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럭키 포텐 (1) >
7레벨 던전, 과거 기준으로는 8레벨 던전인 이곳은 사실 그 이전 단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전 단계에서 보스급으로 등장하던 놈들이 중간보스 격으로 내려가고, 보스의 경우 더 강력해지거나 집단으로 나타난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작지만 큰 차이 때문에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는 7레벨 던전을 클리어한 길드가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7레벨 던전을 안전하게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S등급 헌터 다수가 필요한데, 지금 대한민국의 길드들은 서로간의 이해관계 상충으로 협력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문제였다. 던전 쇼크가 계속되며 헌터들의 수준도 높아지고 새로운 헌터들도 등장하고 있다지만 협력이 되지 않는다면 7레벨 이상의 던전에 대해 제대로 대응 할 수 없었다.
하물며 8레벨, 9레벨 던전은 어떻겠나? 8레벨 던전만 되도 어지간한 국가 단위로 붙어야 겨우 승산이 있고, 9레벨은 세계 단위의 협력이 필요하다. 아니, 그래도 모자랐다.
9레벨 던전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다섯 군주’와 ‘군단’들이니까. 강태성의 미래에서도 결국 뒤늦게 길드와 국가의 경계를 허물고 힘을 합쳤지만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도 용제 하나를 잡은 것이 고작이었다.
늦은 협력도 문제였지만 그들의 강력함 자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정말··괜찮겠죠?”
“걱정마. 7레벨까지는 생각보다 별 게 없다니까.”
그 때문에 민호과 가람이 은근한 걱정을 내비쳤지만 영민은 평온하기만 했다.
당장 영민과 철우만이 아니라 민호와 가람 역시 S등급에 필적하는 전투력을 지녔고, 만약 영민이 버프와 성역선포까지 발동시킨다면 S등급에서도 중상위에 해당할 정도로 전력이 상승했다. 어디 그 뿐인가? 아이템의 보정을 받으면 그 이상도 가능했고
그들이 지닌 천재적인 센스는 등급으로 판단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영민의 버프였다. 신성한 광휘를 비롯해서 효율이 가장 좋은 버프 스킬들이 연달아 발현되자 세 사람은 알아서 포지션을 잡았다.
탱딜힐.
셋만으로도 균형 잡힌 조합이었기에 적이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오지만 않는다면 어떤 몬스터라도 뚫어내기 어려운 포지션.
거기에 맨 뒤에서 영민이 따라가니 두려움은 금세 사라지고 약간의 긴장과 두근거림만 남았다.
“던전 타입이라.”
최초로 진입한 7레벨 던전은 던전 타입이었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다. 7레벨부터는 사실상 필드 단위가 무지막지해져서 기존처럼 며칠 내로 공략을 끝낼 수 없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다행인 것은 필드가 넓어진 만큼 ‘시간 배율 조정’이라는 특수한 효과가 걸려 있어서 던전 내에서 한달의 시간이 흘러도 현실에서는 고작 3일정도가 흐른다는 것이다.
던전 공략에 필요한 시간과 시간 배율 조정은 8레벨, 9레벨 던전으로 올라갈수록 더 커지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던전을 진입을 한다는 것은 적의 홈 그라운드로 걸어들어간다는 의미인 것이다. 심지어 특정 지역에서 상당한 버프를 받는 케이스도 있으니 8레벨 이상의 던전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당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적의 홈그라운드에서 불리한 싸움을 하느냐, 도시와 국가가 파괴되는 것을 감수하고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켜 변수를 차단하느냐.
그것은 후에도 인류의 고민거리가 될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던전 타입의 필드는 좀 애매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날 수도 있지만 99층이 마지막인 대미궁 수준으로 깊고 넓을 수도 있었고, 특수한 조건을 만족해야만 진행이 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만약 입장한 자들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 이상 진행이 불가한 채 며칠이고 몇 년이고 던전 내에서 머무르다 아사해야할 수 있었다.
대신 적의 숫자가 제한된다는 장점은 있었다. 군단 수준의 다수 병력이 출현하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했고, 중간에 대형 공간이 등장할 수도 있지만 좁은 길목을 이용하면 소수로도 다수의 적을 상대 할 수 있었다.
또한 적 중에 언데드 계열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유지와 관리에 상상 이상으로 많은 소모품과 비용이 들어가는 던전이다보니 대부분의 경우 식량을 크게 소비하지 않는 종류의 몬스터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런 조건을 따져봤을 때 가장 유리한 것은 언데드였다. 따로 음식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이니 얼마나 다루기 편한가?
‘나머지도 알만 하지··.’
그 밖에도 떠오르는 몇몇의 종들이 있었다.
종류와 기능이 워낙 다양해 아직 짐작하기 어려운 던전이었지만 영민은 크게 긴장하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온갖 트랩과 미로가 나타날 것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철우와 영민이 자리를 바꾸자 이동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영민의 행운이 트랩을 오작동 시키거나 안전지대만을 밟고 가게 만드니 뒤따라오는 이들은 앞 사람의 발자국만 따라 걸으면 확실한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어 애로우. 윈드 커터.”
곧 처음으로 등장한 몬스터의 수준은 아주 낮았다. 이제는 일행이 손짓 한 번으로 쓸어버릴 수 있는 고블린 수준의 최하위 몬스터들.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 아까울 만한 손쉬운 놈들이지만 영민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꽤 깊은 모양인데··.’
7레벨 던전 씩이나 되는 곳에서 이 정도 수준의 몬스터가 나타난다는 것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소리이지 때문이다.
‘그래봤자 7레벨이지.’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귀찮음이 더 컸다. 8레벨 이상이라면 모르겠다. 거기부터는 나오는 몬스터의 수준 자체가 궤를 달리 하니까.
특히 8레벨 던전의 보스쯤 된다면 뭐가 나와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예를들면 지난 번 만났던 비통의 드레이크라든지, 심한 경우 드래곤이 나오더라도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7레벨에서는. 그보다 한 수 접어주는 몬스터들이 고작이었다. 그 정도라면 설마 무리를 짓더라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등장할만한 몬스터도 대충 각이 나왔고.
“좀 더 속도를 높여볼까?”
“예!”
지하 2층으로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높아지지 않는 몬스터들의 수준을 확인한 영민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닫고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7레벨 던전에 입장하지 않는 시점에서 클리어 시간은 무의미했지만 이왕이면, 그리고 자신이 지루해서라도 시간은 단축시키는 편이 좋았다.
또한 너무 늦어질 경우 바깥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당장 클리어가 너무 늦어진다며 생떼를 써서 네 사람이 전멸한 것처럼 꾸밀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길드전 우승은 물론 개인전 우승과 준우승 자리까지 모조리 딴 놈들에게 돌아갈 게 아닌가? 한 발 늦게 그들이 나타난다해도 세계 헌터 대회에 그들의 이름을 등록하고 먼저 떠나버린 뒤 교체가 불가능하다고 우질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확률이 적지 않겠지.’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시간 배율 조정’의 존재와 영민이 이미 세 자리수의 7레벨 던전을 경험해봤다는 것을.
그렇게 네 사람은 보다 속도를 올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발자국을 따라가기 쉽지 않아졌지만 이미 하나 같이 S등급 헌터의 기량을 지닌 이들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한참이나 넘어선 초인의 영역. 그런 것쯤은 어렵지 않았지만 가도가도 끝이 없이 계속되는 던전의 지하는 심리적으로 그들을 조금 지치게
만들었다.
“아오. 대장, 이거 그냥 바닥을 부수고 내려가면 안 됩니까?”
“응. 안 돼. 정확히는 가능은 하지만 효율이 낮아. 땅속에 여러 광석들이 섞여있거든. 드릴이나 중장비를 가져와도 파는데 한참이고 스킬로 부숴봐도 효율이 크게 떨어지지.”
때문에 철우가 성질이 뻗치는지 당장이라도 바닥에 황홀한 강타를 날릴 듯 포즈를 잡았지만 영민에게 제지 당하고 말았다.
강태성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었다. 생각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해 시도를 해봤다.
결과는 번번이 실패.
파괴 불가의 법칙이 걸려있는 것은 아니지만 차라리 정상 루트로 가는 것이 나을 만큼 효율이 나쁜 것이다.
그런 소소한 정보들까지 이미 갖추고 있는 영민이기에, 꾸준한 것이 가장 빠르다는 것을 알기에 허튼 짓을 시도하지 않고 꾸준히, 그리고 빠르게 다음 층으로 내려갔다.
10층, 20층, 30층··.
40층 쯤 되니 슬슬 B등급 헌터에 어울리는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50층이 되자 A등급 수준에 맞춰졌고 60층이 되자 한층 한층이 6레벨 던전과 맞먹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전체적인 수준은 물론 해당 층을 지키는 보스, 플로어 마스터의 수준 또한 비슷했지만 네 사람을 곤란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그들 중 누구라
도 일대일로 플로어 마스터를 쓰러뜨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 그들이 떼로 덤비니 플로어 마스터가 불쌍해질 만큼 일방적인 전투가 진행됐다.
그렇게 밀어붙인 것이 65층.
짬짬이 식사와 수면도 취하며 그곳까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보름이었다. 전투력 자체는 차이가 났지만 걷고, 길을 찾고, 길을 막는 몬스터들을 일일이 상대해주느라 시간을 허비한 탓이었다. 50층부터는 한층 한층의 사이즈가 너무 커져버린 까
닭도 있었다.
보통 지하로 파내려가는 구조라면 크기가 작아져야 할텐데,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오히려 도시 규모 이상으로 사이즈가 커졌다.
다른 길드였다면 60층까지 오는 데만도 보름이 훨씬 넘게 걸릴 터였다. 그나마 이만큼 시간을 단축 시킨 것도 힐름이기에, 영민이기에 가능했던 일.
66층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눈앞에 둔 영민은 진지해진 얼굴로 일행을 돌아봤다.
“이런 찝찝한 숫자에는 대비를 해주는 게 좋지. 준비들 됐어?”
“예. 대장!”
“얼른 끝내고 나가죠!”
66층. 숫자부터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지 않나?
물론 66층이 마지막이 아니라 70층, 90층, 어쩌면 99층이 마지막일 수도 있지만 영민은 강태성의 경험상 44나 66 같은 숫자에는 뭔가가 튀어나올 확률이 높았다.
‘예를 들어 마족이라든가.’
완벽 정비를 마친 네 사람이 굳은 표정으로 66층에 내려갔다.
“윽, 이거 뭐야?”
66층의 땅을 밟자마자 철우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붉은 색과 검은 색이 뒤섞인, 축축하고 질척거리는 진흙 같은 땅이었다.
“마계화라··.”
“마계화요?”
“일정 지역을 마계화 비슷한 환경으로 만드는 거지. 마족과 언데드가 최대한 힘을 쓸 수 있도록.”
“그렇다는 것은··.”
“마족이라는 소리지. 이 층의 주인이.”
적의 타입은 명확해졌다. 하지만 과연 이득일지는 알 수 없었다. 영민을 대표하는 속성은 성(聖). 마족과 언데드에 반대되는 속성이다. 하지만 마계화가 이미 완료된 대지라면 적어도 ‘성역 선포’ 하나만큼은 없는 셈이 되어야 했다.
성역 선포를 통해 마계화를 일시적으로 상쇄시킬 수 있지만 말 그대로 상쇄이기 때문에 성역 선포 역시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상극 속성에는 데미지가 추가로 들어간다지만 성역 선포는 영민의 버프 중 핵심에 속하는 능력이기에 손실은 컸다.
게다가 상대는 최소 S등급 헌터의 수준인데다 보스는 그것을 뛰어넘는다. 마왕까지는 아니어도 마계 장군 쯤은 될 터.
그런 놈들을 고작 네 명으로 상대 할 수 있을까? 불안한 감이 있었지만 영민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믿는 구석이 한 가지 더 있기 때문이다.
66층에서는 기존과 달리 전진 속도를 최대한 늦추고 한 마리씩 끌어들여 사냥하는 방식을 취했다. 마음만 먹으면 세 마리쯤 까지도 동시에 사냥 할 수 있었지만 최대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마계’답게 대형 마수이거나, 중상급의 마족이었다. 마계화의 버프까지 더해져 한 마리 한 마리가 6레벨 던전 보스를 능가하는 무언가를 갖춘 녀석들. 성역 선포를 함부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영민들은 최소한의 버프만으로 놈들
을 상대해야 했다.
“마계화가 무섭긴 무섭네요.”
“우리가 성역 선포 쓰던 걸 생각해봐.”
“하긴····.”
어떻게든 상대가 가능하긴 했지만 그저 홈그라운드 정도가 아니라 능력의 강화를 넘어 진화까지 가져오는 마계화의 위력은 실로 무서웠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삐끗했다가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정도였으니, 다른 10대 길드는 전력을 투입해도 전멸하기
십상일 수준. 자신들이 평소 애용하던 능력을 적이 사용하는 것을 보자 그게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이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마지막이다.”
그래도 벌써 마지막까지 왔다. 모든 버프를 새로 걸고 도핑이 가능한 모든 포션을 들이킨 뒤 네 사람은 생김부터 흉악한 보스방의 문을 열어 젖혔다.
< 126화 - 럭키 포텐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