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배후 (5) >
“헛?”
“뭐야?!”
그 순간, 맹렬한 기세로 미국 팀을 몰아붙이던 인형들이 일제히 어느 지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과부하 상태에서도 최대치까지 마나를 끌어올리면서.
“흥.”
뇌신으로 변한 영민의 공격은 그야말로 경동천지 할 위력을 지녔지만 수십의 S등급 인형이 능력을 발휘하고 몸으로 떄우니 가로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300% 데미지의 효과로 십여 기의 인형들이 고철로 변해버리는 성과가 있었지만, 어쨌든 놈들은 시간을 버는 것에 성공했다.
“한 방으로 끝일까봐? 뇌룡 출격!”
하지만 영민도 실망을 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힘을 끌어모아 뇌룡 출격을 날렸다.
힘을 소모할수록 뇌신 강림을 유지 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기는 하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머뭇거리다 놓칠 수는 없었다.
“뇌룡 출격! 뇌룡 출격!”
연거푸 쏟아지는 뇌룡의 공세에, 인형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주인을 보호하는 것 뿐. 덕분에 인형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어가고, 급기야 한미 연합팀의 절반에 해당하는 인원까지 떨어졌다.
파츠츠츳
“에고, 에고. 힘들구만.”
동시에 뇌신 강림의 지속시간도 끝이 났다. 신과 같은 힘을 내뿜던 그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속수무책 당하기만 하던 인형들도 조금은 여유를 찾았다.
“이제는 맡겨두라고! 나머지는 우리가 끝장을 내주지!”
그럼 놈들을 향해, 아렌이 누구보다 저돌적으로 뛰어들었다. 전율스러운 영민의 강함에 호승심이 일어났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기에 놈들에게 몸을 풀려는 것이다.
성녀로서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고, 강화계의 능력까지 극성으로 끌어올린 그녀는 이미 고작 S등급 세 기에 막혀있던 아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신성과 마나가 뒤섞여 뿜어지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주먹질 한 번 한 번에 막아내는 인형들의 기계 부품이 파괴되고 육체가 붕괴되었다.
‘뭐,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마구 날뛰는 그 모습을 보며 영민은 살짝 어깨를 으쓱 거렸다. 아무래도 큰 힘을 썼으니 패널티라 할만한 반작용이 클 것이라 생각한 모양인데, 사실 영민은 조금의 허탈감이 있는 것 말고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소모된 마나야 최상급 마나 포션과 최상급 마나 재생 포션이면 금세 차오를 테고, 지금도 충분히 전투를 벌일만한 마나가 남아있기도 했으니까.
‘굳이 잔챙이를 맡아준다면 나야 좋지.’
하지만 귀찮은 뒤처리를 맡아준다니,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영민은 인형들로부터 자유로워진 틈을 타, 애초에 목적했던 장소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심판의 검!”
그리고 신성의 힘을 담아 일격을 내질렀다.
까가가강!!!
“··?!”
작두를 썰 듯 거칠게 검을 내리긋는데 상당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검에 커다란 무언가가 걸린 것이다.
+13 봉인의 드래곤 슬레이어쯤 되니 자르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저항감과 반탄력이 상당한 것이, 강도가 대단한 물질에 닿은 듯 했다.
‘뭐지? 신소재 같은 건가?’
티잉
결국, 어느 정도를 베다가 드래곤 슬레이어가 튕겨나갔다.
쿠구구궁
영민이 놀라는 사이, 일부가 베어진 ‘어떤 것’이 몸을 일으켰다. 족히 5M는 될만한 거대한 크기. 인형 같기도 하고 골렘 같기도한 그것의 안쪽에서는 익숙한 마나가 느껴졌다.
“미친 놈 아니랄까봐 별 짓을 다하는 군.”
바로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마나다.
저것은 놈이 조종하는 로봇 쯤 되는 모양인데, 투박하게 못생긴 외형과는 달리 그 박력이 엄청났다.
“과연 대단하구나, 기적의 연금술사. 내 아이들을 부수고 내가 이것까지 움직이게 만든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바위덩이로 위장을 하고 있던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전형적인 악당의 멘트를 하며 모아두었던 힘을 방출하기 시작했다.
‘인형’들도 매섭지만 매드 사이언티스트 그 자체도 조작계의 S등급 헌터.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힘의 파동에 모두가 긴장하고 대비했다.
‘뭐지? 이건 놈의 것은 아닌데··.’
그런 와중에 영민은 남들과 조금 다른 이유로 표정이 굳어졌다. 확실히 놈이 탑승한 기체는 강해보였다. 놈이 만들었다면 육중한 몸체임에도 골렘처럼 굼뜨지 않을 테고, 위력도 대단할 테지만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이런 스타일은 놈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저 기체에서 은근하게 풍기는 죽음의 기운과 생명의 기운의 공존은 과거 놈이 사용했던 어떤 인형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방식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반탄을 일으킨 것도 바로 저 알 수 없는 힘 때문이었고.
‘놈이 발전 한 건가? 아니야. 아직 기술적으로 완전하지는 않을 텐데··. 개발 방식을 바꾼 건가?“
가능성은 있었다. 고유 능력의 개발이라는 것이 어떤 생각과 목적성을 갖고 훈련하는가에 따라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영민에게 어떤 자극을 받고 기존과 다른 노선을 택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나쁜 쪽으로이긴 하지만 놈 역시 '천재'였으니까.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부딪혀보면 알 일이다.
‘어쨌든 여기서 끝장을 본다는 건 달라지지 않아.’
예상대로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로봇은 빠르고 강력했다. 철우와 같은 생명력으로 미국 팀의 공격 쯤은 가뿐히 받아내며 덤벼들더니, 손톱을 세워 휩쓸어갔다.
그 모습에 철우가 덩치에 걸맞지 않는 계집애 같은 공격이라 소리쳤지만 그 위력은 결코 무시 할 수 없었다. 크게 날카로운 그 손톱에 할퀴어진 미국 팀의 헌터들이 방어에 성공을 했음에도 행동 불능에 빠진 것이다.
“이건?!”
그 공격의 뒤에 감추어진 힘을 읽은 것은 불과 몇 명 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할퀴기였지만 공격이 적중되는 순간 주입하듯 뿜어진 것은 지독한 사기(邪氣)였다.
신성의 힘과는 반대되는 죽음의 기운. 그것도 꽤나 농후한 기운이 응축되었음을 알아차렸다.
“크흐흐. 조금만 기다려라. 넌 가장 마지막에 손봐주마!”
자신의 카피를 박살내었기 때문일까? 놈은 영민을 가장 마지막 타자로 지목하고 더욱 더 거세게 미국 팀을 몰아붙였다.
스치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지고 공격을 적중당하면 사기를 몰아내는 것에만 진땀을 흘려야 할 정도로 지독한 그 힘에 위풍당당하던 미국 팀의 진형이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아렌이 신성력을 휘돌려 놈을 후려쳐보기도 하지만 놈은 그 순간 발생하는 반탄력을 이용해 또 다른 헌터들을 공격해갈 뿐이다.
“나랑 붙자! 이 자식아!!”
탱탱볼 마냥 튕겨지며 도망가는 놈을 쫓아보지만 따라 붙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꼬박 한 사람은 공격을 당하니, 아렌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싸우면 이길 것 같은데, 싸워주질 않는다.
영민이 쫓아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힘인 신성력에 강한 반발력을 갖는 놈의 기체는 그것을 추진력 삼아 쏘아지며 그들을 유린했다.
‘신성력을 포기해야해.’
몇 번이고 빠져나가는 놈을 보며 영민이 결단을 내렸다. 신성력을 사용해서는 놈을 잡지 못한다. 처음 영민이 공격했을 때처럼 아예 멈춰서거나 버티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충격은 줄 수 있어도 잡아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신성력을 통한 능력의 증폭을 주력으로 삼는 이들이 신성력 없이 놈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을까?
가능했다. 영민이라면, +13 봉인의 드래곤 슬레이어라면.
“아렌! 내 신성력을 봉인해!”
“뭐?”
영민의 외침에 아렌의 표정이 굳었다가 다시 풀어졌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그의 의도를 읽은 것이다.
이미 한 번 영민과 붙어본 그녀로서는 신성력을 빼앗아갈 시 그의 전투력이 상당히 낮아진다는 것을 알기에 의아했지만, 지금은 뭐라도 해보는 것이 중요했다.
“신성 지배!”
이내 영민의 몸에서 신성의 기운이 사라져버렸다. 전신을 강화하던 기운이 사라지고, 뇌신 강림에 이은 상당한 공허함이 느껴졌지만 곧바로 사용한 한 가지 기술이 그 모든 차이를 메워주었다.
“럭키 포텐!”
버서크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럭키 포텐. 능력 증폭률부터 지속시간까지, 철저히 운에 맡기는 스킬이지만 운이라면 자신이 있는 영민이었다.
내면에서 어떠한 것이 폭발하며 강대한 힘을 이끌어 냈다.
“됐다!”
신성을 모두 빼앗긴 영민에게서 압도적인 힘이 뿜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기본 능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사용했기 때문일까, 처음 사용했을 때보다는 못한 듯 했지만 놈을 박살내기에는 충분한 거력이 느껴졌다.
“삼단 베기!”
별다른 스킬도 필요 없었다. 그저 빨리 베기 수준의 간단한 공격이 놈의 거체에 크고 깊은 상처를 만들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냐?!”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일렁거렸다.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베어져버린 몸체가 당황스러운지 허겁지겁 거리를 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큰일 날 뻔 했군.’
신성력을 배제했더니 베이는 그 순간에 오히려 공격자를 잡아먹기 위해 사기가 덤벼들었다. 어설픈 자들이라면 자신이 공격을 하고도 피해를 입을 만큼 지독한 기운이었다.
‘대체 이 정도 기운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거냐··!’
그럼 이 무시무시한 기운은 어디서 나왔을까? 고유 능력으로 만들어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S등급 쯤되면 어느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 정도 수준은 불가능하다는 것에 영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었다.
이처럼 지독한 사기를 내뿜기 위해서는 실제 ‘죽음’들을 수집하고 응축시켜야만 가능했다.
아마도 그것이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이슬람 무장 세력들에게 붙은 이유이겠지.
영민은 가슴이 뜨거워지고 머리는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놈의 로봇에 달라붙은 수많은 원혼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들의 생명과 영혼을 제련하여 뼈대를 세우고 외피를 단단히 만들었다는 것이 이제는 확실히 느껴졌다.
그들이, 자신을 해방시켜달라고 아우성 치고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끝장을 내주마.”
영민은 들고 있던 드래곤 슬레이어를 집어넣고 한 자루의 창을 꺼냈다.
신멸의 창, 룽기누스.
영민이 강하게 움켜 쥐자 녀석이 가진 관통의 힘이 커다랗게 일어났다. 얼른 자신을 내질러달라고 보채기 시작했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이건 궁극의··!!”
쐐애애액-
발악하듯 소리치며 발버둥치는 놈을 향해 룽기누스가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모든 것을 꿰뚫을 듯한 그 힘 앞에는 어떠한 것도 저항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쏘아질 뿐이고, 관통할 뿐이다.
“컥!”
쿠웅
단 한 번의 투창에 놈과 놈의 병기가 함께 침묵했다.
커다랗게 꿰뚫린 구멍 사이로 심장이 터져나간 놈의 시체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얼굴이 슬쩍 드러났다.
압도적인 힘. 그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이 상황을 표현 할 수 없었다.
“너, 이 자식··.”
아렌조차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얼어버렸을 정도니 다른 이들의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운이 좋았어.'
하지만 영민의 얼굴은 그리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아렌의 신성지배와 자신의 럭키포텐. 어느 쪽이 없었더라면, 혹은 힘이 모자랐다면 쉽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크흐흐흐. 이럴 순 없어. 나 혼자 죽을 순 없다고!!!”
그 순간, 침묵했던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다시 움직였다.
여전히 심장을 포함한 왼쪽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로봇을 조작했다.
뭐지? 다시 살아난 건가? 그럴 리가?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 했다. 이미 이지는 사라지고 어떤 강렬한 열망만이 육신을 차지했다.
우웅 우웅 우우우웅-
원혼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괴롭다고, 그만해달라고. 공포와 고통이 더욱 커다란 사기를 일으키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저건?!”
주변이 사기로 가득차고 놈의 기체의 색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불안정한 마나와 놈의 몸체를 이루는 생명력, 사기가 서로 맞부딪히며 위태로운 힘 싸움을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이상의 망설임은 필요 없었다. 굳이 저 폭발을 막으려 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자폭이다! 탈출해!”
아렌의 단호한 명령에 모든 이들이 황급히 탈출석을 사용했다. 영민도 마찬가지다. 지금이라면 버텨볼만도 했지만 굳이 그럼 위험을 떠안을 필요가 없었다. 저게 폭발해봤자 난장판이 되는 건 던전 속의 세상일 뿐이니까.
‘이걸 놓칠 순 없지!’
하지만, 영민은 탈출석을 사용하기 전 할 일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폭발 직전인 로봇으로 다가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특성을 흡수하는 것. 빠르게 다가가 놈의 기체를 터치한 영민은 뭔가 알림음이 나타나는 그 순간, 즉시 탈출석을 사용해 던전을 빠져나왔다.
< 136화 - 배후 (5)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