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보이지 않는 적 (3) >
영민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자마자 본능적으로 능력을 발휘했다. 한국팀의 자리에 난입한 사내를 밀쳐 날려버리는 동시에 강력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놈들의 행동도 신속했지만 그들이 따라 올 수 없을 만큼의 피지컬과 마나 운용 능력을 지닌 영민이기에 대처할 시간은 다행히 부족하지 않았다.
덕분에 일대가 날아가버릴 연쇄 폭발 속에서 한국팀은 안전을 확보 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폭연이 걷히고, 참담한 주변 상황을 확인한 이들이 절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설마하니 자국의 대표로 이곳에 온 자들이 자살 테러를 감행할 줄이야.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기에 피해는 클 수밖에 없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누군가가 나서서 생존자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사회와 진행을 맡은 헌터협회의 간부가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까닭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이게 대체 무슨····.”
“이거 다 미국이 꾸민 일 아닙니까?!”
모두가 자국을 대표할 만큼 뛰어난 헌터들이기에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불신은 급격히 팽창했다. 자폭을 감행한 이들 중 대다수가 제3세계 국가의 대표들이기는 했지만 소위 선진국의 대표 중에도 몇몇이 끼어있는 것이다.
때문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심지어는 같은 국가의 대표 중에서도 동료의 자폭 테러 사실을 아직 믿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니까.
동시에 미국의 음모라는 기류도 감돌았다. 물론 미국이라고 그들이 탄 비행기의 경로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고, 비밀 경기장의 위치를 알아차린 외부의 소행도 아닌 만큼 그들을 의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주최측인 미국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
니었기에 가능성은 낮지만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녀 아리스와 요한의 빠른 대처 덕분에 미국이 피해는 전무했으니까.
‘그들은 아니야. 그럼 누굴까?’
곧 흐름은 또 바뀌었다. 생존자 중 누군가가 자폭한 인원들이 ‘신은 위대하시다’라는 아랍어를 읊었다는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단번에 초점은 이슬람 무장 단체 쪽으로 넘어갔다.
영민도 그것이 현재 상황에서는 가장 옳은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이 대체 어떻게 각국의 대표들을 포섭한 것일까? 그것도 자폭 테러까지 감행할 정도의 세뇌까지 해가면서.
종교? 뭐, 그럴 수도 있다. 종교는 국경을 초월하는 법이고 국가 대표로 뽑힌 헌터들 중 일부가 알라를 믿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수가 너무 많았다.
자폭 테러에 동참한 인원의 수만 어림 잡아 수십이다. 그것도 최소가 A등급 이상의 수준 높은 헌터들.
그들이 모두 같은 종교라고? 그것도 심각한 수준으로 빠진? 이슬람의 세력도 상당하기는 하지만 테러를 감행할 만큼의 극단 주의자들은 ‘메이저’가 아닌데? 덕분에 다시 의심을 꼬리를 물고 미국에게로 이어졌다.
미국인 중에서는 테러에 가담한 인원이 없는 것도 이상했다. 너무 티가 날 정도로 이상하다는 것이 더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대치 상황에 아무도 답을 내리거나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럼 제가 나서볼까요?”
“당신은··.”
“프랑스 대표, 루티 커틀렛이에요. 네크로맨서죠.”
그때 나선 것은 다름 아닌 루티 커틀렛이었다. 미국이 의심을 받는 상황이니 미국 대표인 성녀 아리스조차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이들의 고유 능력조차 별다른 해법이 되지 못할 때 네크로맨서인 그녀가 나선 것이다.
사실 ‘국가 대표 헌터’라는 것이 대부분 ‘전투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기에 추적이나 심문, 진실 탐지 등의 고유 능력을 지닌 이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비슷한 고유 능력을 가졌다해도 상대적으로 미약한 수준이기 마련이고.
결국 미국에 수사를 맡겨야하는데, 관련 고유 능력을 지닌 헌터가 다급히 오고 있다고는 해도 미국에 대한 의심이 있는 이상 그 결과나 과정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럴 때 그녀가 나서니 자연스럽게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네크로맨서라면?”
“생각하는 그대로에요. 그리고 영혼도 다룰 수 있죠.”
“아··!”
그녀의 간단한 자기소개에 모두가 무릎을 탁 쳤다. 이거라면 가능하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들이 있기도 했지만 ‘고유 능력’으로 아직 이승을 떠나지 못한 영혼을 붙잡을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발휘된다면 흉수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부탁합니다.”
의결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그녀에게 기대를 거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자폭으로 인해 넝마조각이 된 시체들을 일부나마 한데 주워 모으도록 지시한 그녀는 자신의 고유 능력을 일으켜 스킬을 시전했다.
“레이즈 어 고스트. 스피릿 스피킹.”
그녀의 인도에 따라 시체 조각에서 희끄무레 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수십. 그러나 몇몇은 힘을 잃었고, 몇몇은 서로 뭉치며 어떠한 형상을 만들었다.
“나왔다.”
남들의 눈으로도 볼 수 있는 구체화 된 영혼의 모습이었다.
온전한 형체를 갖춘 영혼의 수만 다섯. 그것을 위해 연속해서 능력을 사용하느라 루티의 고운 이마에 땀이 한 줄기 흐르기 시작했지만 어쨌든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것’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티 커틀렛이 사용한 ‘스피릿 스피킹’과 같은 특수한 대화 능력을 갖춘 자들만이 그것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긴··? 뭐지? 어떻게 내가··. 아아, 나는 죽은 것인가.]
영민 또한 ‘들을 수 있는’ 소수 중 하나였다. 모인 사람의 수가 워낙 많다보니 각국마다 어지간해서는 한 둘 쯤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즉석에서 개발해낼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괜히 각국의 최고수들이 아니라고나 할까.
모두의 신경이 그것들에 집중되자 루티는 모두를 대표해 말을 이어갔다.
“당신들은 누구죠?”
[너 따위가 알 것··.]
“영혼 제압.”
과연 테러리스트의 영혼답게 순종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루티가 다음 능력을 발휘한 순간, 영혼이 흐려지며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신의 전사다.]
“어떤 신의 전사죠?”
[당연히 알라의 전사다.]
무척이나 단호한 말투. 전혀 이슬람과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생김인지라 이질감이 느껴져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건가요?”
[모두 신의 뜻이다.]
그 말을 끝으로 놈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지속시간이 길지는 않은 모양. 루티는 서둘러 말을 더했다.
“이 중에 당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있나요?”
[없다. 더러운 이단의 무리들. 더 데려가지 못한 것이 한····.]
그 말을 끝으로 놈의 형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나마도 루티가 다른 영혼들의 기운을 빼앗아 놈에게 몰아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아니었다면 더 빨리 사라졌을 터였다.
“··그렇다는 군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루티의 모습에서 꽤나 고단한 일이었음이 느껴졌다.
여전히 의구심이 완벽하게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그 말에 수긍했다. 직접 그들이 귀로 들은 것이니까.
다들 저들끼리 생각을 정리할 때쯤, 헌터협회의 인원들과 미국의 인사들이 도착했다.
“일단 오늘 경기는 취소하도록 하겠습니다. 향후 어떻게 진행을 할지는··따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세계 헌터 대회는 일시 중단 되었다. 고작 이슬람 무장 세력 따위로 인해 중단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며 반발을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도, 진상 규명을 위해서도 일시 중단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다고 해봤자 어차피 미국이 준비한 숙소로 돌아가니 서로 마주치게 될 테지만 어쨌든 세계 헌터 대회는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언제 다시 재개 될지에 대한 기약은 없지만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대신 순서가 조금 바뀔 수는 있겠지. 아마도 대표들을 잃은 국가들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이 이슬람 무장 세력을 규탄하고 강경 대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다음에나 다시 진
행 될 터였다.
“좀 빡쎄질 수도 있겠는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영민은 어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찮아질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다시 진행되는 경기인 만큼, 일종의 ‘무력 시위’의 의미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세계 헌터 대회가 자국 헌터의 강함을 증명하고 자랑하는 자리였다면 이제는 이슬람 단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니들 x됐다’라는 의미를 담은 자리가 될 테니까.
‘아니, 어쩌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추측을 떠올린 영민은 얼른 생각을 흩어버리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원치 않은 3일의 휴식 기간이 있은 후, 세계 헌터 대회가 재개되었다.
“흠, 국가대항전이 사라졌다라··. 그럼 우리는 이제 여기 있을 필요가 없는 겁니까?”
다시 재개된 세계 헌터 대회는 기존과 조금 다른 형태를 띄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국가대항전 형태의 팀 대결을 아예 없애버리고 국가별 길드 대항전만을 남긴 것이다.
“그건 아닙니다. 개인전 우승자의 자격으로 오신 분들은 길드 대항전에 자동 편입됩니다.”
덕분에 개인전 우승자들의 위치가 조금 애매해졌지만 헌터협회는 그들을 길드 쪽에 강제 편입 시키는 것으로 일단 상황을 넘겼다.
당연히 불만은 터져 나왔다. 이미 자기들끼리 공고히 뭉친 길드에 개인전 우승자라고는 하지만 다른 길드의 인원을 끼워 넣어봤자 제대로 융합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나마 개인전 우승자와 길드전 우승 길드가 동일한 경우도 있었지만 적어도 한 둘 정도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이는 ‘국가별’로 분류하여 점수를 매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식이었지만 차라리 개인전 우승자들을 따로 모아 무언가를 시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길드전은 어떻게 진행 됩니까?”
“그건, 여기를 봐주십시오.”
화면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지도였다. 모두가 익숙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유명한 장소는 아닌 듯 한데, 붉게 점이 찍힌 곳들이 많은 것이 특이했다.
“저건····?”
잠깐의 상황 파악이 끝나자 몇몇이 지도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 그리고 헌터협회의 간부가 곧 지도의 정체를 밝혔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주범들의 은신처로 예상되는 곳들입니다. 여러분은 이곳들 중 하나를 선택해 약속된 일정에 따라 동시 타격해주시면 됩니다.”
“호오?”
세계 헌터 대회라고는 해도, 각국의 무력을 자랑함과 동시에 친목을 다진다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기껏해야 7레벨 던전 하나쯤을 상징적으로 공략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강태성의 기억에서도 그랬었는데 이건 좀 의외였다.
아무래도 좋게 좋게 끝났어야 했을 행사가 예정에 없던 테러로 인해 상황이 바뀌면서 방식도 바뀐 모양.
테러리스트라고는 하지만 사람을 죽이기 위해 각국 최고의 헌터들을 이용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헌터협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베스트라고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사실 말이 살인이지 이미 수많은 인간형 몬스터들을 죽이고 자리에 오른 각국 최정상 헌터들이 그런 것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할 리는 없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연이은 테러로 분노와 불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헌터협회가 세계 최강의 헌터 집단들을 이용해 테러리스트들을 공격하는 것은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적들을 동시 타격하자면 대단위의 병력 뿐 아
니라 상대의 S등급 헌터를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헌터들이 필요한데, 헌터협회가 자체적으로 보유한 헌터들로는 무리가 있는 게 사실이니까.
더구나 원흉으로 지목된 이슬람 무장단체들은 일반인에 대한 테러도 몇 번이고 자행했던 자들이라 명분도 충분했다.
‘문제는 어디로 향하느냐인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여러 첩보를 통해 수집한 이 정보들 중 가짜도 있고, 진짜도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놈들의 거점이 맞다 해도 방어하는 병력의 차이가 무척 큰 경우가 많았다.
복불복에 가까운 찍기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영민은 행운 Max에 기댈 것도 없이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 131화 - 보이지 않는 적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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