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세계 헌터 대회 (2) >
“네 생각은 어떤데?”
민호의 물음에 영민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으음. 당연히 걸러야겠죠? 이 정보가 맞다면 다른 10대 길드 중 다수가 우릴 물 먹일 생각인 것 같은데··.”
“그런데?”
“····쩝. 보상이 탐나긴 하네요. 전천사의 광익이라니.”
서류에서 경고하는 바는 분명했다. 만약 힐름이 한국 대표 선발전에 참여하면 10대 길드가 단체로 편을 먹고 창피를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방법에 대해서까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작정을 한 것처럼 보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러니 굳이 대응 할 필요는 없지만 개인전 우승 상품으로 걸린 아이템이 너무나 탐났다.
무려 레전드 등급의 장신구인 전천사의 광익.
망토 아이템과는 별개로 장착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뿐 아니라 빛의 날개를 뻗어 스스로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최고의 이동형 아이템이었다.
근접 계열이 써도 좋지만 민호처럼 마법 계열이 써도 안전을 담보하며 충분한 데미지를 넣을 수 있게 해주는 꿀 같은 아이템이니 탐이 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 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하지만 함정일게 뻔한··.”
“우리가 언제 그런 것 따져가며 움직였어? 함정을 깔았으면 해제를 하든 부수든 하면 그만이지. 놈들이 수작을 부려봤자 결국 우리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니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을 거야. 그리고 한국 예선이야 별 거 없지만 세계 대회에서 우승
을 한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상당히 늘어나겠지.”
그들의 예상과 달리, 영민은 흔쾌히 한국 예선에 참가할 의사를 밝혔다. 세계 헌터 대회의 국가별 예선에 해당하는 한국 예선의 경우 그들의 입김이 어느 정도 닿아있을지는 몰라도 좌우 할 수 있을 만큼 가볍지는 않을 뿐 아니라 여기서 한국 대표로 선
발되어 세계 대회에 나가면 그 성적에 따라 엄청난 발언권을 얻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영민은 앞으로 일어날 던전 쇼크 등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행동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쌓기 위해 이번 기회를 이용할 작정이었다.
설령 함정이라 해도 상관 없었다.
당장 단일 전투력에서 자신과 견줄 수 있는 이도 별로 없는데다 길드 단위의 전투력이라해도 결코 밀린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무엇으로 앞을 가로막든 부수고 헤쳐나갈 생각이었다.
“음. 그럼 개인전과 단체전 중 어디로 나갈 거에요?”
“둘 다.”
한국 대표 선발전은 크게 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개인전이고, 다른 하나는 단체전이다.
간단히 말해 개인전은 대련, 단체전은 던전 공략 타임어택이 방식인데 영민은 두 가지 모두 참가 의사를 밝혔다.
“에엣, 길드전도요?”
개인전이야 말 그대로 개인이 치르는 것이니 이해가 됐다. 하지만 길드전까지?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하겠다는 말이 떨어지자 민호가 조금 우려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이거 인원 제한이 100명인데··. 가능할까요?”
길드전의 경우 인원 제한이 100명이었다. 길드당 최대 100명까지 투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헌터 대회를 명목으로 고레벨 던전의 수를 줄여놓으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지만 일단은 안전, 전력의 보전이 기본 전제이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이라 판
단되는 수준까지 참여 가능 인원을 늘려놓은 것이다.
다른 길드라면야 수백 명의 헌터를 보유하고 있으니 골라서 뽑는다지만 힐름의 경우 총원이 다섯이니 고르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전원이 다 입장하거나, 유재한을 제외한 네 명만 입장을 해야하는 상황. 아무리 개개인의 능력이 특출나다지만 ‘타임 어택’을 형식으로 하니 상대적으로 크게 불리 할 수밖에 없었다.
“길드원을 추가로 받아야 하나··.”
때문에 모두가 길드원의 추가 모집을 떠올렸다. 상당히 시간을 끌면서 기존 골든 크로스의 멤버였던 고위 헌터들이 다른 길드로 이적을 해버렸지만 아직까지 기다리는 이들은 더러 있었고 10대 길드쯤 되는 곳으로 옮긴 것이 아닌 이상 이미 들어간 길드
를 박차고 나올 확률도 꽤나 높았으니까 모집 자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꼭 그들이 아니더라도 힐름에서 길드원을 모집한다고 하면 벌떼처럼 사람이 모여들 테고.
그렇게만 된다면 던전 공략은 큰 무리 없이 진행이 가능할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누구보다 빠르게 던전 클리어가 가능할 것이다.
인원 수가 많을수록 영민의 광역 버프가 빛을 발할 테니까.
적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하고 신선한 광휘와 성역 선포만 써주면 영민이 나서지 않더라도 1등으로 클리어가 가능할 게 분명했다.
“필요 없어. 우리끼리 간다.”
하지만, 영민은 추가 모집을 거부했다.
“굳이 날파리들과 어울려줄 필요는 없지. 우리끼리 클리어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타임어택이····.”
“그건, 다 방법이 있지.”
여기서 길드원을 모집하는 것은 아마 다른 10대 길드가 바라던 바일 터였다. 추가로 모집하는 길드원 사이에 자신의 사람들을 끼워넣겠지.
그들이 간부급까지 올라가면 좋을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소소한 정보들을 빼돌리고 역으로 안에서 공작을 피울 수 있으니 이득일 터였다.
그런 뻔하디 뻔한 수작이 영민에게 통할 리 없었다.
사실 그들이 길드에 들어오고 정보를 유출한다고 해서 압도적인 힘, 능력치 상승으로 몰아붙일 그들을 잠시라도 주춤거리게 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필요도 없는 이들을 불러 모아 무엇을 할 텐가?
어차피 강태성이나 영민이나 다수의 사람들을 이끄는 데는 재주가 없었기에 나중에 가서도 공격대를 이끌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섯 군주와 함께 싸울 엄선된 인재들 뿐. 다른 이들의 지휘야 남 부리기를 잘하는 이들이 대신 해주겠지.
그로 인해 이번 한국 대표 선발전이 불리해질 수도 있었지만 영민에게는 아주 간단하고 확실한 수가 따로 있었다.
굳이 남들처럼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충분히 1등을 하고도 남을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그럼, 그렇게 신청하겠습니다.”
영민이 선언하자 남은 뒤처리는 유재한의 몫이 되었다.
헌터협회로부터 받아두었던 참여 요청 공문과 참가 신청서를 확인하고 기입하여 회신을 보내고 일정 등에 대해 협회와 협의를 시작했다.
이번 한국 대표 선발전을 통해 세계 대회로 진출할 수 있는 인원은 최대 103명.
개인전 1, 2, 3위와 단체전 우승 길드의 멤버 100명 뿐이었다.
한국 대표 선발전까지 남은 기간은 보름.
그 동안 힐름은 모든 여론을 무시하고 가만히 휴식을 취하거나 이따금씩 던전을 돌며 제 생활을 즐겼다.
* * * * *
“형, 여기 이 사람,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던 영민에게 민호가 질문을 던졌다. 수상한 사람이 있다는 유재한의 이야기에 전방위로 설치된 CCTV를 살피던 중이었는데 그의 말처럼 이상한 여성을 발견한 것이다.
“누군데?”
“여기. 3번 카메라에 비치는 이 사람이요.”
지난 사건을 거치고 나서 길드 하우스 주변을 더욱 넓게, 최신형 마나 감지기까지 동원해서 시야 확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법 멀리에 있는 사람까지 하나하나 파악 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발견된 이 여성은 행동 자체가 특이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외모도 준수했고 행동이라봐야 그저 이쪽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다만 그것이 반복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수상했다.
감시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하게 숨어 있었고, 주술 같은 고유 능력을 의심하자니 마나 반응이 없었지만 최근 들어 너무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이들로 영민의 팬클럽 또는 사생팬들이 있지만 그들처럼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이 특이했다.
“거기, 줌 땡겨봐.”
보통은 관심도 갖지 않지만 누군가가 생각난 영민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CCTV 모니터 앞에 섰다. 그리고 줌을 당겨 상대를 확인했다.
마나석까지 이용해 기술을 크게 끌어올린 CCTV는 비싼 만큼 제 값을 했다. 바로 앞에서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녀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맞네.’
그녀를 확인하고 잠시 멈칫거린 영민은 곧 민호에게 지시를 내리고 밖으로 향했다.
“주변에 공간 이동 제한 시켜.”
이른 바 안티 텔레포트 필드. 공간 좌표를 흔들어 모든 종류의 공간 이동을 한시적으로 제한시키는 장치가 작동되었다.
잠깐 작동시키는데 수억원의 돈이 깨지는 어마어마한 물건이지만 그 정도야 영민에겐 푼 돈에 불과했다. 찍어내듯 만드는 포션 이외에 적당한 아이템을 사다가 고강을 해서 팔기만 해도 천문학적인 돈이 굴러들어올 테니까.
우우우웅-
장치의 작동과 함께 주변 5km 반경 내의 모든 공간이동 스킬과 아이템의 사용이 제한 되었다.
[공간 좌표가 불안정합니다.]
[귀환 주문서의 사용에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나이트메어까지 동원해 날아오는 영민을 보고 도망치려 했지만 귀환 주문서가 먹통이 된 것이다.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앞으로 영민이 내려섰다.
“오랜만이야.”
몇 년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영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가슴이 찌르르 울리고 고통스러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얼마 전에 본 것처럼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래. 날 아프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지.’
그 미묘한 감정을 느끼던 영민이 히죽 웃음을 지었다.
“으응. 오랜만이야.”
영민의 그녀, 성지유도 조금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쩐지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지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기에 이해했다.
“좋아 보이네. 다행이다.”
진심이 느껴지는 그 말에 또 한 번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희한하게 예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일까, 강태성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변해서일까.
씁쓸하고 조금은 먹먹해지기도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녀는 참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기억이었고. 고마웠던 일들 투성이지만 이미 흘러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녀를 위하는 일이라고만은 이야기 할 수 없었다.
반가움과 민망함 속에 짧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냐. 헌터 각성을 한 것이냐. 축하한다. 요즘 안 좋은 말이 많던데 그런 말은 신경쓰지 말아라. 따위의 간단한 이야기 끝에 참고 망설였던 본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너에게 이런 말을 하기가 참 미안하지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찾아왔어. 그때 우리 부모님과 내 친구들이 너에게 했던 말이나 행동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민망하기만 하지만··. 우리 부모님이 많이 아프셔. 현대 의학이나 치료 계열 헌터의 능력으로
도 치료가 쉽지 않대. 그러니까 혹시··.”
울먹거리는 그녀의 말에 영민은 더 짙고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그녀가 원하는 최상급 질병 치료 물약을 비롯한 여러 상급 포션들이 넘치도록 들어있는 소형 공간 확장 주머니.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받아들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연락처를 주고받는 다거나 다시 만날 약속 따위를 하지는 않았다.
영민도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전쟁 같고 지옥과도 같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아수라장이다. 어설프게 지난 인연을 붙잡아 그 길에 선 자신을 바라보며 마음 졸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마음 한켠 무겁게 남아 있던 그녀에 대한 기억을 비워냈다.
< 119화 - 세계 헌터 대회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