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배후 (4) >
자신 있게 던전으로 입장한 한미 연합팀이 수세에 몰린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시작하자 영민도 방어에 집중하며 공격의 방향을 살폈다.
‘수를 쓰는 군.’
하지만 일정치가 않았다. 어느 한 방향에서 일정하게 날아온다면 그 쪽으로 범위 마법이라도 날려볼 텐데, 뱅글뱅글 돌면서 공격을 퍼붓는 건지 아니면 모든 방향에 적이 있는 것인지 사방에서 불규칙적으로 공격이 날아드는 것이다.
그나마 성역 선포가 암흑을 중화시켜 일정 범위까지는 시야가 확보되었지만 적들은 그 범위 바깥에서 공격을 퍼부어댔다.
능력을 이용한 것 뿐이 아니었다. 일반 화기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일반 화기가 폭발하며 일어나는 폭연만 하더라도 그들의 시야를 가릴 수 있다는 생각인 듯 했다.
“차핫!!!”
결국, 참지 못하고 몇 명이 뛰쳐나갔다.
“어어??”
하지만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더니, 제자리를 뱅글거리다가 서로 방향을 잃고 부딪혔다.
콰과과광!!!
그리고 퍼부어지는 집중 포화.
퍼뜩 정신이 든 그들은 몸을 웅크리고 마나를 끌어올려 방어를 했지만 적지 않은 충격이 몸에 쌓이기 시작했다.
‘저주 계열인가?’
모두 그 모습에 안색이 변했다. 무언가 상태 이상에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 나름대로 각종 버프와 신성력에 보호를 받는 S등급의 헌터인데도 속수무책으로 몸의 통제력을 잃은 것이다.
상대 역시 S등급일 테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쉽게 당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같은 S등급이라도 격차가 현격하거나, 특수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긴장하는 것이다.
‘내가 나서야 겠군.’
괜히 아렌이 나섰다가 이상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미국 팀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었다. 요한은 뭔가 스킬을 계속해서 쓰고 있지만 이 상황 자체를 뒤집기는 어려워보였고 그렇다고 철우나 강중만을 믿는 것도 무리였다.
강중만을 몰라도 철우에게 이런 상황은 무척이나 취약한 부분이니까.
결국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판단한 영민은 조금 전, 공격이 쏘아진 방향을 향해 벼락 같이 도약했다.
화아앗-
그의 이동과 함께 어둠도 물러났다. 성역 선포의 효과이기도 했지만 그 스스로에게 걸린 신성 계열의 보조 능력 또한 만만치가 않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 뿐. 아직도 세상은 어둠이 내려있었고 누군가를 찾아내지도 못했다.
[천지번복의 저주에 저항했습니다.]
[혼란에 저항했습니다.]
[신경쇠약에 저항했습니다.]
[환영의 저주에 저항····.]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온갖 저주들과 그에 저항했다는 알림들. 이만한 힘으로, 이만큼 물량이 쏟아지면 당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기다렸다. 요놈들!’
수십 개의 저주가 쏟아진 직후, 고의적으로 상태이상에 걸린 듯 제자리를 빙글 회전한 영민을 향해 십수 개의 공격이 쏟아졌다. 화살 같은 원거리 무기 공격도 있었지만 주로 마법이나 주술 따위의 스킬 공격이 대부분이었다.
그 순간, 영민의 몸이 흐릿해졌다.
극도의 움직임으로 허상이 보일 만큼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무협 소설에서는 이형환위라 불리는 움직임.
몇몇을 제외한 모두가 한 순간 모습을 놓칠 만큼 빠른 움직임을 통해 영민이 행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크악!!!”
“컥!!”
“끄그그극.”
거울 방패를 모든 공격에 가져다 대는 것. 단지 그것 뿐이었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공격을 날렸던 이들이 일제히 쓰러져버린 것이다.
동시에 그들을 감싸던 암흑도 사라졌다.
‘이거 였군.’
깜깜했던 주변에 빛이 돌아온 순간, 영민은 이 말도 안되는 결계의 정체를 파악 할 수 있었다.
바로 암흑의 기운이 충만한 매개체들이 일정한 형태로 놓여져있던 것. 결계가 깨진 것은 몇몇이 쓰러지며 그 매개체를 건드린 까닭이었다.
“모두 벗어나!”
영민이 소리쳤지만 그 전이 이미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결계가 다시 발동하기 전, 결계의 영향권을 벗어나려는 것이다.
‘꼴사납게 당했군.’
모르고 당했을 때는 암담했는데, 알고 보니 우스웠다. 결계가 생각보다 넓지 않았던 것. 어둠에 지레 겁을 먹은 그들이 멀리 뛰쳐나가지 못한 탓에 결계의 경계를 멀리 두지 않고도 우리에 갇힌 새 마냥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매개 근처로 갔어도 강한 저항력이 있었겠지만 영민이나 아렌 정도의 수준이라면 어렵지 않게 파괴할 수준일 터였다.
“귀여운 짓들을 했구나!”
결계를 벗어난 아렌은 그야말로 날뛰었다. 이런 얕은 수에 당했다는 것에 대한 민망함을 감추기라도 하듯 화려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하지만 적들 또한 만만치는 않았다. 결계를 잃은 순간, 폭주를 시작한 놈들은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애초에 그들 역시 S등급의 헌터. 개조를 통해 강화된 육체와 과부하를 통해 폭주하는 마나가 수준의 차이를 단번에 메웠다.
셋 정도가 뭉쳐 아렌의 공격을 막아낼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은 일대일로도 충분히 했다.
‘성역 선포가 아쉽군.’
영민 역시 S등급의 인형 셋을 동시에 상대하며 입맛을 다셨다. 마음만 먹으면 더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지만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전반적으로 전투는 치열했다.
그 말은 어느 한 쪽이 압도적이지 못하는 뜻이기도 했다. 성역 선포의 효과가 있었다면 다를 수 있었겠지만, 미국 팀은 결계 때문에 이미 무력화된 성역 선포의 힘 대신 요한과 아렌의 버프에 의존해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자, 어디냐.’
당장은 괜찮아보이자 영민은 감각을 더욱 넓혔다. 아직도 대기 중인 ‘인형’들이 있었지만 그 너머에서 놈들을 조종하는 존재를 찾아내기 위함이다.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기운을 찾아 영민의 감각이 퍼져나갔다.
카피이기는 하지만, 이미 한 차례 겪어본 적이 있으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젠장. 도와주질 않는 군.”
하지만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인형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쪽의 반응과 전투력을 판단해 본 모양. 열기나 되는 인형들은 각각 아렌과 영민, 철우에게 따라붙었다.
‘왜 나한테 네 마리야?’
이름값으로 보자면 아리스가 가장 유명했지만 그 중 네 기가 따라 붙은 것은 다름 아닌 영민이었다.
이미 한 차례 격돌을 통해 매드 사이언티스트는 영민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영민을 가장 위험한 상대로 인식한 것인지 가장 많은 인형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영민은 투덜거리면서도 놈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음을 확신했다.
‘용케도 이만큼이나 만들었군.’
원래대로의 역사에서라면 아직 S등급 인형은 몇 기 없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벌써 S등급만 수십. 아직 완전해보이지는 않지만 폭주라는 수단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있었다.
영민과 만나면서 그 또한 미래가 바뀐 모양.
영민은 혀를 차면서도 무시무시한 놈들의 공격을 피해내기 위해 전력으로 움직였다.
“으으, 정말 귀찮게도 구는 군.”
개조를 마친 S등급 인형의 전투력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이라면 세계 누구와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정예들이었지만 하나하나가 그들과 호각을 이룰 만큼 과학과 이능의 결합은 무시무시했다.
미약하게나마 살아있는 정신은 이능 활용도를 대폭 높여주었고 손날이며 팔꿈치 등 생각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신소재의 무기들은 분쇄의 효과를 지닌 진동까지 일으키며 헌터들을 위협했다.
어떤 소재를 쓴 것인지, +13 봉인의 드래곤 슬레이어마저 몇 번은 막아낼 만큼 내구력 또한 엄청났다.
그런 인형 일곱 기가 동시에 덮치니 영민조차 숨 가쁘게 적의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간히 반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머릿수의 우위를 이용해 얼른 거리를 벌려버리니 짜증이 솟구쳤다.
시간을 들이면 어떻게든 잡아낼 수 있겠지만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간을 끄는 것은 이쪽에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어쩌면 이미 몸을 피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성역 선포의 쿨타임은 아직도 한참인 상황.
거울 방패로 막아 데미지를 되돌려도 봤지만 기계에 가깝게 몸이 개조된 놈들에게는 잠시간의 반탄일 뿐, 심각한 타격이 되지 못했다.
‘가만, 기계라고?’
그때, 영민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뇌신 강림!”
그 생각과 동시에 주저 않고 외쳤다. 뇌신의 인장에 깃든 한 가지 스킬. 뇌신 강림이다.
순간 영민의 몸이 뇌신 그 자체로 변하며 주변에 강력한 전격을 뿌려댔다. 동시에 일곱 기의 인형이 일시적으로 행동을 멈추었다. 기계 몸에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전류가 흘러들어가니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 모습을 영민은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씨익
그리고 압도적인 힘을 폭사했다.
“뇌력 분출.”
쿠르릉-
손바닥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천둥번개를 뿜어내는 영민의 모습은 흡사 제우스와 같았다.
인형들은 저마다 마나를 일으켜 몸을 보호했지만 한순간 온 몸의 털이 까맣게 타버리고 옷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간신히 버티기는 했지만 누가봐도 곤란한 상태였다.
“어쭈? 뇌조의 일격.”
이번에는 영민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뇌전의 손톱이 놈들을 찢고 지나갔다.
원래도 강력한 뇌신의 스킬들이지만 ‘기계 계열에게 300% 데미지’를 주는 뇌신의 인장 효과가 제대로 작용한 것이다.
너무 많은 부위를 개조한 것. 그것이 놈들의 패착이었다.
‘강철 거신을 상대하기 위해 얻어둔 것을 이렇게 써먹게 되는 군.’
아직도 S등급의 인형들이 수십이나 남았지만 영민의 마음에는 여유가 찾아들었다.
상대가 ‘기계 계열’로 인식되는 것을 확인한 이상, 모든 상황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늘의 심판!”
쿠르르르르릉-
오류라도 난 것인지 차마 덤벼들지 못하고 있는 인형들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준 영민은 하늘을 향해 다시 한 차례 전격을 쏘아올렸다.
그와 함께 하늘이 변화했다.
하늘로 쏘아진 전격들이 서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샛노란 전격의 구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다들 알아서 잘들 피해보라고!”
쾅 쾅 콰광!!!
영민의 외침과 함께 하늘에서 벼락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친!!!”
강중만과 미국 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날렸지만 사실 100% 랜덤은 아니었다. 일단은 시스템이 ‘적’으로 인식된 상대를 노리고 벼락의 비를 퍼붓는 것. 오히려 그들의 돌출 행동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영민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300% 데미지’ 적용을 받지 않는 그들이라면 연속해서 벼락을 맞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것이기도 했고, 자신의 행운 Max를 믿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혹시 아나? 날벼락에 맞은 이가 사실은 적들의 첩자라도 될지.
무척이나 속 편하게 생각하며 영민은 다음 공격을 위해 힘을 끌어모았다.
“찾았다.”
소란한 틈을 타 펼친 ‘뇌신의 영역’ 스킬을 통해 숨어 있는 어떤 존재의 위치까지 파악했다.
“뇌룡 출격.”
영민의 주먹에서, 작지만 강대한 힘을 품은 한 마리의 뇌룡이 날개를 일으켰다.
< 135화 - 배후 (4)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