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배후 (1) >
‘진짜는 바로 저곳. 갈까, 말까?’
무장 병력은 적지만 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뇌부 고위 헌터들이 밀집해 있는 한 곳을 눈에 담았다.
과연 저곳을 찜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적당히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이 나을까?
적의 세력이 헌터협회나 각국이 상상하는 그 이상일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영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국가별로 구분이 되니 자신들은 다섯 명이서 전투를 치러야한다. 아니, A등급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해 위험도가 높은 유재한을 빼면 네 명이 고작. 과연 이 인원으로 저곳을 공략할 수 있을까?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아참, 강중만도 있긴 하군.’
대신 저곳을 자신들이 꿀꺽 할 수만 있다면 ‘드레인’의 힘으로 비약적인 능력의 강화와 증폭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어쩌면 레벨 업보다도 빠른 성장을 보일 수 있는 부분.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못 먹어도 고다.’
다른 국가들이 의논을 통해 각자 타격할 지점을 선택하는 동안 영민 또한 마음을 굳혔다.
‘이렇게 맛있는 먹잇감을 다른 놈들에게 빼앗길 순 없지.’
그들조차 위험 할 수 있는 도박 같은 선택이지만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처럼, 위험을 짊어지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것도 한정 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그가 하려는 일은 결코 평범해서는 성공의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는 일. 당장 던전들이 잠잠한 이때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대한민국 팀은 이곳으로 하겠습니다.”
영민이 짚은 곳은 아주 작은 붉은 점이 있는 지점이었다. 점의 크기는 곧 적의 세력을 나타낸다는 설명이 있었고, 그들이 아주 안전한 선택을 하려 한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지만 몇몇이 비웃음을 흘릴 뿐, 큰 반응이 있지는 않았다.
한국의 경우 ‘기적의 연금술사’ 덕분에 유명은 했지만 그렇게 강력하게 평가되지는 않고 있는 까닭이다.
당장 숫자만 보아도 그랬다. 다른 곳들은 최소 일백의 헌터들이 동원된 반면 한국은 고작 개인전 상위자를 포함해 6명이 고작이지 않은가?
이번 테러로 인한 사망 또는 부상으로 인원이 줄어든 곳들도 있었지만 일백에 맞춰 충원하는 것이 허용된 터라 모두들 다시 숫자를 맞춰둔 상태였기에 전력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으음··.”
영민의 제멋대로인 선택에 강중만이 조금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지금의 전력으로는 그 정도가 고작이라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실상을 알게되면 까무러칠 테지만 당장은 그랬다.
“저희 미국 팀은····.”
한국 팀의 지역 지정은 그렇게 수월히 끝이 났다. 아직도 눈치를 보고 있는 국가들이 꽤나 많았기에 관심도 자연히 그쪽으로 쏠렸고, 영민도 주변을 무시한 채 머릿속으로 준비할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녀 아리스로 대표되는 미국팀의 발언에 정신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곳으로 하겠습니다.”
“예? 죄송하지만 그곳은 조금 전 대한민국 팀이····.”
아리스가 대뜸 한국 팀과 같은 위치를 지정하고 나선 것이다.
‘뭐지? 나름의 정보가 있는 건가?’
슬쩍 쳐다보니 중복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느닷없는 강짜에 영민을 비롯한 모두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며 아리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중복되면 안 된다는 말씀은 없던 것 같은데요.”
설마 이쪽의 의도를 드러낸 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중복된 위치를 지정하는 것에 대한 규정은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국가 대항전’의 형태를 띄는 것이기에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혹시 대한민국 팀 분들이 양보를 해주실 수는··.”
덕분에 화살은 한국 팀에게 돌아왔다. 국력도, 헌터력도 현저하게 낮게 평가되는 데다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대한민국인 만큼 양보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싶은 모양인데, 영민은 결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싫습니다.”
영민은 단호한 말과 함께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냈다.
감히 누구 떡에 눈독을 들여? 범위를 한정해서, 아리스에게만 향하도록 살기에 가까운 적의를 날렸다.
이렇게 하면 아마도 아렌이 깨어날 테지만 상관 없었다. 그녀를 피하는 것은 엮이면 너무나 귀찮아지기 때문이지 두려워서가 아니니까.
꼬우면 덤벼! 라는 듯한 도발적인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담담히 그 기세들을 받아내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양보를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대한민국 팀과 함께 가겠습니다.”
“하지만, 성녀님····.”
“포인트 같은 것은 반씩 나누어도 좋고 대한민국 팀이 모두 가져가도 좋습니다. 우리끼리 싸우기 위한 자리가 아니니까요. 저희는 저곳으로 가겠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당장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력을 갖춘 미국팀이다.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고작 여섯명 뿐인 대한민국 팀으로는 역부족일 수 있었다.
만약 그 때문에 적의 수뇌를 놓치기라도 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 어렵겠지.
여러 생각 끝에 헌터협회 관계자들은 마지못하는 척 아리스의 뜻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남은 국가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뭔가 있는 건가? 저기로 따라가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는 거 아니야?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들었지만 ‘포인트 양보’라는 점 때문인지 선뜻 나서기는 어려워했다.
“저희 프랑스 팀도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때 나선 것이 바로 루티 커틀렛이었다. 프랑스 팀을 대표해 그녀 역시 동일한 조건으로 영민이 지목한 위치로 향하겠다는 것이다.
이쯤되자 나서기는 더 어려워졌다.
미국 팀에 이어 프랑스 팀까지. 이래서야 나선다 한들 활약은커녕 들러리만 서게 생겼으니까.
‘아니, 이 년들이··.’
그 와중에 영민의 분노는 더해만 갔다. 대체 무슨 심보로, 무슨 속셈으로 자신을 훼방 놓는 것일까?
분명 강태성의 기억상으론 아직 미국이 놈들의 본거리를 알지 못할 텐데?
‘아니면 아는데도 모른척 하고 있었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굳이 자신을 엿 먹이려 들 필요는 없을 텐데··.
‘근데 쟤는 또 무슨 바람이 분 거지?’
그래. 뭐, 아리스야 그렇다고 치자. 미국이니까.
그런데 루티 커틀렛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 이름이 아직 그렇게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을 텐데 군말없이 따르는 프랑스 팀은 또 뭐고? 쟤들도 따로 정보를 가지고 있던 걸까?
생각 같아서는 한바탕 깽판을 놓고 싶었다. 신성 지배고 뭐고 럭키 포텐으로 한 번 엉겨볼까 싶었다.
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는 여러모로 보는 눈도 많고 상황도 안 좋았으니까.
‘후우. 그래. 같이 가는 것까지야 상관없지. 오히려 귀찮은 잔챙이들을 청소해줄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내 계획을 방해하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어차피 두 사람 모두 그가 생각하는 ‘최후의 팀’에 속해있지 않았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돕는다면 큰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필수요소는 아니라는 뜻이다.
설사 사라진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인원이라는 것.
극도의 불쾌감으로 속을 가득 채운 영민은 일단 한 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후 잠시 지체되긴 했지만, 곧 모든 국가들이 목표 지점을 설정 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프랑스 팀 이후로는 영민이 찍은 그 지점을 선택한 곳이 없었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헌터협회 관계자가 원한다면 대한민국 팀에게 위치를 다시 선택 할 수 있
는 기회를 주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일단 회의는 거기까지. 정확한 위치와 공격 방법, 시간 등은 개별적으로 협의 및 통보하기로 하고 헌터들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즉시 이동하는 것이 아닌 만큼 이 정보가 다시 놈들에게 새어 나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하나의 정보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내부에 아직도 첩자가 있다는, 그리고 보다 자세히는 어느 팀으로 좁힐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는 다소 허술한 방법이지만, 특수한 고유 능력이 덧입혀진다면 매우 정확히 첩자를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간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헌터협회의 다음 메시지가 전해졌다.
정확히는 장소와 시간. 그것이 다였다. 타격 방식 등에 대해서는 보안을 위해 비행기에 직접 연락을 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였고, 같은 목표를 지닌 세 국가에는 조금 다른 메시지가 전해졌다.
장소와 시간, 그리고 이동 방법.
함께 이동을 할 것인지, 각자 따로 이동을 할 것인지 물어오는 것이다. 따로 움직여도 좋고, 원한다면 헌터협회 측에서 비행기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영민은 당연히 따로 움직였다. 그녀들에게 따지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이미 결정이 난 마당에 뭐하러 골치 아프게 비행을 하는 내내 같이 가겠나? 즉시 전용기를 움직여 목적지로 향했다.
몇몇은 비행기에서 직접 낙하하며 침투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각기 이동하는 세 팀이 모두 그렇게 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은 1차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그때가 이미 새벽 2시. 최대한 노출을 막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지만 영민에게는 또 다른 시도를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나이트메어.”
나이트메어의 특수 스킬, 악몽 탐색.
잠이 든 대상이 있는 위치로 대단위 텔레포트가 가능할 뿐 아니라 악몽으로 상대를 괴롭혀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었다.
[해당 지역 내에서 악몽을 탐색하지 못했습니다.]
[재탐색에 들어갑니다.]
“··이것 봐라?”
하지만, 몇 분이나 시간이 흐를 때까지 나이트메어가 전혀 대상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무도 잠을 자고 있지 않다는 소리.
뭐지? 단체로 뭔가를 하고 있나?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런 의심을 했겠지만 영민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너냐.’
비행기 격추 시도에서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 자살 테러에서는 짐작이 가능했다.
평소 별다른 이슬람 국가나 종교와의 접점도 없던 이들이 갑자기 테러리스트들의 구호를 외치며 자폭하다니? 그것도 자국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대우를 받던 최고의 헌터들이 말이다.
단순히 따져봐도 효율도 나쁜 일이다. 그들이 작정하고 훼방을 놓고 혼란을 조장하면 각 국에 적지 않은 파장이 일어날 텐데, 뭐하러 아까운 목숨을 한 번의 테러에 모두 소진할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봐야겠지.’
영민은 그것을 ‘조작 조건’에 있다고 봤다. 그들을 동시에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위치 범위’ 같은 특정한 조건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능력을 보더라도 그랬다. 본인이 근처에 있든, 중계기를 설치해두었든 일정 범위 안에 있어야 조작이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괜히 이곳으로 왔나? 그 근처를 뒤지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놈 하나를 잡는 것보다는 이곳 본진을 털어먹고 특성들을 흡수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들 준비 됐지?”
유재한은 안전과 후방 지원이라는 명목 하에 남기로 했으니 움직이는 것은 강중만을 포함한 다섯. 약속된 시간보다 한발 앞서, 그들이 은밀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른 두 팀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접근할 지는 알 수 없다. 프랑스 대표팀은 성향이 안맞는다며 독자 행동을 선언했고 아리스가 함께 이동할 것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영민이 거절하면서 알 길이 없어졌으니까.
‘손발이 안 맞아서 꼬이느니 그냥 우리가 먼저 친다.’
때문에 영민은 조금 무모 할지 모르는 단독 행동을 계획했다.
< 132화 - 배후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