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우승 (2) >
“양 선수. 준비하시고··. 파이트!”
심판의 휘슬이 울렸지만 영민과 강중만 두 사람 모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상대가 먼저 손을 써도 충분히 대응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자 여차하면 카운터를 치겠다는 경고인 것이다.
진지한 눈으로 매섭게 노려보는 강중만을 보며 영민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상대는 몹시 기분 나빠하겠지만 알게 뭔가. 그저 우스운 것을.
하지만 그 웃음 속에도 서늘한 칼날이 숨어 있었다.
“장비가 꽤나 화려합니다?”
웃음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강중만의 장비가 평소의, 또 알려진 것과 많이 달랐던 것. 영민을 분석하고 대비해 옵션을 맞춘 특별한 장비를 착용한 것이다.
10대 길드 중에서도 이제 수위에 꼽히는 아리랑 길드의 길드장치고는 꽤나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신중한 거라 해두지.”
물론 본인들이 항변하는 바는 달랐지만 영민은 그 모습이 퍽이나 애처로워보였다.
직접 확인해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그의 화려한 장비들에 숨겨진 옵션은 대략 알 것 같았다.
다름 아닌 ‘신성 저항’이다.
영민이 가진 힘의 근본이 ‘신성’ 계열에 가깝다는 것을 전해들은 것이겠지. 실제로 그가 발하는 버프 중에는 신성 계열인 것들이 대다수라 할 만큼 큰 비중을 자치했지만 영민은 개의치 않았다. 신성력을 이용한 버프는 스스로를 강화하고 증폭시키기 위함
이지, 상대에게 직접 타격을 입히는 힘은 아닌 것이다.
“뭐, 많이 신중하십시오. 성역 선포.”
우우우웅-
파츠츠츳?
그런데, 성역 선포를 발동하는 순간 영민은 이상함을 느꼈다. 일대를 장악하며 퍼져나가야 할 신성한 기운이 어째 주춤거리는가 싶더니 일정 범위 이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빛도 옅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건··.’
덕분에 영민의 눈빛도 변했다. 강중만의, 아리랑의 능력을 너무 얕봤던 것. 상대가 착용 혹은 발동한 아이템에는 ‘신성 저항’이 아닌 ‘신성 억압’ 계통의 힘이 잠들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성녀 아리스가 가진 신성 지배만큼은 아니지만 신성 계열의 힘을 근원으로 하는 대상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는 능력.
강중만이 신중하면서도 여유를 부릴 수 있던 이면에는 바로 이런 믿는 구석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지. 무혼 각성.”
영민이 흠칫 당황한 것에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한 것일까. 강중만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고유 능력을 발동시켰다.
이른바 무혼 각성.
무기가 가진 힘과 혼을 일깨운 뒤 자신이 그에 ‘동화(同化)’되어 강림과 같은 힘을 얻는, 정확히 변화계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능력이었다.
보다 위력적인 무기를 가질수록 그 힘이 급격히 상승하는 능력이 에픽 등급의 무기 ‘선풍환’에 부여되었다.
강력한 바람의 힘을 품은 무기.
벌써 얻은 지도 제법 시간이 되었고 그보다 높은 단계의 던전도 열렸지만 아직 그가 가진 최고의 무기였다.
놈은 그것과 동화됨으로서 강철보다 단단한 피부를 갖고, 손짓 한 번으로 상대를 찢어발길 바람의 칼날을 뿜어낼 수 있게 되었다.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도 무섭지만 무기와 일체화 된다는 사실 또한 무시 할 수 없었다. 이른바 ‘신검합일’ 같은 효과를 거저 얻게 되는 것이다.
따로 무기술을 익히지 않았어도, 그 무기에 한해서는 누구보다 능숙하게 제 몸처럼 다룰 수 있게 되니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고수를 넘어 달인에 가까운 무기 컨트롤을 가진 상대와 싸워야 하니까. 특히 일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특이한 형태
의 무기를 지녔을 때 효과는 더 컸다. 나는 상대의 무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상대는 내가 가진 무기의 활용법에 대해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선풍환’이라는, 좀처럼 보기 힘든 특이한 무기를 가지고 높은 자리까지 길드를 끌어 올릴 수 있던 이유였다.
“오지 않으면 내가 가지.”
완벽한 동화를 마친 강중만이 체면 불구하고 먼저 움직였다.
“쳇.”
바람처럼 다가오는 강중만을 보며 영민은 일단 스텝을 밟아 거리를 벌렸다. 그가 또 무슨 준비를 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맞붙는 것은 미련한 짓이니까.
“헤븐즈 레이.”
파바바방!
영민의 주위로 생겨난 십여 개의 빛 무리가 동시에 강중만을 향해 쏟아졌다. 기존보다 약해진 광채가, 놈에게 닿는 순간 더욱 연약하게 부딪혀 바스러졌다.
역시 신성 저항 계열의 방어구를 완비한 모양.
때문인지 미꾸라지처럼 달아나는 영민을 잡지 못했음에도 강중만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에 영민도 상대의 세팅을 확신했다.
‘이 아저씨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는 군.’
확실히 영민이 가진 신성 계열 능력들의 효율이 급격히 감소했다. 공격 스킬은 물론이고 버프 스킬에도 영향이 있는지 평상시만큼 능력 증폭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 하지만 영민이 가진 능력은 고작 성기사의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뭘로 요리를 해줄까?’
급감한 버프의 힘만 받고도 바람의 힘을 일으켜 덤벼오는 강중만의 공격을 털 끝 하나도 다치지 않고 피해낼 뿐 아니라 여러 선택지 중에 어떤 것을 써야 더 괴롭혀 줄 수 있을지 고민을 할 정도였다.
“일단 이거나 드슈! 체인 라이트닝!”
시작은 전격 마법부터였다. 뇌신의 인장으로 3배나 강화된 뇌전의 그물이 강중만을 향해 뻗어가자 그도 잠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신성 계열이라고 해서 그 쪽으로 풀 세팅을 마치고 나왔는데 느닷없이 다른 속성이 튀어나온 것이다.
“선풍격!”
하지만 그 정도에 당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몸을 휘돌리며 얻은 회전력을 가미해 전격을 가르고, 스스로 칼날 전차가 되어 영민에게 역으로 들이닥쳤다.
“그러면 안 어지러워요?”
쩌엉!
그러나 영민은 드래곤 슬레이어를 들어 가볍게 받아냈다. 영민이니 가볍게 받았을 뿐, 선풍격의 공격력도, 회전력까지 가미된 충격량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드래곤 슬레이어의 공격력은, 영민의 근력은 이미 그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 있었다.
“억.”
묵직하게 꽂혀오는 내려찍기를 막다 못해 튕겨내자 강중만의 눈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선풍환을 얻은 이후로 이런 적은 결단코 단 한 번도 없던 것이다. 일부 던전 몬스터들의 경우 막아내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상대 역시 전력을 다해야 막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히?
강중만은 이를 악물며 다시금 덤벼들었다. 영민이 무언가 수작을 부린 것이라면, 바로 찾아내 깨부숴주겠다고 마음먹으며.
그것이 가능할 만큼 그에게도 숨겨놓은 아이템들이 제법 있었다.
“차핫!!”
강중만의 손에 들린 선풍환이 프로펠러처럼 회전하며 다시금 영민을 향해 날아들었다.
회전력을 더할수록 위력이 증가하는 선풍환의 특성에 바람의 힘까지 더해지니 그 위세가 강맹하기 그지 없었다.
“거참, 소용 없다니까 그러네.”
쩌엉!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영민은 별다른 추가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힘껏 드래곤 슬레이어를 휘둘러 그를 튕겨냈다.
“템빨 싸움이라면 이 쪽도 자신 있다고.”
이것이 바로 강중만이 가진 고유 능력의 맹점이었다. 보유한 아이템의 능력이 강할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반대로 상대의 무기가 더 강력하다면 한 없이 무력해지는 것이 바로 그의 고유 능력, 무혼 각성이었다.
무혼 각성을 사용 시 기존 장비의 능력이 강화된다고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심지어 영민이 가진 봉인의 드래곤 슬레이어는 무려 +13까지 강화가 완료된 상태가 아니던가?
육체적 스펙이나 장비의 스펙 모두에서 차이가 나니 힘의 차이는 의외로 극명히 드러났다.
“빌어먹을!!”
믿기 싫은 그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 강중만은 즉시 태세를 전환했다. 선풍환에 집중되어 있던 마나를 갑옷으로 돌리는가 싶더니 새로운 스킬을 발동시킨 것이다.
“무혼 흡수!”
파아앗-
퍼석
다음 순간, 그가 입고 있던 갑옷들이 마른 찰흙처럼 바스러졌다. 가지고 있던 힘들을 강중만이 흡수한 것이다.
비록 완전히 흡수한 것은 힘의 일부에 불과했지만 나머지 힘들은 임시로나마 취할 수 있기에 벌인 짓이었다.
“와, 이 새끼도 치사하게 나오네.”
그 다음 행동은 참으로 더러웠다. 장비를 흡수했으면 땡인 것이지, 한 편에 준비해둔 다른 장비를 곧장 장비한 것이다.
영민이 이전 경기에서 드래곤 슬레이어 대신 룽기누스를 장비했듯이 대결 중 장비를 교체하는 것이 반칙은 아니지만 인벤토리도 없고, 무혼 각성이라는 고유 능력을 가진 그가 하자 어쩐지 치사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봐야 달라질 건 없지.”
영민의 눈빛이 다시금 날카로워졌다.
“진짜 힘을 보여주마!”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중만은 큰 소리를 치며 재차 덤벼들었다. 본래의 장비를 착용하자 급격히 빨라진 속도. 힘도 조금 상승하기는 했지만 민첩성이 크게 상승한 모습이었다.
선풍환의 특징상, 힘을 강화한 일격보다 속도와 회전력을 상승시키는 편이 훨씬 위력 증가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민에게 위협이 되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아예 드래곤 슬레이어를 쓰지도 않았다. 손목에 매단 라운드 실드, [+13 거울 방패]를 들이 밀었을 뿐이다.
회전을 기본으로 하는 선풍환의 경우 경로를 예상하기가 매우 쉬운 편이었으니 슥 들이미는 것만으로 맞부딪힐 수 있었다.
“끄억!!”
거대한 선풍환과 자그마한 거울 방패가 부딪히는 순간, 피를 뿜으며 쓰러진 것은 다름 아닌 강중만이었다.
거울 방패의 특수 옵션인 [진실된 거울의 힘]이 터지며 무려 130%의 데미지를 그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데미지는 그저 충격 뿐 아니라 예리하고 깊은 상처까지 만들어냈다.
거의 허리가 동강이 날 지경.
자신의 내장이 쏟아지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충격에 보통 사람이라면 쇼크사를 했을 상황이었다.
“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 치는 그를 보던 심판이 황급히 경기를 중단 시키고 의료진을 투입했다. 대기하고 있던 지원계 A등급 헌터들이 몇이나 매달렸다. 내장을 쓸어담고 회복 능력을 퍼부어 보지만 회복은커녕 숨을 붙여 놓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다들 비켜보세요.”
그때 여리여리한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존재감이 나타났다.
성녀, 아리스였다.
“서, 성녀님?”
놀랄 새도 없이 그녀에게서 뿜어진 신성력은 거의 시간 회귀에 가까운 위력을 발휘했다. 흉터는커녕 이전보다 뽀얗고 깨끗해진 피부. 왜 성녀가 성녀라고 불리는지, 세계의 재벌가 아주머니들이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녀를 처음 마주한 모두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지만, 영민만큼은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쪽은 대표 선발전 안합니까?”
그리고 그 불편한 심기는 곧 말로서 튀어나왔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많은 분들의 배려로 저는 선발전을 치르지 않고 참여하게 되었답니다.”
예쁜 얼굴로 살살 웃으며 이야기하니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줄 수도 없었다.
이제 여러모로 아렌과 한 판 붙어볼만 했지만 지금처럼 사람들의 눈이 많으면 그러기도 어려운 것이다.
“어휴. 맘대로 하세요.”
결국 고개를 가로저은 영민은 그녀를 두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도 딱히 영민을 붙잡을 생각은 없는지 치료를 마친 뒤 관람석으로 돌아갔고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철우의 경기를 관람했다.
철우의 준결승전은 아주 단순하고 쌈박하게 진행됐다. 강화계 대 강화계의 대결이니 이종격투기를 보는 기분으로 감상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일반인들의 격투기와 달리 어지간한 데미지로는 KO나 TKO가 인정되지 않는 다는 것.
주먹과 검의 대결이라는 것이 언뜻 불합리해보이지만 그 이상으로 터프하게 덤벼드는 철우 덕분에 흥미진진한 경기가 지속되었다.
“쌈 구경엔 역시 팝콘이지.”
그 치열한 대결을 영민은 미리 챙겨온 캬라멜 팝콘을 씹으며 구경했다.
상대도 만만치 않아서 과정은 치열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철우의 승리였다.
길드 힐름의 출전자 둘이 사이좋게 결승에서 만나게 된 것.
그리고 철우는 즉시 기권했다. 일각에서는 겨뤄보지도 않고 기권을 한 철우를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들을 향해 철우는 이렇게 일축했다.
“두들겨 맞기만 할 게 뻔한데 뭐하러 그런 짓을 합니까?”
그 한 마디로 소란은 얼추 잦아들었다. 두 사람이 같은 길드이니, 대련 정도는 평소에도 얼마든지 해왔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유추 할 수 있으니까.
실제 실력 향상을 위해 많은 길드들에서 내부 대련을 하곤 하니까. 그 덕분에 영민의 능력에 대해서는 수많은 말들이 생겨났다. 철우가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을 것이 두려워 기권을 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것일까. 부풀려지고 부풀려진 수많은 말
들이 생겨났지만 확실한 것은, 그 어떤 추측도 영민의 강함을 제대로 짐작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벌어진 3, 4위 전에서는 성녀의 도움으로 기력을 회복한 강중만이 승리해서 어떻게든 체면치레는 하게 되었지만 이미 1, 2위를 차지한 영민과 철우에 가려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리랑을 비롯한 모든 길드에서는 나머지 한 경기인 길드전에 집중을 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치기도 했지만 추가로 용병과 아이템들을 끌어모으며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길드전의 방식은 타임 어택.
6레벨 이상의 던전 중 하나를 선택해 최대 100명의 인원으로 진입해서 가장 먼저 던전을 클리어하는 쪽이 우승을 하는 방식이다.
그로인해 다른 부산물을 획득할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 아깝긴 했지만 여차하면= 던전 스톤으로 충전을 하면 되니 문제는 없었다.
길드전이 진행된 날짜는 개인전 결승이 있던 날로부터 3일 뒤. 헌터협회에서 정한 날짜와 시간에 맞춰 참여한 모든 길드가 일제히 던전에 진입했다.
단 한 곳, 힐름을 제외하고.
“형, 정말 우리 이렇게 여유 부려도 되요? 어쨌든 상대는 쪽수가 많은데··.”
이미 먼저 진입한 이들과는 한 시간이 넘게 차이가 나는 상황. 그 동안 그들을 이끌고 점심까지 든든하게 먹은 영민은 배를 두드리며 민호에게 피식 웃어보였다.
“걱정마. 걔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우릴 이길 수 없어.”
“다크니스 오러라도 쓰려고요?”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민호가 갸웃거리자 영민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작전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한 레벨 높은 던전에 들어갈 거거든.”
상대가 하루만에 클리어하든, 한 시간만에 클리어하든. 한 레벨 높은 던전을 공략하면 시간과 상관없이 우승이 확정된다.
영민이 노린 것은 바로 그 룰이었다.
그렇게, 길드 힐름의 네 사람은 던전의 레벨이 조정된 이후 대한민국 최초로 7레벨 던전에 진입하게 되었다.
< 125화 - 우승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