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 상황 정리 (1) >
“······.”
얼어붙은 모든 것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야수화의 지속시간은 진작 끝이 났지만 왕륜걸의 머릿속은 여전히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답이 없다.
몸 상태가 최상이라고는 말 할 수 없어도 정상일 때 가람 한 명을 이기지 못했는데 그보다 더한 괴물이 셋이나 더 버티고 있었다. 하물며 야수화의 후유증으로 자신은 상당한 힘의 손실이 있는 상황.
당장 가람만 다시 나서도 이길 수 있다 장담하기는 어려운 상태였기에 날뛰는 대신 눈알만 빠르게 굴려댔다.
어떻게 A등급 주제에 이렇게 강할 수가 있는 거지. 분노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굴려댔다.
“오호··.”
상황이 이렇다보니 영민 역시 그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 관심을 두었다. 절대영도로 모든 것이 얼어붙으며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을 만들었음에도 좀처럼 이 안을 향해 뛰어드는 자가 없는 이유에 집중한 것이다.
바로 나이트메어 때문이다. 절대영도에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 존재이자 일정 범위 안으로 접근하는 이들에게 강력한 정신 공격을 선사하며 공간을 장악한 나이트메어의 위용에 감탄을 마지 않았다.
“자, 터치다.”
그러기를 몇 분. 무언가를 감지한 영민이 ‘터치’를 선언하며 앞으로 나섰다. 저 바깥 쪽으로부터 다가오는 수십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나이트메어의 정신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려면 S등급은 되어야 했다. 즉,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저 수십 개의 기척이 모두 S등급 헌터들의 것이라는 이야기. 다른 이들이 나서기에는 무리였다.
“한바탕 놀아볼까? 헤븐즈 레이.”
영민이 손을 휘젓자 저 멀리 하늘에서 십수 개의 빛무리가 나타났다. 혜성처럼 떨어져내렸다.
“천신강림!”
“소환! 마물사전!”
“삭풍의 검이여!”
그러자 저 쪽에서도 반응이 왔다. 각자의 고유 능력을 한 껏 끌어올리며 각기 대응에 나선 것이다.
거인의 육체를 강림시켜 로봇처럼 조종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을 대신해 공격을 받아낼 소환수들을 부리는 이도 있었고, 한 자루 무기에 의지해 빛을 가르려 드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공격이 그저 장난처럼 날린 견제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텔레키네시스.”
손을 대지 않고 의지로 물체를 이동시키는 물체 이동 마법. 초능력 중 하나로 유명한 염동력에 가까운 그 능력이 발휘되자 사방을 점하며 노란 병들이 떠올랐다.
퍼버버벙!
“끄억!”
빛이 시야를 가린 틈을 타 접근한 그것들에 놀라 무기를 휘두르는 이들에게 강력한 폭발을 선사했다.
노란 병의 정체는 최상급 폭발 포션!
S등급 헌터라 해도 감히 무시하지 못할 폭발력을 지닌 액체 폭탄이 동시에 수십 개나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주위는 그야말로 초토화! 메테오까지는 아니라도 그 하위 버전 광역 마법인 메테오 스웜이 터진 듯한 몰골이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지반마저 내려앉았다. 고작 포션 몇 십 병이 터진 결과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속에서 살아남은 헌터들이 하나 둘 기어나왔다.
예상치 못한 파괴력에 크고 작은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S등급 헌터의 육체가 가지는 방어력 덕분에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까지는 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얼굴과 표정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왕륜걸과 마찬가지로 ‘고작해야 물약쟁이’라고만 생각했던 이에게 이만한 충격을 받다니? 수치스러움도 잠시 잊을 만큼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어서와, 이런 건 처음이지?”
영민의 옆으로 떠오른 녹색의 액체들에 모두의 얼굴이 퍼렇게 죽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저 액체의 정체를 누구나 짐작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스프레이.”
영민이 사용한 다음 수법 자체는 간단했다.
뭉쳐둔 액체를 스프레이처럼 가볍게 분사하는 1써클 마법. 하지만 그 ‘액체’가 남달았기에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끄악!!!”
“사, 살려줘!!”
독약(毒藥).
피부에 닿자마자 뼈속까지 녹여버리는 산성 독약을 쓸지, 지속적인 고통을 일으키는 독약을 쓸지, 그도 아니면 랜덤한 효과를 일으키는 대신 해독이 거의 불가능한 독약을 쓸지 고민이 많았지만 그들을 서서히 말려 죽이기 위해 강한 데미지와 신경 마비가 동
시에 일어나는 녀석을 사용했다.
물론 스프레이의 범위를 벗어나거나 방어해 중독을 피한 녀석도 있다. 하지만 반수 이상이 중독을 피하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단번에 몰아쳐서 영민을 눕히고 해독제를 찾아낼 것인가. 쉽지 않아보이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해독제를 구걸할 것인가.
짧은 고민에 머뭇거리는 순간, 영민이 중독을 피해낸 이들 중 하나에게 날아갔다.
천신강림이라는, 정확히는 신장의 육체를 강림시켜 제 몸처럼 사용하는 고유 능력을 지닌 이였다.
신장의 육체에는 독이 듣지 않으니 사실상 피해낸 것이 아니라 무효화를 시킨 유일한 자로서, 가장 가까이에서 영민을 공격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이기도 했다
“죽어라!!”
그런 이에게 덤벼들었으니 반격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신의 장수라는 신장의 육체에 막강한 에너지가 깃들더니 일시에 뿜어졌다. 자이언트에 버금가는 거대한 덩치에서 발출되는 힘은 그 자체로 전율에 가까웠다.
영민의 것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성질이 다른 고밀도의 신성력이 놈의 언월도에 깃들어 영민에게 떨어져 내렸다.
“럭키 펀치!”
사람 몸통만한 창날을 향해 영민의 조그만 주먹이 날아들었다. 전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드래곤 슬레이어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나았지만 그는 이 싸움을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모두를 압도하는 절대적인 힘.
그것을 내비쳐 싸움을 끝낼 작정이었다.
쩌저저적
신장의 언월도와 영민의 주먹이 맞닿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절대와 같았던 신장의 무기가 파괴되고 그 여파로 놈이 휘청거린 것이다.
신성력으로 소환해낸 무기이다보니 실제 무기보다 내구력도 약하고, 파괴 행위 자체가 본체에 타격을 주었다.
‘형편 없군.’
영민은 ‘허우대만 멀쩡한 놈’으로 점찍은 놈에게 재차 공격을 이어갔다. 다시 꺼낸 +13 봉인의 드래곤 슬레이어에 신장의 팔과 다리가 손쉽게 분리되고 시전자는 강림의 반작용으로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귀혼의 술!”
“마나 봉인!”
저주? 봉인? 감히 누굴!
그 순간 악에 받친 적들의 온갖 디버프가 쏟아졌지만 영민은 아주 태연하게 그들을 돌아볼 뿐이었다.
[귀혼의 술에 저항했습니다.]
[마나 봉인에 저항했습니다.]
[정신 착란에 저항했··.]
어떤 능력을 사용하든, 그것이 ‘확정 적용’ 판정을 받는 능력이 아닌 이상 영민에게 범접하지 못했다. 1%의 저항 확률이라도 작용하는 한 행운 Max의 영민에게 제대로 효과를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크허허헝!!”
그 같잖은 시도에 분노하듯 영민의 표효가 오히려 놈들을 덮쳤다. 모든 능력치가 저하되고 정신력이 약한 자들은 이를 딱딱거리며 몸을 떨어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마치 사신을 만난 것처럼 경외와 공포의 눈으로 영민을 바라봤다.
“말 도 안 돼··.”
“사기야. 사술이다!”
몇몇은 절망했고, 몇몇은 부정했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적이고 확실한 것은 모두에게 또렷한 공포가 각인 되었다는 것이다.
‘좀 모자란 것 같기도 한데··.’
아직도 흑사회의 S등급 헌터는 그 수가 무궁무진했지만 아마도 길드의 주축일 이들에게 확실히 공포를 각인 시킨다면 감히 함부로 날뛰거나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는 못하리라.
그것을 위해 더욱 살기를 흘리던 영민은 확실한 각인을 위해 몇 쯤은 죽여야하나 고민했다.
나쁜 놈들이기는 해도 몬스터들에 저항하는데 큰 힘을 보태게 될 흑사회인 만큼 무턱대고 죽이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 S등급 헌터가 전세계적으로 수천이나 된다고는 하지만, 적은 그보다 몇 십 곱절은 더 많다.
그렇기에 검을 아끼고 있는 까닭도 있었지만 그로인해 귀찮아지는 것은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누가 덤벼볼테냐?”
흡수 할만한 괜찮은 고유 능력이라도 있으면 가차없이 목을 쳐버릴 텐데, 하고 아쉽게 놈들을 돌아보던 영민의 입꼬리가 별안간 슬쩍 올라갔다.
누군가 ‘최후의 반항’을 준비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주 은밀하고 미세한 그 마나의 파장을, 영민은 모르는 척 했다. 무리를 정복한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놈들의 기세만 적당히 꺾어두었다.
“흐흐흐흐! 네 놈 따위에 굴복하느니 모조리 파괴해버리고 말겠다!”
그 틈을 타 충분한 마나를 모은 것인지 놈이 마각을 드러냈다.
“어쭈, 이것 봐라?”
그러나 그 시도는 매우 의외의 것이었다. 시간이 필요한 필살기 쯤이라도 준비하는가 싶었더니 마법사도, 전사도 아닌 ‘소환사’였던 것이다.
소환사가 공을 들인다고 무엇을 할 수 있지?
“이 새끼··.”
의아하게, 또 신기하게 쳐다보던 영민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소환사라는 놈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미친 짓을 계획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랜덤’하게 소환수를 소환해내지만 투입하는 ‘제물’에 따라 소환수의 수준이 달라지는 소환사 특성을 극한까지 이용하는 마지막 능력. ‘자기 희생’이자 ‘자기 제물’을 발동시켜 한계 이상의 존재를 세상에 풀어놓으려는 것이다.
제어할 존재를 잃은 소환수는 제 멋대로 날 뛸 테고, 혹시나 놈을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없다면 세상은 그대로 멸망하게 될지 몰랐다.
신념이 있는 또라이가 이래서 위험한 거다. 중화사상에 찌든 놈이었는지 중국 그 자체나 다름 없는 흑사회가 이대로 무너지느니 다 함께 죽고 말겠다는 심보였다.
‘S등급의 자기 제물이라니··.’
이미 ‘군주’나 ‘군단장’이 아니라면 해볼만 하다고 여기던 영민이지만 휘몰아치는 강력한 마나 폭풍에 은근히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이 나올까.
내가 상대 할 수 있을까?
설마 군단장이나 군주급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당장 도망가서 몸을 숨기고 몇 년 쯤 노가다를 하다 나와야 승산이 있을 텐데··.
온갖 상상과 함께 가슴이 두근거렸다.
놈의 동료들 역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뒤돌아선 영민의 등을 감히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동료의 미친 짓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물론 생각 같아서는 자신이 쳐죽여서라도 막고 싶다. 하지만 이미 소환 의식이 발동한 이상,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소환사와 소환수 간의 신성한 의지가 그들을 보호할 테니까.
그렇기에 그저, 그가 찢겨나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끄아아앙-!”
그리고 마침내,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야 할 존재가 세상에 풀려났다.
압도적인 힘. 전율적인 공포.
그 모든 것을 갖춘 존재가 거대한 두 날 개를 활짝 펼쳤다.
“······엥?”
이럴 수가, 맙소사 따위의 비명을 외치는 중국인들과 달리 영민의 입에서는 다소 황당하고 허무하다는 듯한 말이 튀어 나왔다.
[드래곤 슬레이어 효과로 드레이크 피어에 저항합니다.]
[비통의 드레이크가 당신을 알아봅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효과로 비통의 드레이크에게 강제 분노 효과가 일어납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효과로 당신의 모든 능력치가 50% 상승합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효과로 용족에 대한 공격력이 10배 증가합니다.]
‘이것도 행운빨인가?’
비통의 드레이크라면 무려 9레벨 던전에서 출현하는 몬스터. 그러나 하필이면 ‘용족’인 탓에 영민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라.”
피식
이거라면 간단하지. 요리 재료를 앞둔 쉐프처럼 영민이 가볍게 검을 휘돌리며 놈에게 덤벼들었다.
< 111화 - 상황 정리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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