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성녀 아리스 (3) >
음흉하고 수상해 보이는 복장이, 그들의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은신이 풀리자 드러나는 존재감. 영민에게조차 감지되지 않던 기척 갈무리가 충격을 받아 제어에 실패하자 여실히 드러났다.
‘확실하군.’
최소 S등급의 마나를 갖춘 이가 무려 넷. 이미 S등급 헌터마저 당한 마당에 A등급 이하로는 힘을 빼는 것조차 어렵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른 잔챙이는 없었다. 그나마도 그 중 다중 은신을 유지하던 이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으니 멀쩡히 나타난 것은 셋에 불과
했고.
‘아니면 포로들을 찾는 건가?’
그럴 지도 모르겠다. 직접 전투나 암습은 S등급 헌터들로만 치르고 전투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능력 자체는 출중한 A등급 이하의 헌터로는 붙잡힌 포로를 찾아 역으로 심문하거나 입막음을 하는 것. 그것이 가장 그럴싸한 시나리오였다.
“잠깐! 성녀, 당신에게는 볼 일이··.”
퍼억!
성녀를 상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였을까, 아니면 영민과의 격돌로 무위를 확인해서일까. 침입자들은 아렌에게 적극적으로 공격 의사가 없음을 표출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응축된 힘을 내뿜었다.
“크헉!!”
일점파괴.
그 말이 딱 어울리는 일격이다. 영민에게 흡수한 신성의 힘까지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 아렌은 적의를 나타내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방어조차 하지 않는 상대를 향해 압도적인 힘을 퍼부었다.
“미친!!”
“이렇게 되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일격에 또 한 명이 나가떨어지자 그제야 놈들도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그녀와 맞서기는 꺼려지는지 경고에 경고를 더했다.
‘쯧!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고만.’
그 모습에 영민이 실 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녀와 맞서는 대부분이 그렇다. 애초에 ‘지원계’ 능력으로 알려진데다 ‘청순하게 예쁜 얼굴’, ‘여리여리한 몸매’ 때문에 오해를 하다가 신나게 두들겨 맞는 경우가 9할 이상이었다.
정작 ‘아렌’은 이미 깨어난 상태인데 말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그녀의 추종자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지만 이쪽은 그런 것 따지지 않고 전력으로 두들겨버리니 비슷한 힘을 지녔음에도 단숨에 거꾸러지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이봐, 남 일처럼 그렇게 보기만 할 거야?”
당사자인 주제에 한 발 물러선 느낌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영민에게 아렌이 핀잔을 주었다. 강태성의 기억 때문인지 꽤나 친근한 느낌. 하지만 쉽게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불과 몇 십초 전만 해도 아렌과 자신이 한 판 붙던 상황이 아닌가?
영민이 어떠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아렌이 먼저 몸을 으쓱여보이며 휴전을 선언했다.
“이 자식들 때문에 흥이 깨져버렸어. 제대로 한 판 붙는 건 다음으로 미루자고. 이번처럼 음흉하게 이것저것 숨기지 말고.”
‘알고 있었군.’
영민이 숨기고 있는 것만큼이나 그녀 역시 감춰둔 기술들이 많다는 거야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녀보다 많이 알고 있을지 모르지. 강태성은 그녀가 추후 개발해낼 몇 가지 기술까지 기억하고 있으니까.
어쨌든 한바탕 붙은 뒤 친구가 되어버린 느낌처럼 그녀에 대한 적대를 풀어버리자 남은 두 명의 S등급 헌터에게로 모든 관심이 돌아갔다.
“공평하게 한 놈씩. 오케이?”
“콜!”
먼저 덤벼든 것은 영민이었다. 공평하게 한 놈씩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둘을 작살 내놓은 아렌이 아니든가? 이번마저 선수를 빼앗겨서는 체면이 살지 않았다.
“아차, 이거 받아가!”
화아아악-
맡겨둔 물건 돌려주듯 아렌이 손을 한 번 휘젓자 빼앗겼던 힘이 몸 안 가득 들어찼다. 엄밀히 말하자면 다른 힘. 힘의 주체는 달랐지만 거의 흡사한 효과를 지닌 ‘성역 선포’였다.
‘그래. 그랬지.’
생각해보니 그때도 그랬다. 팀의 전담 힐러인 요한의 스킬을 복사하듯 간단히 따라 해낸 적이 있었지.
어쨌든 덕분에 힘이 크게 증폭된 영민은 속도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단 칼에 상대를 베어버렸다.
출렁
“?!”
확실하게 베었다. +13 봉인의 드래곤 슬레이어를 버텨낼 수 있는 방어구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 뿐이었다. 분명히 베었지만, 상대는 멀쩡히 살아남았다.
“액체화인가?”
손 끝에 걸리는 감각에 영민은 직감했다. 놈은 슬라임과 비슷한 ‘액체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지독한 공격력이군. 회복이 더딘걸.”
그 증거로 쩍 벌어졌던 몸이 다시 슬금슬금 붙고 있었다. 곤란한 듯 투덜거리지만 말투와는 달리 제법 여유가 있어 보이는 모습. 곧 그 능글거리는 얼굴이 짓이겨 놓을 생각이지만 영민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액체화 정도로 S등급이라 하기는 어려워.’
이번 일에 투입되었다면 그저 ‘마나량’만 채운 멍청이는 아닐 터, 그런 의미에서 놈의 능력이 ‘액체화’ 하나 뿐일 리가 없었다.
액체화는 분명 ‘타격계’를 상대하기에 더 없이 좋은 능력이지만 여러모로 단점도 많아서 그것 하나만을 장기로 삼자면 부족함이 많은 것이다.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놈에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촉수처럼 팔락거리는 몸으로 회복이 더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겠지.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어서 덤벼! 라는 신호를 강하게 보낸다는 것은 십중팔구 함정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해주마.’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영민은 놈의 품 속으로 뛰어 들었다. 재차 갈라버리겠다는 듯, 한 번으로 안 되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베어버리겠다는 열혈검객을 코스프레하며 놈에게로 뛰어들었다.
“걸렸다 요놈!”
그러자 예상대로 놈이 마수를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 분명 ‘액체’상태이던 몸이 갑자기 전격 그 자체로 변하더니 영민을 덮쳐온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강력한 스파크. 하지만 더 무서운 점은 ‘전격’의 힘이 간혹 ‘마비’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 힘이 덤벼들던 영민에게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꽥!”
하지만 잠시 후,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전격을 뒤집어 쓴 영민이 피식 웃더니 손을 뻗어 전격의 한 줄기를 움켜쥔 것이다. 바로 놈의 목줄이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를 치자 변신이 풀리고 본체가 드러났다.
“변신을 하려면 좀 그럴싸한 놈으로 하지, 뇌조가 뭐냐. 뇌조가.”
영민은 확신했다는 듯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놈을 구박했다. 놈의 고유 능력은 ‘몬스터 카피’류 였다.
자신이 본 적 있거나, 죽인 적 있거나, 혹은 신체의 일부 또는 마나석을 흡수한 대상으로 변신해 해당 몬스터의 능력을 사용 할 수 있는 방식인 듯 한데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
다른 이들에게는 전격의 기운이 효과적이겠지만 [뇌신의 인장]을 끼고 있는 영민에게 일정 이하의 전격은 간지러움조차 주지 못하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더구나 놈이 선택한 ‘뇌조’는 전격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상태이상 기술을 꽤나 여러 종류로 일으킬 수
있지만 힘 자체는 고작해야 5레벨 던전 몬스터 밖에 되지 않으니 영민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오, 오지마!”
바닥을 뒹굴던 녀석은 영문 모를 사태에 겁을 먹었는지 뒷걸음질을 쳐대지만 자세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주제에 도망이 성공할 리 없다.
영민이 빠르게 다시 접근하자 놈이 급격히 앞으로 쏘아지더니 거인의 그것처럼 거대해진 오른팔을 내뻗었다.
“그래봤자 자이언트에 비하면 어린 애 수준이지!”
퍼억!
그조차도 예상했다는 듯, 영민이 주먹을 마주 뻗었다. 재차 기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변신도 하지 않고 어설프게 도망치는 시늉을 할 때부터 알아봤다.
다만 자신의 힘이 어느 수준인지 가늠을 해보기 위해 끝장을 내지 않았을 뿐, 녀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민의 손아귀 안에 있던 것이다.
주먹과 주먹이 맞닿는 순간, 영민은 상대의 오른 팔이 아주 못 쓰게 되었음을 피부로 느꼈다. 우두두둑 하며 오른 팔의 모든 뼈가 조각이 나버리는 감각을 전해 받은 것이다.
‘이 정도군.’
물론 놈이 ‘카피’한 능력의 수준이 낮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민은 이거 하나만큼은 가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S등급 중위권에게는 지지 않는다.
설사 몇 명이나 몰려온다 해도.
만약 아렌이 없었다면, 그녀에게 정신을 쏟지 않았다면 영민 역시 충분히 놈들을 감지해내고, 홀로 상대해낼 수도 있었을 터.
그를 통해 적들의 수준을 가늠해낸 영민은 무심한 눈빛으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들어올렸다.
슬슬 끝을 내기 위함이다.
“끄아아아! 두고보자!!”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달은 상대는 전력으로 도주를 시도 했다. 다리를 자이언트 프로그의 것으로 변형시켜 폭발적인 점프력을 만들어 내고, 거리를 벌리는 즉시 단거리에서 속도를 내는 몬스터인 카뮬의 것으로 바꿔치기한 녀석은 영민이 대응하지 못하고 멍
하니 쳐다보자 곧 장거리 주자인 엑퍼트의 것으로 변형 시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서걱!
마음 먹은 순간 양 다리가 잘려져 나가고 말았지만.
어느새 따라잡은 영민이 놈을 무력화 시킨 것이다. 힘이든 속도든, 그가 범할 수 있는 몬스터의 수준으로는 영민을 어찌 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순간이었다.
“으아아아!!!”
다음에는 새로, 연기로, 영체로.
망가진 몸으로 놈이 쉴 새 없이 변신을 감행하며 덤벼들었지만 뭐 하나 제대로 먹히는 것이 없었다. 실체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때려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영민에게는 충분했으니까.
상위 몬스터들의 능력을 조합해서 사용 할 수 있는 놈의 고유 능력은 비슷한 수준이거나 한 수 아래의 상대들에게는 아주 잘 통했지만 전반적인 스펙이 압도적으로 우월한 영민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놈이 있었지.’
3차 던전 쇼크 때였던가, ‘능력복제술사’라고 불리는 놈이 각성을 했었다. 아예 신체 일부를 몬스터의 것으로 변형시키는 이 놈과 달리 인간의 몸으로 몬스터의 능력을 카피해 사용하는 녀석인데 강하기도 강했지만 워낙 특이한 녀석이라 기억을 했다.
‘골든 프로그의 혀를 카피해서 8M밖의 여자친구와 찐한 키스를 하던 것은 정말 엽기였지··.’
가벼운 손놀림으로 상대를 기절시킨 영민이 그때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목을 쳐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굳이 수고스럽게 ‘제압’을 하는 쪽을 택했다. 심지어 코인을 들여가며 ‘마력 구속구’라는 아이템도 몇 개나 구입했다. 포로를 구하기 위해, 혹은 죽이기 위해 잠입할 S등급들을 꼼짝 못하게 가둬두기 위한 방법이다.
완전히 제압되거나 서로가 동의한 상태에서 이 마력 구속구를 차면 영민이 허락하기 전까지 마나를 사용 할 수 없으니 제 아무리 S등급 헌터라도 도망은 꿈도 못 꾼다.
그리고 영민은 다시 이들을 미끼로 몇 명의 S등급 헌터를 더 낚고, 또 낚은 뒤 몽땅 팔아치울 작정이었다.
일종의 ‘낚시’ 혹은 ‘포로 장사’.
적을 칠 때 치더라도 뽕을 뽑아먹은 뒤 치겠다는 계산이다.
“원한 관계가 좀 있나봐? 아프리카 건 때문인가?”
영민이 상대를 제압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남은 하나마저 끝장낸 아렌이 물었지만 영민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골든 크로스의 습격 소식까지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골든 크로스가 대한민국에서나 10대 길드였지 다른 나라로 나가면 그저 조금 규모가 있는 길드 하나일 뿐이다.
전세계인들이 사랑과 관심을 받는 성녀님께서 사정을 알 리가 없지.
영민이 묵묵히 마력 구속구를 한 명씩 채운 뒤, 다시 심드렁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근데 너, 안 가냐?”
“뭐?”
아렌이 황당해진 눈으로 마주 보았다.
“손 잡자는 것은 거절했고, 한 판 붙을 것도 아니니까 이제 용건 없잖아? 그러니까 가라, 쫌.”
“크크큭. 이거 재미 있는 놈이네? ‘이 녀석’을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일 거다.”
“아니야. 나 재미 없으니까 관심 끄고 좀 가!”
무슨 B급 로맨스 소설도 아니고,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하면서 들러 붙을 생각은 아니겠지?
< 107화 - 성녀 아리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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