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배후 (3) >
까가가강-
여전히 영민의 검이 휘둘러 질 때마다 어딘가 한 부위씩이 썰려나갔지만 이전의 층과는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
상처와 죽음을 도외시한 ‘같이 죽자’식의 공격 만큼은 영민도 무시 할 수가 없어 상대하는데 시간이 좀 더 지체되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순삭’이라고 할 만한 속도지만 영민의 마음은 조급해져갔다.
‘인형’들을 그냥 배치해 두지는 않았을 터, 적어도 이들의 눈을 통해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상황을 파악했을 터였고, 그에 따른 대비나 도피를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푸쉬쉬쉭-
파츠츠츠츳!!
더욱 속도를 올리려는 그때, ‘놈들’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피부가 빨갛게 부어오르는가 싶더니 일제히 폭주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부하!’
영민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자폭과는 또 다른 방식이다. ‘자폭’이 가진 힘을 일제히 격발시켜 폭발력으로 돌리는 것이라면, ‘과부하’ 혹은 ‘폭주’로 불리는 이 기능은 인형이 가진 마나핵을 강제로 자극하여 일시적으로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쓰기에 따라서는 자폭보다 훨씬 까다로운 기능. 그에 따라 무시해도 좋았던 공격들이 위협적으로 변화했다.
“이 자식들!!”
놈들의 변화에 가장 당황한 것은 강중만이었다. 여전히 능력면에서는 그가 우위에 있지만 그 능력을 믿고 여럿을 동시에 상대하던 것이 문제였다. 철우나 영민처럼 막강한 방어력을 지닌 것은 아닌 것이다. 성역 선포의 영향으로 더욱 기고만장해졌던 것도 문
제라고 할 수 있었다. 성역 선포의 힘으로 능력이 뻥튀기 되었지만 강화계가 아닌 이상 그것이 방어력의 증가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았으니까. 이런 방심 속에 놈들의 공격이 날카로워진 것은 꽤나 위협적으로 다가왔고, 곧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반면 그보다 능력 자체는 약하지만 가람이나 민호는 오히려 잘 대처를 했다. 애초에 그들이 자폭하거나, 독혈을 뿌리는 등 특수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던 터였기도 했고, 그들의 천재성은 등급 이상의 대처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금세 안
정을 되찾고 놈들을 하나씩 쓰러뜨려갔다.
“서두르자!”
이 와중에 가장 바빠진 것은 다름 아닌 영민이었다. 성역 선포의 영향까지 받은 영민에게 S등급이면 모를까, 고작 A등급의 폭주쯤은 별다른 장애가 되지 못했다.
이미 단신으로 S등급 수십을 동시에 상대할 수도 있는 것이 영민이니까.
하지만 폭주한 힘에 취하지 않고 ‘인형’으로서 철저히 명령에 따라 짜임새 있게 움직이는 놈들이다 보니 시간은 조금 지체 될 수밖에 없었다. 힘 대 힘으로 부딪힌다면 금방이지만 놈들은 명령에 따라 철저히 ‘시간 끌기’에 주력했으니까.
“바로 내려간다.”
이미 ‘인형’으로 개조되며 생명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놈들에게서는 스킬이나 스텟을 드레인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이럴거면 괜히 무리했나 싶기도 했지만 당장 어쩔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미 기호지세.
놈들이 도망치기 전에 잡아 없애는 수밖에.
이미 폭주한 마나핵으로는 자폭이 불가능하니 영민은 시간을 끌기보다 곧장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던전 게이트로 쏙 들어가버리는 기척을 확인했다.
“빌어먹을 놈들. 거참 더럽게 노네.”
이런 곳에 던전 게이트가 있을 줄이야? 혹시나 하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있을 줄은 몰랐던 터라 영민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던전 안으로 들어갔으니 놈들을 쫓으려면 함께 던전으로 따라 들어가야 하는데, 문제는 함정일 확률이 100%라는 것이다.
아마도 안에는 S등급의 헌터들이 우글우글하겠지. 지금까지 S등급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인형으로 개조된 S등급일지도 모르겠다.
여러모로 위험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 하지만 문제는 그것 만이 아니었다.
‘위험하면 탈출석으로 토끼겠지.’
이미 성역 선포를 써버린 상태이기는 했지만 다른 온갖 방법들을 동원해서 놈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데 성공해도 문제였다.
그 순간 아마도 놈들은 탈출석을 사용해 던전을 빠져나가버릴 테고, 뒤늦게 탈출석을 따라 사용하더라도 이미 도망친 후이거나 거리가 벌어진 상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냥 달리기만 한다면 따라 잡을 수도 있겠지만, 헌터 씩이나 되는 이들이 그저 육체능력으로만 도망을 할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영민들이 던전 안으로 입장하는 순간, 핵심 인원 몇몇이 은밀하게 탈출해 버릴 수도 있겠지.
그렇게 한다면 영민으로서는 안에 몇몇이나 있는지, 정확히 누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니 놓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럼 나 혼자 들어가야 하나?’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탈출하는 이들을 제압할 수 있을 만한 인원을 바깥에 배치하기 위해 인원을 나누는 것이다.
나눈다고는 하지만 현재 인원은 고작해야 다섯. 이 중 확실한 S등급은 영민과 철우, 강중만 뿐이고 민호와 가람을 S등급으로 끌어올려줄 성역 선포는 이미 사용한 상태였다.
이미 위층에서 사용해버린 버프의 기운이 남아있는 얼마간은 힘을 쓰겠지만 그 이후부터는 다시 A등급으로 떨어져버린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둘은 패스. 철우 역시 그들을 보호하고 탈출하는 인원을 안정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다.
그럼 남는 것은 강중만 뿐인데, 분명 그 역시 제법 강한 S등급의 헌터였지만 등뒤를 맡길 만큼은 아니었다.
에픽 등급의 장비 몇 개를 빌려준다해도 당장 S등급 헌터 몇이 붙으면 어려워지겠지.
천상 그 혼자서 해결을 해야한다는 소리였다.
‘그것들을 다 쓰면 어떻게든 비벼볼만 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안에 누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직 그에게는 몇 개나 되는 강화 능력이 남아있었다.
특히나 럭키 포텐의 경우, 일거에 그들을 쓸어버릴 만한 힘을 줄 수도 있는 비밀병기였다.
‘그래. 가자.’
영민은 곧 마음을 굳혔다. 철우와 민호, 가람에게 개인 안전을 최우선으로 할 것을 당부하고 그들이 해야할 일들을 빠르게 정리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던전 안으로 돌입하려는 순간, 별로 달갑지 않은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도움이 필요해?”
씽긋 웃으며 다가오는 것은 다름 아닌 성녀 아리스. 그 뒤로 요한과 성녀의 추종자 몇이 따라왔다.
영민이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것은 말할 것이 없었다.
혼자서는 조금 부담이 있지만 그녀와 얽히는 것은 그리 원하던 바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아리스가 아닌게 다행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현재 ‘아리스’가 아닌 ‘아렌’이라는 것일까.
아렌이라면 차후 ‘혈의의 성녀’라 불리게 될만큼 동생을 보호하는데 있어 피를 묻히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단호한 성격이지만, 아리스라면 좀 골치가 아플지도 모르니까.
‘아리스라면 인형들까지 살려보겠다고 오지랖을 떨지도 몰라.’
만약 폭주하는 인형들까지 살려보겠답시고 난리를 피운다면 정말 영민은 성질이 나서 그녀를 죽여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착하고 마음이 여린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니까.
“글쎄.”
딱히 한국 팀이 단독적으로 행동한 것에 탓을 하지는 않았지만 뜨끔한 구석이 있는 영민이기에 단호히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확실히 아렌과 요한만 함께 들어가도 체감 난이도가 확 낮아질 테니까.
‘요한은 아직 성역 선포를 쓰기 전이겠지?’
자신은 쿨타임 중이지만 요한에게는 성역 선포가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신성 지배를 사용할 수 있는 그녀라면 효과를 좀 더 증폭 시킬 수 있는 스킬도 가지고 있을 테고.
“필요 없어도 상관 없어. 난 저기 들어갈 생각이거든.”
영민에게 묻기는 했지만 아렌은 이미 그의 뜻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뒤따르는 미국 팀이야 그녀의 뜻이라면 무슨 짓이든 할 테고.
어쩔 수 없군. 하며 고개를 가로저은 영민은 슬쩍 다른 골칫덩이를 떠올렸다.
‘프랑스 팀은 내려오지 않은 건가?’
아래로 내려온 것은 그들 뿐인지 루티 커틀렛과 프랑스 팀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 편으로는 이해도 되었다. ‘네크로맨서’인 그녀가 ‘성녀’가 포함된 미국 팀과 함께 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또한 그녀의 고유 능력인 네크로맨시는 위쪽에서 일어나고 있을 대량 학살에 더 적합하기도 했다.
“커버는?”
“우리가 맡지.”
영민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린 아렌이 대꾸하자 영민도 동의하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간 사이 탈출 할지 모르는 적들을 커버할 인원을 미국 팀에서 남기겠다는 것이다.
확실히 세계 헌터 최강국들 중 하나인 만큼 S등급 헌터가 바글바글한 미국이 맡아준다면 놓칠 염려는 크게 줄어들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 팀 모두를 데려가는 것은 무리였다. 철우라면 걱정 없었고, 가람과 민호 역시 제 몫을 하기야 할 테지만 위에서 다른 인형들을 상대해본 결과 놈들을 상대해서 그다지 이득을 보지 못한 것이다.
게이머의 자동 습득 능력을 통해서도 별다른 아이템은 들어오지 않았고, 경험치도 위험도에 비해 무척이나 짰다.
무리해서 들어가봐야 득보다는 실이 더 크다는 소리다.
‘얼른 두 사람도 S등급으로 만들어야 겠군.’
때문에 영민은 가람과 민호에게 남아 줄 것을 요청하고, 철우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무슨 소리. 나도 들어간다!”
거기에 하나 더. 강중만이 진입을 자청했다. 그다지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남겨두려 했는데 공을 세울 기회라고 여겼는지 자신도 함께 던전에 들어가겠다고 우기고 나선 것이다.
어쩌면 미국 팀의 합류로 안전에 대한 확신을 했거나 오히려 그 쪽이 더 안전할 것이라 판단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그만큼이나 강짜를 부리고 나오니 영민으로서도 막아설 방법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미국 팀에서도 안으로 들어갈 인원이 추려졌다. 아렌과 요한을 포함하여 총 열 다섯 명의 인원. 그 자체로 이미 대한민국의 S등급 헌터의 수를 넘어서는 막강한 전력이었지만 적의 수준이나 고유 능력을 알 수 없으니 만반의 채비를 한 것이다.
미국 팀이라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성녀의 호위라는 큰 목적성을 지닌 만큼 성녀와 함께 진입하는 던전 쪽에 힘을 주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그럼에도 게이트의 바깥에는 스무 명의 S등급 헌터가 대기하고 있으니 탈출하는 인원을 염려할 필요도 없을 터.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일제히 던전 게이트 안쪽으로 입장했다.
고작해야 4레벨에 불과한, 일행의 전력에 비하자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지만 이번 만큼은 몬스터가 진짜 적이 아니기에 모두가 은근한 긴장을 했다.
“으음?”
“뭐지? 아무 것도 안 보이잖아?!”
그리고 던전 안으로 들어선 순간,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이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 빠져 아무 것도 분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것이다.
심지어는 바로 곁에 있는 동료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는 아군과 적군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
하지만 어떤 종류든 함정이 있을 것이라는 것쯤은 예상하던 바였다.
“모두 방어에 집중해라! 상태이상 해제는 그 다음이야!”
터엉
쿠웅
콰과과광!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온갖 공격들이 쏟아졌다. 하나 같이 치명적인 S등급 헌터의 능력들. 하지만 아렌이 발휘한 ‘가호’가 먼저였다.
데미지는 급감하고 시야가 조금은 돌아왔다. 그래봐야 코 앞의 상대가 보일 정도였지만 이 정도라면 최소한의 대응은 가능했다.
“성역 선포!”
이내 발휘된 요한의 성역 선포!
하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된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츠츠츠츠츠츳
짙게 깔린 어둠이 요한의 성역 선포에 대항하는 것이다.
본디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빛이라지만, 더 짙은 어둠 속에서는 촛불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젠장. 제대로 걸렸군.”
심지어 성역 선포의 버프 효과마저 극미하게 적용될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영민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생각보다 놈들의 준비가 철저했던 것이다.
적들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공격을 쏟아붓고 있었고 일행은 간간히 반격을 해보지만 전혀 통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분위기가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 134화 - 배후 (3)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