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개인전 (2) >
총 20명의 본선 진출자를 뽑는 개인전 예선은 무척 빠르게 진행이 됐다. 기본적으로 S등급 헌터가 줄줄이 출전을 하니 애초부터 A등급 중에서도 상위권이라 자부하는 자들만 지원을 한 까닭이다.
때문에 치열한 공방과 화려한 스킬들이 난무했지만 오히려 딱 한 방으로 모든 것을 심플하게 끝낸 철우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돌아갔다.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전투를 치른 이들이지만 정신의 피로까지 회복시켜주는 회복계 헌터들의 능력을 받자 본선도 휴식일 없이 곧장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너, 뭔 짓을 한 거냐?”
모두 50명의 출전자가 모인 본선 경기장.
예선이 시작한지 한참 뒤에야 호출을 받고 도착한 영민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철우에게 쏠려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주목을 받을만한 스킬이 있는 것은 아닐텐데?
잠시 이상하게 생각하던 영민은 그냥 몸으로 때워서 그랬겠거니 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뭔 짓을 했든 알게 뭔가? 이겼으면 장땡이지.
“자, 그럼 본선 대진표를 공개하겠습니다!”
곧이어 사회자가 대진표를 소개할 때, 영민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재미있게도 이미 은연중에 각자의 파벌에 따라 무리를 짓고 있었다.
애초에 해당 길드인 인원들은 물론 다른 소속 또는 개인 자격으로 출전해 본선까지 올라온 이들도.
그렇다는 것은 본선 진출자들 역시 그들에게 속해있다는 의미였다.
‘결국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소리지.’
물론 모두가 일치단결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 역시 높은 순위가 탐날 테니까.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들에 속해있지 않는 그룹의 몇몇을 공동으로 배제하려는 노력쯤은 할 것이 분명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계속해서 같은 방향 또는 같은 곳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미세한 트라우마 같은 것을 심어두면 다음 사람이 전투 할 때 그 인식을 이용해 허를 찌를 수도 있는 것이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회복 시켜주지 않는 방식이면 부상을 계속해
서 늘려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일단 공정한 경기를 위해 한 경기가 끝난 뒤에는 모든 부상을 회복시키니 여러 기묘한 방법들이 동원되겠지.
‘어디 깽판을 좀 놔볼까?’
대진표를 살핀 영민은 다행히도 철우와 결승 이전까지 붙을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실 10대 길드에서는 둘이 일찌감치 맞붙어 한 명이 떨어지도록 설계하려 했으나 세간의 이목 등을 고려해서 헌터협회의 간부도 그것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국제 기구와 같은 성격인 헌터협회는 당장 지부의 몇몇 인물들이 정치인이나 대길드에 머리를 숙이고 용돈을 받아챙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단체로서는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있을 만큼 강대한 조직이었다. 그렇기에 원하던 그림이 나오지 않
았어도 누구도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했다.
“자신 있지? 결승에서 보자.”
“예. 대장. 원펀치로 결승까지 올라갈게요.”
“····?”
영민은 그게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이번에도 내버려두고 자신의 상대를 찾았다.
첫 번째 상대는 활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궁사 타입의 헌터. 쉽게 보기 어려운 스타일이다보니 꽤나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물론 강태성이야 꽤 많은 궁사 타입 헌터와 몬스터들을 겪어봤지만 영민으로서는 경험이 많지 않은 것이다.
신기한 눈으로 상대와 대진표를 몇 번이나 번갈아 바라 본 영민은 비로소 이 대진표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나를 테스트하시겠다?’
이건 테스트이자 저격이었다. 영민이 탈락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저격.
영민의 기본 전투 타입이 검과 방패를 이용한 근접 전투라는 것은 이미 알려졌다.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방패 전사’의 약점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기동력이었다. 굳건한 방어력과 강력한 한 방 데미지가 있는 대신 기동력을 희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물론 영민은 사정이 좀 달랐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상대는 시작과 동시에 거리를 벌리며 활을 당겼다.
노리는 것은 영민의 발 밑. 뭘하려는 것일까 가만히 자세도 취하지 않고 지켜보자 화살이 발치에 와서 틀어박혔다.
“아, 시작과 동시에 날아온 화살 한 발! 어쩐 일일까요. 빗나가기는 했지만 권영민 선수, 반응조차 하지 못합니다!”
‘빗나간 게 아닌 것 같은데?’
해설의 주절거림과 달리 영민은 놈이 의도대로 공격에 성공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알림창에 무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림자 쐐기’ 스킬 효과가 발동합니다.]
[일시적으로 그림자의 크기만큼만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군.’
영민의 행동을 더욱 제약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만한 것은 아니다. 영민처럼 알림이 뜨지 않는 다른 이들이라면 영문을 몰라 당황하겠지만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얘기다.
확률성 스킬이 아니라 조건부 확정 스킬인지 효과가 발동한 것은 놀라웠지만 영민은 슬쩍 연달아 날아오는 화살들을 피하며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궁술이라··, 재밌겠네.”
그림자를 없애는 ‘빛’을 소환하면 그림자 쐐기 효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굳이 그럴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그 자리에서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놈의 화살을 슬쩍 슬쩍 피해내다 똑같이 활을 꺼내들었다.
동시에 오색의 빛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하이엘프의 궁술의 핵심이 되는 정령 융합이 절로 일어난 것이다.
아무리 궁술에 특화된 고유 능력을 지녔다해도 하이엘프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굳이 신성한 광휘나 성역 선포 따위를 하지 않아도 이거면 충분했다.
“실력 좀 볼까?”
파바바밧-!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신기에 가까운 궁술의 정수가 영민의 손 끝에서 펼쳐졌다. 화살 한 발이 절묘한 각도로 날아가 놈이 쏘아낸 세 대의 화살을 모두 튕겨내버리고 다른 화살들은 놈의 급소를 향해 나아갔다.
저항? 감히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팔과 다리에 한 대씩 화살을 덜렁거릴 뿐이었다.
“크아아악!!”
몸에 닿는 순간 갉아먹고 폭발하는 정령의 힘은 놈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선사했다.
해맑던 정령들의 모습이 모두 가식적으로 느껴질 만큼 정령 융합을 이용한 궁술은 파괴적이었다.
“시, 시합 끝! 권영민 승리!”
“아~. 권영민 선수. 반응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어요! 그럴 가치를 못 느꼈던 거죠! 궁술은 저 선수의 장기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 정도면 이미 국내, 아니 세계 탑 급이에요! 방금 상대한 신민창 선수가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궁사거든요~!”
승리가 확정되자 영민은 그림자를 붙잡고 있던 쇠말뚝 같은 화살을 발로 툭 차서 날려버리고 자리에 돌아왔다.
특수한 스킬로 사용된 그 것은 원래 그런 식으로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장, 늦으셨습니다?”
자리로 돌아오니 먼저 경기를 끝낸 철우가 씨익 웃으며 그를 반겼다. 장난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먼저 경기를 끝냈다고 자랑 겸 놀림을 시전한 것이다.
“급똥이 온 것도 아니고, 명색이 축제인데 좀 즐겨야지.”
물론 그런 도발에 걸려들 영민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영민은 사람들이 왜 철우에게 주목하고 흥분하는지 파악 할 수 있었다.
모든 공격을 무시하고 들어가서 황홀한 강타 한 방만 날리면 S등급 이하는 어지간하면 끝이겠지.
특히나 저 무식한 방어력과 생명력을 본 사람이라면 어떤 공격을 해야할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허둥대다 끝장이 나기 쉬웠다.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경기들을 살피자 출전자들이 꽤나 달아올라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영민과 철우의 초단시간 승리를 목격한 탓인 듯 했다.
애초에 한 패인 자들끼리 붙으면 기권에 가까운 승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다른 패거리끼리 붙은 경우에는 경기가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봤자 예선에 가까운 본선 첫 토너먼트는 예정된 수순대로 금방 승패가 결정나긴 했지만.
“10분 휴식 후 다음 경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뭘 10분 씩이나.
별로 힘 들인 것도 없는 영민과 철우는 별도의 회복이 필요 없음을 알리고 스마트폰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잠시 후, 본선 2차전이 시작됐다.
영민의 이번 상대는 네크로맨서 계열이 고유 능력을 지닌 헌터였다. 그것도 S등급에 무척이나 근접한 인물.
전장이 아니기에 그 능력이 극대화되기는 어려웠지만 워낙 흔치 않은 고유 능력의 보유자이기에 수준이 비슷한데도 상대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해 쉽게 올라온 자였다.
그리고 다른 이들 역시 이 점을 우려했다.
“강효종 선수의 고유 능력이 아주 특이하네요. 무려 네크로맨서에요. 네크로맨서! 사람의 시체를 다루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몬스터의 시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큰 고유 능력이긴 한데요. 이 선수 아공간에 잠들어있는 언데드들이 아주 강력합니
다.”
“하지만 권영민 선수는 언데드에 상극인 신성 계열이 아닌가요? 단순히 속성상으로만 보면 권영민 선수가 우위 일 것 같은데요.”
“아니죠. 흔히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만 빛과 어둠은 서로 상극입니다. 빛은 어둠에게, 어둠은 빛에게 더 큰 위력을 낼 수 있어요. 결국 더 센 놈이 살아남는 구조인 겁니다!”
“아하. 그럼 강효종 선수의 언데드 물량을 권영민 선수가 얼마나 잘 버텨내는가가 관건이겠군요. S등급의 헌터냐, 다수의 A등급 언데드 군단이냐! 지금 시작합니다!!”
하지만 정작 영민은 이번에도 별 생각이 없었다.
그가 네크로맨서인 것까지는 몰랐지만 어둠 계열의 능력을 보유했다는 것은 마나를 통해 확인한 상태였고 이번에도 역시 선공을 양보한 채 가만히 그가 하는 꼴을 지켜보았다.
“내게 시간을 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팔짱을 낀 채 관전하듯 바라보는 영민의 의도를 알아차린 강효종은,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이를 빠득갈며 아공간을 열었다.
미리 준비해둔 최정예 언데드들을 모두 경기장 내에 쏟아냈다.
“오호?”
대전 상대 프로필을 통해 확인한 강효종은 A등급 헌터였는데 소환한 언데드들이 제법이다. 탱커형으로 진화한 본 나이트와 날개에 메뚜기 같은 다리까지 가져서 딱 봐도 고속 이동형인 키메라, 유체화 된 몸을 가져 일반 공격은 통하지도 않는 팬텀들과
갓 승급한 것으로 보이는 데스 나이트까지.
공방이 탄탄하게 갖춰진 듬직한 언데드 부대를 확인한 영민이 흥미롭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제안했다.
“이거 다 키우려면 개고생 했을 텐데 형이 10초 준다. 기권해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그의 노력과 정성이 안타까워 나온 제안이었다. 팬텀의 소환 조건도 까다롭지만 키메라의 면면을 살피니 재료로 삼은 몬스터를 잡기 위해서만 몇 개월은 고생을 했을 게 뻔하고 특히 데스 나이트의 경우에는 단번에 마력과 능력의 정
수를 쏟아부어 만든 것이 아니라 어중간한 단계부터 게이머처럼 천천히 죽음과 공포를 먹여 성장시킨 것이다.
그것이 진심으로 아깝고 안타까워 한 제안이건만 받아들이는 상대에게는 고깝게만 들린 모양이다.
“이 새끼가 어디서 허세를··.”
강효종은 스스로 만들어낸 언데드 부대에 대한 자신감인지, 자존심인지 모를 것 때문에 굳이 벌주를 택하고 말았다.
“하아. 난 분명 기회를 줬다?”
영민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어리석은 선택 뿐이었다.
“전군 돌격!! 망자의 외침! 심연의 공포! 부패의 저주! 쇠약의··.”
[망자의 외침에 저항했습니다.]
[심연의 공포에 저항했습니다.]
[부패의 저주에····.]
연달아 들려오는 저주 저항 알림을 들으며 영민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빛나는 손을 들어올렸다.
아주 가볍게 스킬을 발동시켰다.
“턴 언데드.”
뽀각!
낮은 확률로 언데드를 무로 되돌리는 신성 주문이 힘을 발휘했다.
< 121화 - 개인전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