이트메어. 아침이 밝아오고 있지만 아직 다행히 밤은 완전히 떠나지 않았고 나이트메어의 악몽 탐색이 발현되었다.
영민과 나이트메어가 어둠을 찢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 * * * *
새벽이 파랗게 밝아오는 늦은 밤. 차가운 날씨에 맞지 않게 얇고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콧노래를 부르며 파괴된 도심을 거닐었다.
이미 폐허가 된 도시에는 흉가가 즐비했고, 오로지 본능만 남은 거친 사내들이 즐비했지만 요염한 색기와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풍기는 그녀에게 감히 덤비거나 접근하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어둡고 좁은 골목까지 거침없이 돌아다니더니 폐허 중 하나에 생겨난 다소 위험해 보이는 입구 안으로 망설이지 않고 몸을 들이 밀었다.
그리고 그녀를 조심스레 뒤따르던 인물 역시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이 들어간 것은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던전.
그 수준은 낮지 않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 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동생? 아무리 그래도 스토킹은 사절인데.”
“잃어버린 물건이 있는데 그걸 누님이 가지고 가신 것 같아서 말이죠.”
능글맞게 농담을 던지는 여인은 루티 커틀렛,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사내는 영민이었다.
그 짧은 대화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탐색을 마쳤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당연히 연애 한 번하자는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흔적도 남지 않고 알려지지도 않는 던전 안으로 들어온 것이고.
“‘그거’, 누님이 가지고 있죠?”
“글쎄? 우리 동생이 뭘 말하는 걸까?”
영민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루티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영민의 입에서 정확한 워딩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시치미를 뗄 생각인 모양.
뻔뻔하기 짝이 없는 그 모습을 보며 영민이 표정을 굳히며 다시 물었다.
“질문을 바꿔볼까요? ‘그 로봇’, 누님의 작품이죠?”
영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척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로봇이라니? 이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타고 있던 그것 뿐이었다.
“호호. 눈치챘어? 감이 좋은데, 동생?”
루티는 의외로 순순히 인정을 하면서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누나 동생 놀이를 하는 듯한 친근한 어조도 그대로였다.
영민 쯤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일까.
강태성의 기억 속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얕보였다는 분노가 솟아올랐다.
“대체 몇이나 희생 시킨 겁니까?”
예상컨대, 그 로봇의 몸체를 이루던 ‘물질’은 인간의 생명력과 공포, 절망, 고통을 깔아넣어 만들어 낸 괴물이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고유 능력인 ‘마도 공학 전문화’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성질의 것. 그렇다는 것은 ‘조력자’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
사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강력한 음의 존재가. 처음에는 마족 계열을 생각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당장 지구에 열린 최고 수준의 던전은 7레벨이 고작. 거기서 나오는 마족이라봐야 중상급 수준일 게 뻔한데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그 정도
에 만족 할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다.
그러면 누가 있을까?
강태성의 기억 속에 그런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루티 커틀렛 뿐이었다.
“저런. 희생이라니, 모두 자기들이 좋아서 한 일인 걸.”
“····뭐? 설마··.”
그녀의 대답에 영민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설마 그렇다는 것은····.
“산 채로 제물로 삼은 거냐?”
“어머어머. 무서워라.”
루티는 살짝 웃기만 할 뿐이지만 영민은 그것이 대답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137화 - 배후 (6)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