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보이지 않는 적 (2) >
비행기가 공항으로 착륙할 준비를 하는 시점부터 영민은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었다. 또 다시 무언가 수작을 부려올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한 가지 의문도 들었다.
‘과연 습격을 당할 뻔 한 것이 우리 뿐일까?’
알 수 없었다. 만약 범인이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이슬람 무장 세력들 중 하나라고만 생각해도 가능성은 낮아졌다.
그들이 미국의 우방국들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굳이 멀리 떨어진 한국까지 노릴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태평양 한가운데에 매복까지 하면서.
어쩌면 자신들은 얻어걸린 것이거나 노리지도 않았던 것을 괜히 자신이 먼저 나서 일을 크게 벌린 것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미친 영민은 조심스럽게 땅을 내딛었다.
만약 자신이라면 바로 이 발 밑에 폭탄이라도 숨겨놓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어떠한 징후나 기운도 감지되지 않았다. 하긴, 세계 헌터 대회에 참석하는 모든 인원들이 모이는 곳이니 미국에서도 특별히 경비를 강화했을 터, 여기에 숨어들어 일을 벌이느니 비행 중에 테러를 하는 편이 쉽긴 하겠다.
“가자.”
기감을 넓혀 공항 전체를 훑고 나서야 안심을 한 영민은 뒤 따르는 네 사람과 함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개인전 3위를 차지한 아리랑 길드의 길드장, 강중만과 국내 인사들이 뻘쭘한 모습으로 따라 움직였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들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는 무언가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공항의 움직임이 조금 어수선하다는 것 쯤은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웅성거림과 당황스러움이 멀리서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초인의 경지에 이른 그들이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잠깐만.”
궁금한 것은 영민도 마찬가지. 영민은 그들을 멈춰 세우고 청력을 집중했다. 동시에 마나도 살짝 운용했다.
스킬 [소머즈]가 발동하며 저 멀리에서 난 미세한 소리가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단순히 청력만을 키운 것이라면 주변의 잡소리 때문에 분간이 어려울 테지만 소머즈 스킬은 원하는 소리만 골라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거기도 당했답니까? 으음, 큰일인데요.”
“구조대는?”
“즉시 파견하긴 했습니다만··. 장담은 어렵습니다. 모든 대표들이 강화계인 것도 아니고, 생존에 도움이 되는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요.”
얼마 되지 않는 짧은 대화였지만 영민은 즉시 그 말들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역시 공격을 받은 것은 그들 뿐이 아닌 모양이다.
그들이 아닌 다른 몇몇의 국가에서도 공격을 받았고, 사전에 대비하거나 방어하지 못한 곳들이 있는 모양. 주최국인 미국에서 나름대로 힘을 다해 구조와 수색에 나선 듯 했지만 모두를 구하기는 어려울 듯 했다.
세계 헌터 대회에 참석하는 인원들이 각국의 최고라 불리는 헌터들인 것은 맞지만 그들 모두가 S등급인 것도, 방어나 요격에 특화된 것도 아니었으니까.
당장 대단한 공격 능력을 지닌 헌터라 해도 미사일을 요격하지 못해 비행기가 폭파되어 버리면 폭발을 몸으로 견디고, 바다 한가운데에 빠지게 되니 무사하다 장담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두 다 동시에 공격을 받은 건가?’
저 멀리 멀쩡한 행색으로 이동하는 이들이 보였지만 영민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들 역시 웅성거림의 정체에 대해 궁금하고, 나름대로 알아봤을 텐데 별로 동요하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는 소리였다.
거기까지 파악한 영민은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고 장내를 빠져나왔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전세계에서 날아오는 각국의 대표 헌터들을 노릴 정도라면 다시 한 번 이곳을 노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놈들의 낯짝을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그래봐야 원거리에서 또 미사일 따위 쏘거나 능력으로 만들어낸 공격을 퍼붓는 정도가 고작일 거라는 생각에 굳이 귀찮아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놈들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야 미국에서 알아서 해낼 테고 그에 걸맞는 응징도 할 터였다.
국력으로는 세계제일, 헌터력으로도 세계 4강 중 하나인 미국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까 말이다.
이번 사건 때문에 세계 헌터 대회에 사용되는 모든 건물과 장비에 대한 재확인이 진행되면서 시간이 꽤 지체되긴 했지만 과연 미국답게 신속한 일처리로 낭비되는 시간을 최소화 했다.
“헐. 이래도 되는 거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번 비행기 테러를 막지 못해 구조 중인 국가들의 경우 이후 진행 될 세계 헌터 회의에는 참석하되 격투대회와 헌팅 대회에서는 탈락으로 처리한다는 단호한 발표가 있었다.
이런 흉악한 테러 행위를 미리 발견하고 막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는 충분히 하면서도 그런 행위를 스스로 방어해내지 못한 이들에게 냉정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물론 흉수를 찾아내고 철저한 보복을 하리라는 약속도 함께였다.
그 처리에 어떤 식으로든 무사히 도착한 각국의 헌터들이 몹시 놀라면서도 호응했다.
그들의 말처럼 ‘초인’이라 불리는 힘을 가졌으면서 고작 미사일 몇 발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에 비웃음을 짓는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이들이기 때문인지 은근히 강자존의 논리가 그들의 머릿속에 공유되고 있었다.
“이곳에도 도착하지 못했다는 건 그만한 능력이 안 된다는 소리니까. 고유 능력의 종류 타령을 하려거든 저승에서나 하라고 그래.”
맞는 말이다. 인류의 적인 몬스터들이 상대 고유 능력의 상성을 봐가면서 상대해주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강한 힘을 지녔음에도 불의의 일격을 받아 도착하지 못한 케이스가 있을 수는 있지만 던전에서도 눈먼 검에 맞아죽을 수 있는 일이다.
억울할 지는 몰라도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멍청하게 미사일에 얻어 맞은 주제에 목숨을 건진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다들 꽤나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헌터라는 직업 자체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인 만큼 이런 반응도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래봤자 강태성의 기억을 가진 영민에게는 모두 귀여워 보일 뿐이지만.
“얼추 다 모이신 것 같군요. 그럼 30분 뒤 경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헌터협회 관계자는 마지막으로 정비 시간을 주고 자리에서 물러나려 했다.
“잠깐. 경기 방식은 어떻게 되지? 국가대표 선발전과 비슷하게 치러지는 건가? 치고 박고 알아서 때려눕히면 되는 거냐고.”
그때 껄렁한 사내 하나가 그를 불러세웠다.
명색이 헌터협회 간부이지만 그 역시 자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헌터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 대표이시군요. 비슷합니다. 다만 국가대항전인 만큼 개인전이 아니라 팀전이 되었을 뿐이죠. 사전에 각 국가별로 출전 순서를 정하고, 나서서 겨루어주시면 됩니다. 승자연전 방식으로.”
“그거 좋군. 귀찮게 왔다갔다 하지 않고 혼자서 다 쓸어버릴 수 있을 테니.”
사내는 꽤나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확실히 느껴지는 기운도 보통이 아니긴 하다.
‘그래봤자긴 하겠지만.’
그래봤자 기억에 없는 걸 보면 군주급과 싸우기도 전에 죽어 나자빠진 얼간이인 것 같았지만.
“영민님, 이쪽이에요!”
“응?”
마지막으로 주어진 30분의 휴식시간. 별달리 할 것도 없어 앉을 곳을 찾는 영민에게 손을 번쩍 들어 흔들며 소리치는 이는 다름 아닌 성녀 아리스였다.
“으음.”
영민으로서는 별로 얽히고 싶지 않은 인물. 그녀의 뒤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신성력을 휘두르는 ‘요한’이 서있었다.
영민이 사용하는 신성한 광휘와 성역 선포 콤보의 원조격인 사내. 남자치고 여리여리한 몸을 지녔지만 의지만큼은 꽤나 강한 녀석이었다.
때문에 ‘결사대’에서도 많은 이들이 좋아하던 인물이고.
‘그 옆에 놈은 누구더라··. 뭐, 상관없지.’
차림새를 보아하니 성기사쯤 되는 모양인데, 기억에 없는 걸보면 이 녀석 또한 그다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우린 저쪽으로 가자.”
“네에? 저기 성녀님이 부르시는데요?”
이미 그녀에게 뻑 간 민호가 계속 그녀쪽을 돌아봤지만 영민은 귀찮게 됐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움찔
그리고 그때, 영민들이 향하던 방향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던 인물들이 못볼 걸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가만히 보니 중국인들이다. 중국 대표 중 수장을 맡고 있는 것은 당연히 흑사회의 주인인 만병지왕 왕륜걸. 이미 영민에게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인지라 황급히 눈을 아래로 깔고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끄응. 어딜가든 귀찮은 놈들 천지군.’
이쪽에 있는 것도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뒤에서 아리스가 쫓아오거나 말거나 또 다시 방향을 돌려 움직이는데, 이번에는 그를 가로막고 선 인물이 있었다.
“뭐··.”
귀찮다는 듯 쓱 상대를 올려다 본 영민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뒤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미모의 여성 때문이었다.
“하··하··. 누님도 오셨군요.”
영민이 가장 꺼려하는 두 사람 중 또 다른 한 명인 루티 커틀렛이다.
그가 지닌 신성의 힘이 그녀의 고유 능력과 상극이고, 이제는 서로 같은 S등급인데다, 모르긴 몰라도 아이템 또한 영민 쪽이 더 빵빵할 텐데 어쩐지 눈빛만 마주쳐도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건 아마도 강태성의 영혼에 각인된 트라우마 같은 것이리라 짐작이 됐다.
실제 능력의 차이와는 관계가 없는 정신적인 작용이라 영민은 예의 영업용 미소를 띄며 그녀를 맞았다.
“호호. 동생 오랜만이야. 나도 일단은 프랑스 대표거든.”
영민을 막아선 사내와 곁의 또 다른 사내가 나머지 두 명의 대표인 모양. 서로 별로 친하지는 않은 것인지 루티와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임에도 냉정하기 짝이 없는 눈길을 보내왔다.
‘하여간 이놈의 자만심들은··.’
이제 곧 경기가 시작되면 누가 진짜고 누가 허세꾼인지 밝혀지겠지만 아직까지는 콧대들이 하늘을 찔렀다.
그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만 느껴지는 영민이기에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눈빛을 보내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적당한 곳에 몸을 던진 채 30분의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세계 헌터 대회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대진표를 봐주십시오!”
다시 나타난 협회간부의 외침에 한편에 마련되어 있던 모니터가 켜지고 대진표가 나타났다.
‘흠, 나쁘지 않군.’
소위 말하는 죽음의 조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편한 조도 아니었다. 그냥 딱 적당한 수준. 강한 국가도 하나 끼어있고, 그렇지 않은 국가도 하나 끼어있었다. 다른 한 곳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어 어떤지 잘 모르겠고.
영민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자신의 국가 이름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기를 잠시, 협회 관계자들이 자리를 돌며 쪽지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1라운드에 출전할 순서를 적으란 것이다.
이기기 위한 필승 전략을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순서로 나올지도 예상해야했고 탐색전부터 할 것인지 처음부터 전력으로 나갈 것인지 등도 고민해야했지만 영민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작성해서 제출했다.
선봉은 철우. 그 다음은 자신, 마지막으로 강중만의 순이었다. 사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별 의미가 없었다. 철우가 나서는 것만으로 모두 정리가 될 테니까.
“후후. 역시 이 몸을 인정하는 군. 비밀병기라는 건가. 아니면 최후의 보후?”
그런 것도 모르고 제 멋대로 순서를 정한 영민에게 따지려던 강중만은 저 혼자 흐뭇해하다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첫 번째 경기가 준비되었다.
청코너는 아까 껄렁거리던 이탈리아 팀. 상대는 아프리카의 어디쯤 되어보이는 이름 모를 팀이었다.
이탈리아도 꽤나 강한 헌터들이 많다고 들었으니 아무래도 승부는 이미 결정이 난 듯 싶지만 모두가 첫 경기인 만큼 변수와 반전을 기대하며 경기에 집중했다.
“혹시, 종교가 있습니까?”
“····?”
그때, 대충 누워서 경기를 구경하는 영민의 곁으로 처음보는 사내가 다가왔다. 봐도 잘 모르겠는 국기를 가슴에 단 국가대표 헌터 중 하나였는데, 영민이 대답을 하건 말건 개의치 않고 중얼중얼 자신의 할 말만 이어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일까? 멍청히 바라보고 있던 영민은 그런 행동을 하는 이가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몸을 벌떡 일으키는 순간, 그의 입에서 주문 같은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신은 위대하시다.”
콰과과과과광!!
그 순간, 경기를 구경하던 헌터들 중 일부의 몸이 팽창하며 대규모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 130화 - 보이지 않는 적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