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 매드 사이언티스트 (1) >
‘중국? 아니야. 그럼 어디지? 러시아? 미국? 일본?’
가장 먼저 중국을 의심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움직임을 보이기만 해도 중국 공안과 흑사회가 혹시나 영민의 심기를 거스를까 알아서 막아설 판이기에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했고, 중국인들이 사용하던 패턴과도 미
묘하게 다르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마나 패턴이야 제각각이기는 하니까··.’
사실 국가별로 달라봤자 약간의 특색 뿐이지 그 차이는 극히 작았고 미묘해서 그것만으로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떳떳치 못한 일을 벌이기 위함인지 얼굴도 가리고 있어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도 파악하기 어려우니 확인 할 방법은 단 하나였다.
‘뭐, 벗겨보면 알겠지.’
직접 제압해서 확인하는 것.
영민의 발 밑으로 신성한 빛의 그림자가 번져가자, 그 대지 위에 몸은 숨기고 있던 자들이 일시에 덮쳐들었다.
‘이상한데.’
사전에 연습이라도 한 듯 짜임새 있게 덮쳐드는 습격자들. 그들의 진형을 어렵지 않게 부숴내던 영민은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꼈다.
놈들의 수준은 대략 A등급 언저리. 이미 S등급으로 이름 높은 자신에게 고작 이 정도 놈들을 보낸다고? 그건 죽여달라는 애원과도 같은 일이다.
물론 흑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연금술을 기반으로 한 헛 껍데기 같은 능력자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A등급 끝자락도 아니고 갓 올랐거나 중위권에도 살짝 못 미치는 놈들을 보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불안정한 마나라면··.’
그것도 그것이지만 진짜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들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것. 상당히 짜임새 있는, 준비된 합격술처럼 보였지만 개개의 능력의 조합이 큰 시너지를 내고 있지도 못했고 고유 능력의 활용이 단순한데다 품고 있는 마나 자
체가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멀리서는 몰랐지만 무기를 맞대는 순간 확실히 느꼈다.
영민의 공격에 닿는 순간순간마다 마나가 출렁이듯 흔들리는 느낌이 확연했다.
‘그렇군.’
애초에 한 칼이면 충분한 놈들이다. 상황을 파악한 영민은 순간 몸을 가속시켜 놈들의 팔과 다리를 모두 잘라버렸다.
덕분에 피가 솟구치고 사방으로 뿌려졌지만 이미 피가 나오기도 전에 자리를 이동한 탓에 영민의 몸에는 한 방울의 피도 묻지 않았다.
치이이익-
그리고, 예상대로 피가 닿은 곳들이 매캐한 냄새와 함께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놈들의 핏속에 독이 흐르고 있던 것이다.
“꼭두각시라··, 거참 더럽게 노는군.”
영민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조작계. 그것도 꼭두각시 계열의 능력자가 개입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아주 악질 적인 놈이.
영민은 가만히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능력자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인간을 제압해 조종할 수 있는 조작계 능력자는 많고 많았지만 그 ‘인형’들을 A등급 언저리까지 강화시킬 수 있는 놈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한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최소 A등급 끝자락, 혹은 S등급에 도달해있어야 했으니까.
물론 그렇게 따져도 그 숫자가 세자리쯤은 되었지만 다시 ‘정신계열’ 헌터는 제외시켰다.
정신 제압, 정신 지배 따위를 사용해 조종하는 것은 가능해도 핏속에 저만한 독이 흐르게 하려면 수고가 너무 큰 것이다. 거의 신체 개조 수준의 작업을 해야하는데다 그 과정에서의 고통이 정신 계열 능력을 넘어서면서 몇 번이고 제정신으로 돌아올 가
능성이 높았으니까.
그렇다면 아예 언데드로 만들거나 인간을 인형 또는 마리오네트처럼 사용하는 ‘행동 조작계’ 헌터가 붙어야한다는 소리다.
그런 놈이 누가 있을까?
영민이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또 한 번의 문제가 발생했다.
팔다리가 잘린 채 죽어가던 놈들이 불안정한 마나를 일제히 격발시켜 자폭을 시도 한 것이다.
그것도 열 명이 동시에.
콰과과광-!!
굉음과 함께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A등급 헌터 10명의 자폭 공격이라니? 도시까지는 아니라도 마을 하나는 너끈히 날려버릴 위력이다.
그 속에서 영민이 먼지를 툭툭 털며 걸어나왔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확신에 찬 눈빛으로 누군가의 닉네임을 이야기하면서.
“이 미친 새끼가··.”
정말로 화가 났다는 듯,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닉네임 매드 사이언티스트. 말 그대로 미친 과학자라 불리던 S등급의 헌터로 배후를 확신한 것이다.
인간을 도구로 보고 이만큼 인체를 개조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아는 한, 강태성이 아는 한 그 밖에 없었다.
최강의 강화인간인가 뭔가를 만든다며 무고한 헌터들을 잡아다 인체실험을 계속했었지. 심지어는 ‘게이머’의 특별한 능력을 통해 ‘성장형 개조인간’을 만들겠다며 강태성을 붙잡으려 하기도 했었다. 결국 마지막에 완성한 것은 게임에서 오토 사냥을 하는
자동 캐릭터 수준이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은 강태성과 동료들에게 목이 달아나기는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다섯 군주 만큼이나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영민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다. 영민에 대해 알려진 것이라고는 F등급에서 S등급까지 급성장을 했고, 기적의 연금술사라 불릴 만큼 높은 연금술 숙련도를 가지고 있다는 정도이니 그 능력과 비밀이 탐이 났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이간질이 목적이거나.’
놈들이 자폭하기 전, 확인한 얼굴은 딱 봐도 중국인이었다.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만약 그 사실을 다른 이들이 봤다면 또 한 번 중국과 흑사회에 대한 여론이 들끓었을 터였다.
하지만 영민은 ‘꼭두각시’로 중국인을 쓴 것이 얄팍한 수라는 것을 간파했다.
흑사회와 있었던 일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같잖은 수를 쓴 것이겠지.
‘그렇다면 한국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인데.’
판단을 내린 영민은 가만히 매드 사이언티스트에 대한 기억을 뒤졌다. 놈의 특징, 성격, 고유 능력과 한계 등을 떠올리고는 놈이 한국에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나중에 ‘증폭기’와 ‘중계기’를 만든다면 모를까, 지금 시점에서의 녀석은 한 나라를 벗어날 만큼 멀리에서 이들을 조작하지 못할 터였다.
또한 그만한 합격술을 펼치도록 조종하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카메라로 이쪽의 상황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였고.
지금이야 폭발에 휘말려 박살이 났겠지만 말이다.
‘그걸 이용해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영민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은신 스킬을 발동시켰다.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면 놈은 분명 어떤 식으로든 접근해 올 것이다. 중상을 입어 요양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인지, 정말로 실종된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무언가’를 보내 올테고 영민은 그것을 역추적할 생각인 것이다.
자신의 실종 소식과 함께 세상이 술렁거릴 테지만 뭔가 터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특별한 증거도 없이 죽은 사람을 위해 전쟁을 벌일 만큼 무모하고 정의로운 이는 세상에 없을 테니까.
그저 이 사건을 빌미로 중국을 압박하고, 사소한 이득이라도 얻어내면 그것으로 만족하겠지.
더구나 성녀의 실종도 아니고 일개 소국의 헌터 한 명이 사라진 것이니까 말이다.
마음을 정한 영민은 즉시 실행에 옮겼다.
* * * * *
한 마을의 초토화, 그리고 영민의 실종.
이 두 가지 요소가 맞물리자 한국 사회에 불안이 가중되었다. 이건 누가봐도 테러였으니까.
더구나 S등급 헌터인 영민이 실종 되었을 정도면 테러리스트, 혹은 그들이 가진 무기가 대단하다는 이야기였으니 불안과 공포가 뒤덮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가운데 길드 힐름의 멤버들은 침묵을 지켰다. 아무런 성명도 내놓지 않고, 외부 활동도 하지 않았다.
헌터의 실종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경찰에 실종 신고 따위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지난 폭발물 테러 때도 그랬듯이, 어디선가 멀쩡한 모습으로 놈들을 쫓고 있다며 전화를 걸어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영민이 당했다는, 납치되거나 죽었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어떤 힘을 지녔는데 그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저승사자가 찾아와도 두들겨 패서 쫓아낼 위인인데 누가 감히.
굳건한 믿음으로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까악. 까악.”
그런 그들의 창문 옆으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기묘한 보랏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여 주변을 살피더니 다시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올랐다.
휘익
가볍게 휘둘려진 영민의 손에 곧 제압되고 말았지만.
까악?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영민이 한가지 스킬을 발동시켰다. 특별한 힘이 뻗어 나왔다.
“거짓된 정신의 교감.”
코인을 제법 주고 산 정신계열 스킬이었다. 상대와 한순간 정신을 연결하여 대상의 시야와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 너무나 갑작스러웠기 때문일까, 이것이 제대로 들어갔다.
까마귀와 링크되어있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에게까지 스킬이 연계되고 그의 시야와 생각, 심지어 기억의 일부까지 엿볼 수 있던 것이다.
푸드덕
1~2초에 불과한 짧은 연결일 뿐이지만 덕분에 영민은 많은 정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재빨리 은신을 발동했다.
잠시 멍하니 풀렸던 까마귀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그와 연결되었던 매드 사이언티스트도 영문을 몰라 갸웃거릴 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기억의 일부가 통째로 날아가버린 것처럼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덕분에 까마귀는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다음 감시 장소로 이동해 초소형 카메라 같은 보랏빛 눈을 번뜩 거릴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영민은 어디를 향해선가 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와, 이 미친 새끼!’
놈의 기억에서 두 가지 정보를 읽어낸 것이다.
놈의 장소와 놈의 계획.
놈의 장소는 몇 가지 지형적 특징과 주변 상가의 이름 따위로 유추 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금방 위치를 특정 할 수 있으니 문제 없었다.
정말 곤란한 것은 놈의 계획이다.
정확히는 ‘테러 계획’.
놈에게서 읽어낸 기억 속에는 ‘인형’들을 이용한 테러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몇 단계에 걸친 연쇄적인 테러 계획이.
‘어떻게 하지.’
그 두 가지 정보 속에서 영민은 고민했다. 지금 당장 놈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 놈을 잡을 것인가, 테러 장소로 달려가 사람들을 구할 것인가.
강태성이라면 뒤도 안 보고 놈에게 쳐들어 가겠지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테러 장소가 바로 인천공항이라는 것. 또, 놈의 타겟이 외국인들이라는 것.
게다가 어떻게 장난을 쳐놨는지 몇몇 국가에서 들어오는 항공기가 대규모 결항, 또는 장시간 출발 지연이 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국제 문제를 야기 시키려는 모양인데··.
‘끄응, 온갖 전자 장비들은 다 도청을 당하고 있을 테고··.’
대기하고 있는 민호, 가람, 철우가 움직이면 공항의 수비는 어렵지 않겠지만 그들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놈이 가진 과학 기술력이라면 이미 주변의 모든 전자 장비는 도청, 감청 당하고 있을 테니 어설프게 연락을 시도했다가는 이쪽이 들통나고 만다.
어쩌면 헌터협회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또한 그들이 나서면 너무 거창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탄로날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렇다고 인천공항의 자체 경비 인력을 믿기도 어렵고··
‘아, 그게 있었지.’
잠시 갈 길을 잃은 영민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주 은밀하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 115화 - 매드 사이언티스트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