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나이트 메어 (2) >
나이트 메어는 등장과 함께 끔찍한 효과를 일으켰다. 주변 일정 범위 내에서 잠을 자고 있는 이들이 꿈을 깨지 않는 악몽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저항력이 있는 헌터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헤어나올 수 있겠지만 일반인이라면, 저급한 수준의 헌터라면 영민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으으윽, 헉!”
효과는 짧지만 왕륜걸 역시 악몽에 잠을 깼다. 현실의 시간은 짧았지만 꿈속의 시간은 달랐는지 온 몸이 금세 땀으로 흥건한 상태였다.
“누구냐!”
그리고 꿈에서 깨자마자 네 사람을 발견하고 기세를 발산했다. S등급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이가 발하는 기세는 A등급 이하의, 심지어 같은 S등급마저 주눅 들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지만 이쪽 역시 만만치 않은 능력자들이었다.
영민이 마주 기세를 발산하며 막아서자 민호와 가람도 영향을 받지 않고 가슴을 펼 수 있었다.
“누굴 것 같나?”
암습의 형태를 취한 만큼 소란이 커지기 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텐데도, 영민은 한 껏 여유를 부렸다.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 암습의 형태를 취하기는 했어도 달랑 왕륜걸의 목만 따서 돌아갈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왕륜걸 또한 상위의 S등급 헌터인 만큼 쉽게 처리 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렇게 해서는 진정한 두려움을 심어줄 수 없었다.
최대한 거창하게.
그것이 영민의 이번 원정 목표였다.
“물약쟁이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
가만히 그들을 들여다보던 왕륜걸이 진지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전부터 공안국에서, 또 수하들에게 보고를 받은 바가 있으니 그들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를 습격해서 끌고 오도록 지시한 것이 바로 자신이니까.
연금술 숙련도를 올리는 데만도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몇 년은 족히 걸릴 텐데, F등급에서 S등급까지 고작 몇 년만에 성장했다? 분명히 연금술에 뭔가 비밀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장 ‘비약’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강화계가 아닌 이들까지 육체 능력은 적잖이 끌어올릴 수 있게 해주는 비약처럼 성장을 도와주는 무언가의 레시피를 영민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그런 ‘편법’으로 성장한 만큼 실제 전투력과 전투 센스에
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수하들을 보냈던 것인데 지금 느껴지는 기세는 전혀 딴판이었다.
마나량의 절대치는 자신에게 못 미치는 듯 싶었지만 그 속에 숨은 기세는 결코 쉽게 등급을 올린 이의 것이 아닌 것이다.
벌써 식었어야 할 등줄기의 식은 땀이 천천히, 마르지 않고 식을 만큼 왕륜걸의 몸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호오, 수하들을 부르지 않을 셈인가?”
“불러서 올 놈들이라면 언젠가 오겠지.”
생각보다 담대한 왕륜걸의 태도에 영민도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든 신호를 보내 수하들을 끌어 모으려 할 줄 알았더니?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인지, 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인지 왕륜걸은 별다른 기색 없이 스스로의 컨디션만 끌어 올릴 뿐이었다.
‘뭐, 상관 없지.’
영민도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어차피 실력있는 자들이라면 곧 악몽 쯤은 극복해낼 것이고, 격돌을 하는 순간 악몽의 영향권 밖에 있는 이들까지 상황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신나게 한바탕 어울리는 것 뿐.
‘어디 한 번 놀아볼까?’
영민 또한 순식간에 버프를 끌어올리며 전투 준비를 마쳤다.
나이트메어의 암흑 능력과 반대되는 신성 능력들과 ‘성역 선포’였지만 재미있게도 시스템이 보정을 했기 때문인지 어느 하나 약해지는 모습은 없었다.
나이트메어의 능력은 능력대로, 영민의 버프는 버프대로 각각 작용한 것이다.
그때, 가람이 한 걸음 나서며 의외의 제안을 했다.
“대장.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아무리 영민의 버프로 능력이 뻥튀기 되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무려 S등급 상위에 속하는 헌터다. 전 세계의 헌터들을 대상으로 꼽아봐도 100위권 내에는 너끈히 들어갈만한 강자.
버프가 없는 상태에서는 A등급에 불과한 가람이 상대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가람은 결연한 표정으로 영민에게 요청했다.
“음, 쉽지 않을 텐데··?”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영민은 곧 결단을 내렸다.
“해봐요.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회복 시켜줄 테니까.”
목숨을 걸어야 할 테지만, 가람의 의지가 확고해 보이니 무작정 내칠 수만은 없었다.
‘가람 형이라면··.’
그의 능력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믿는다.
‘만병지왕 대 간격의 천재라?’
상성은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다. 한번 파악한 간격은 모조리 계산하고 피해내는 가람과 거의 모든 종류의 무기를 주무기처럼 다룰 수 있어 만병지왕이라 불리는 왕륜걸. 어느 쪽이 카운터인 걸까? 영민으로서도 감히 답을 내지 못했지만 그를 한 번 믿어보기
로 했다.
“이 자식들이··!”
자신이 적당한 스파링 상대라도 되는 듯 서로 양보하니 마니 하는 그들을 보며 왕륜걸이 이를 갈았다.
수적인 열세에 감히 경거망동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만만하게 보고 나선 가람에게는 본 때를 보이겠다는 듯 흉폭한 기세를 피워 올리는 것이다.
“으음.”
영민의 보호에서 벗어나 그의 앞에 오롯이 선 가람은 그의 기세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버프를 받아 S등급 수준으로 능력치가 올라섰다고는 하지만 만만치가 않다. 괜히 흑사회 씩이나 되는 집단의 수장인 것은 아니라는 듯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살을 에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상대가 중국인이라서일까. 무협 영화에서 자주 본 포권을 취해보인 가람은 자신의 창을 들어올리며 한바탕 격돌을 준비했다.
비록 코인 부족으로 +13까지는 강화시키지 못했지만 이미 +10까지 강화된 그의 창, 빙룡의 일격은 누구와 견주어도 부족 함이 없는 훌륭한 무기였다.
시린 한기와 예기가 동시에 뿜어지는 그 날카로운 창날 끝을 마주하자 왕륜걸로 냉정을 되찾고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와라.”
S등급의 자존심이라는 것일까.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왕륜걸의 도발에 맞춰 가람이 사양치 않고 짓쳐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찌르기.
평생을 찌르기만 수련한 것 같은 장인의 일격이 그의 몸을 꿰뚫으려 했다.
“흥!”
그러나 상대는 만병지왕이라 불리는 사내다.
마치 실력의 차이를 보여주겠다는 듯 허공에서 한 자루 창을 꺼내든 녀석은 가람을 마주 찌르는가 싶더니 아주 미세한 차이로 창 끝을 비껴갔다.
그대로라면 서로의 심장을 꿰뚫어버릴 상황.
터엉!
그 심장 떨리는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은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창대를 흔들어 서로의 창을 튕겨낸 것이다.
전력을 다한 찌르기와 창대 흔들기이지만 가람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흡!”
창날이 서로의 몸을 벗어났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가람의 창이 회수되는가 싶더니 원심력을 이용해 창대를 몽둥이처럼 좌로 휘둘렀다.
“어딜!”
그러나 만만치 않은 왕륜걸이다. 허공으로 던지듯 창을 놓아버리자 창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거검이 소환되었다. 마치 인벤토리에서 소환해내듯 원하는 무기를 넣고 꺼내는 놈의 전매특허가 또 다시 발휘된 것이다.
까가가강!
놈이 거검을 땅에 박아넣자 가람의 공격은 손쉽게 막혀버렸다. 놈의 무기 역시 보통은 아닌지 샛노란 불꽃이 튀며 공격을 튕겨내버린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가람의 품을 향해 뛰어들었다.
“저런 치사한 놈! 세 번은 양보해야 하는 거 아니야?!”
투덜거림 같은 영민의 불만이 들리지 않는지 왕륜걸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가람의 심장을 움켜쥐려 했다.
가위손처럼 툭 튀어나온 철조가 탐욕스럽게 번들거렸다.
“미안하지만 가족이 있어서!”
가람도 보통이 아니다. 거검과 전력으로 부딪혀 손바닥이 저릿할 텐데 창을 당겨 짧게 잡고 손을 놀리듯 창으로 받아친 것이다.
실로 수준 높은 공방에 민호와 철우가 입을 쩍 벌렸다. 두 사람의 전투력도 그에 못지 않거나 그 이상일 수 있지만 이처럼 정교하고 치밀한 전투와는 다른 스타일의 전투법이었다.
그러니 눈 뜨고 코 베일 것 같은 공방이 새롭게만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영민이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보기는 했지만 그것은 ‘공방’이 아니라 ‘학살’에 가까웠기에 지켜볼 틈이 없었다.
“감각이 제법이군!”
그렇게 그들이 개안을 하는 동안 가람과 왕륜걸은 수십합이나 겨루었다. 첫 공격은 가람이 시작했지만 어느새 입장은 바뀌어 왕륜걸이 신나게 공격을 퍼부으면 가람이 아슬아슬하게 막아내는 입장이었다.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는 상태지만 영민은 난입을 생각하지 않았다. 가람의 눈빛이 살아있고 힘겨워하지만 포기하는 기색은 없는 상황에서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평생 원망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끈질긴 새끼!”
철조로 쥐어 뜯으려다가 너클로 내리찍고, 튕겨나는 회전력을 이용해 곡도를 휘둘렀다가 창으로 찔러낸다. 그러고도 안 되면 거검을 이용해 다리가 박힐 만큼 강력한 내리찍기를 날리고 피해내면 순간적으로 석궁을 소환해 퀘렐을 쏘아내기도 했다.
다음으로 다트를 던지고, 유성추로 다리를 봉쇄하려 했다가 채찍으로 후려치고 창을 감아 빼앗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공격에 가람은 잠결에 만난 모기처럼 잘 빠져나갔다.
그 횟수가 많아지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람의 감각을 인정하던 왕륜걸이 그를 욕하며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꽤나 당황하며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하고 몇 군데 상처도 내는 것에 성공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간격을 ‘간파’ 당하며 유령을 상대하는 것
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무려 S등급 중에서도 손에 꼽힌다는 자신이, 고작 버프 조금 받은 A등급 헌터 따위에게!
물과 불의 대결 같던 상성 싸움에서 가람이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여 승기를 거머쥐었다.
덕분에 왕륜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과 분노가 태산처럼 쌓여 올랐다. 비록 가람 역시 상황을 결정 지을 만한 힘은 부족했기에 누구의 승리라고 단정 할 수 없지만 이만큼 시간을 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왕륜걸에게는 상당한 굴욕이었다.
“흐허허헝!!!”
그리고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분노가 함성이 되어 그들을 덮치고 봉두난발에 핏빛 눈동자를 한 왕륜걸이 내부를 격발시켰다.
버서크와는 다르지만, 그에 못지 않게 힘을 격발시키는 무시무시한 능력이 그의 몸 속에서 터져나왔다.
‘야수화!’
한 줌의 이성만을 남긴 채 모든 힘과 감정을 폭발시키는 능력. 막대한 힘을 얻는 대신 한 마리의 짐승과 같아지는 그 힘의 정체를 영민은 즉각 알아차렸다.
그러나 반응이 살짝 늦었다. 설마 열이 받았다고 뒤도 없는 이런 수까지 쓰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터라 잠깐 멈칫거리고 만 것이다.
손을 뻗기에도 늦은 상황. 가람이 가녀린 창내를 들어 올려보지만 소용 없는 짓이다. S등급 상위에 속하는 그 힘을 야수화로 뻥튀기 시킨 놈의 힘이라면 창대를 부러뜨리고 가람을 피떡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하지? 방법은 하나 뿐이다.
“럭키 박스!”
퍼엉!
허공에서 튀어나온 물음표 투성이의 박스가 깨어지며 어마무시한 한기가 몰아쳤다.
[절대영도]
쩌저저적!
가람도, 왕륜걸도, 영민까지 얼려버리는 폭력적인 절대의 한기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110화 - 나이트 메어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