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성녀 아리스 (2) >
그저 한 소녀가 건물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건물 전체가 환하게 빛나고 닿는 공간마다 정화가 되는 느낌이다.
그녀가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예쁜 여자 아이돌’ 같은 느낌으로 방방 뛰던 민호조차 황홀하게 바라보기만 할 정도이니 그 파괴력은 말할 것도 없겠지.
모두가 그녀를 ‘예쁜 꽃’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 ‘성녀’를 대하듯 저절로 자세를 바꾸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뒤에 선 기사단도 쳐다보았고.
‘기사단은 개뿔. 빠순이 헌터들 주제에.’
그렇기에 더더욱 소 닭 보듯 하는 영민의 태도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성녀에게 예의를 갖추시죠.”
놈들 중 대빵, 굳이 따지면 기사단장 쯤 되는 헌터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점잖게 타일렀다.
그러나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이나 잘못 골랐다.
“댁한테나 성녀겠지.”
그다지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은 영민은 굳이 그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덕분에 뒤에 있던 놈들까지 단체로 발끈했지만 단체로 힘을 개방한다한들 눈 하나 깜짝 할 영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응이 홀려있던 셋을 일깨웠다.
유재한을 제외한 가람과 철우, 민호가 기세를 바꾸고 당장이라도 맞설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만하세요. 그의 말이 맞아요. 성녀라는 이름도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일 뿐이니까요.”
유재한만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성녀 본인이 나서 양측을 중재했다.
슬쩍 보니 그 천사 같은 선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민호의 자세가 흔들흔들 거렸다.
“미리 연락을 드린다고 드렸지만 우리가 제대로 허락을 구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에요. 찰스, 불청객의 입장에서 소란을 피울 생각인가요?”
“성녀님. 하지만 성녀님께서 오신다는데 감히 누가··.”
“찰스!”
찰스라 불린 헌터는 여린 소녀의 목소리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미, 미안합니다.”
이 드라마 혹은 꽁트 같은 상황에 익숙한 영민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합니다. 기적의 성자님. 당신의 명성은 멀리서나마 많이 들었어요. 그 귀한 아이템을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베푸셨다는 이야기에 깊이 탄복하고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권영민입니다.”
“아, 네!”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기쁜 듯 웃는 모습에 뭇 남성들이 흔들흔들거렸지만 영민은 더 없이 냉정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탄복할 것도, 감탄 할 것도 없습니다. 그 덕에 헌터들에게 더 비싼 값에 팔았으니까요. 일종의··샘플 마케팅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아리스는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영민의 표정은 냉기가 풀풀 날렸다.
장사꾼 마인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렇게 보이는 것이 영민의 목표였으니까.
“혹시 포션이 필요해서 온 거라면 여기까지 오실 필요가 없었는데··. 뭐, 그래도 먼 걸음 하셨으니 항공료 값은 빼드리죠. 필요한 물품을 말해두고 가시면 우선적으로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자가!!”
슬쩍 덧붙이듯 내뱉은 영민의 말에 장내가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마치 성녀를 싸구려 장사치 쯤으로 여긴다는 생각에 ‘성녀를 위한 기사단’ 전원이 당장 무기를 빼들고 난동을 부릴 기세인 것이다.
거기에 지지 않고 가람과 철우, 민호도 언제든 기운을 뿜어낼 준비를 마쳤으니 기껏 구한 임시 길드 하우스가 가루가 되는 것도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그만!”
또 다시 소녀의 외침이 분위기를 깨뜨렸다.
마치 그 한 마디가 전쟁을 멈췄다는 한 여성의 노래처럼 도저히 싸움을 생각 할 수 없는 기류를 만들어낸 것이다.
‘쳇.’
모두가 ‘오, 내가 무슨 짓을··.’하며 자기 머리를 붙잡아야 할 것 같은 가운데에서 오직 영민만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냥 먼저 출수 할 걸 그랬나. 그랬다면 완전히 빠이빠이였을 텐데.
‘아니지. 저 애라면··.’
기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뒤에도 ‘우리의 잘못’이라며 되려 이쪽이 곤란해지게 만들 수 있었다.
‘어후. 죽겠군.’
상대가 어떤 성격인지, 존재인지 아는 까닭에 영민은 잘 피해가는 중에도 등 뒤로 식은 땀을 흘려댔다.
그 뒤로도 아리스는 몇 번이나 친근하게 말을 건네고, 감사와 존경의 말들을 이어갔지만 번번이 돌아오는 것은 차디단 냉대 뿐이었다.
이쯤되니 가람마저도 좀 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
그러나 영민이 하는 일이기에, 뭔가 생각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묵묵히 그의 뜻을 따를 뿐이었다.
‘어, 저거 설마··.’
그렇게 대화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하던 영민의 눈에 갑자기 무언가가 밟히기 시작했다.
성녀의 태도나 표정, 말투 등은 전혀 변함이 없지만 어쩐지 반템포 정도씩 말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고 보지 않는다면 잘 모를 정도.
영민의 냉대가 당황스러워 그럴 수도 있지만 영민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젠장. 나왔나보군.’
그때였다. 아리스가 잠시 말을 않고 영민을 가만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주위를 향해 한 가지 요청을 했다.
“잠시 영민님과 단 둘이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여럿이 있을 때도 이렇게 면박을 주는데 단 둘이 있으면 얼마나 더 할까. 혹시나 험한 짓을 당하지는 않을까 모두가 염려했지만 아리스의 뜻은 단호했다.
‘안 돼! 안 된 다고!!’
그리고 또 한 사람. 영민 또한 마음 속으로 격하게 거부했지만 곧 기사단이 물러나고, 영민이 가지 말라고 메시지로 소리쳐도 민호와 세 사람이 자리를 떴다.
딸칵
문이 닫히고
우두둑
손을 푸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리스의 ‘기질’이 달라졌다.
“····너, 아렌이냐?”
그 변화를 영민이 바로 알아차렸다.
“오호, 날 알아?”
전혀 딴 사람 같은 모습. 외모나 외형은 그대로지만 소녀 같은 여리여리하던 느낌은 사라지고 날카로운 눈빛의 파이터가 눈 앞에 있었다.
‘아니, 정말로 딴 사람이지.’
지금의 그녀는 정말로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이중인격?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확히는 ‘영혼’이 달랐다. 두 개의 영혼이 체인지 되면서 지금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럼 이야기가 쉽군. 너, 꽤 강한 것 같은데 나랑 손을 잡는 건 어때?”
“거절한다.”
제안은 단박에 거절했다. 하지만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아주 강력한 강화계 헌터였으니까.
영혼이 바뀌며 ‘고유 능력’도 바뀐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사기 같은 것은, 그녀가 동시에 ‘아리스의 고유 능력’까지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혼이 체인지 되었다면 능력도 ‘교체’가 되어야 마땅하거늘, 그녀는 두 가지 능력을 모두 사용하는 것은 물론 두 가지 능력 모두 S등급 수준으로 쓸 수 있었다.
생각해보라. 뛰어난 S등급 강화계 헌터가 S등급 지원계 헌터의 모든 버프며 회복 능력을 집중해서 받는다면? 그야말로 괴물이 따로 없다.
전투 능력이나 센스가 떨어진다면 모를까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병기’ 수준의 전투력은 언제나 헌터 랭킹을 매길 때 그녀를 한 손가락 안에 들도록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비슷하게는 진지한이 있겠지만 그처럼 ‘마나 활성화로 육체를 강화’하는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를 테면 강화판이라고나 할까?
‘이길 수 있겠지?’
때문에 영민의 불안도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무기로 삼을 것들은 충분하다. 모조리 쏟아 부으면 10배를 훌쩍 뛰어넘도록 강화되는 능력은 그 누구와 붙더라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
충분한 실력과 충분한 자신감. 그러나, 그녀 역시 ‘신성’ 계열이라서인지 일말의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물론 싸움으로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렌’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러기를 바라는 게 무리였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잉? 이건 또 무슨 속셈이야?’
생각보다 쿨한 그녀의 반응에 오히려 영민이 당황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가 없을 텐데?
“그건 뭐 그렇고. 일단 한 판 붙자.”
‘··씨벌. 그럼 그렇지.’
평화주의자에 가까운 동생 ‘아리스’의 영혼과는 정 반대로 무척이나 호전적인 성격.
자신과 비슷하게 강해보이기만 해도 한 판 붙어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미친 호전성을 지닌 것이 바로 그녀였다.
그렇기에 영민은 그녀의 방문이 예정된 시점부터 한바탕 푸닥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신성한 광휘, 성역선포.”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영민은 대꾸를 하는 대신 자신의 전매특허가 된 버프 콤보를 펼쳤다.
그러나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신성 제어.”
“?!”
파츠츠츳
아렌이 씨익 웃으며 외친 한마디에 영민을 향하던 빛들이 모조리 그녀에게 빨려 들어간 것이다.
“미친.”
신성 제어에 이은 흡수!
극 카운터의 성격을 띄는 고유 능력의 발현에 영민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능력은 강태성의 기억에도 없었다고!’
전투력을 10배 뻥튀기 시키는 버프를 흡수했으니 그녀의 능력도 그만큼 증가했을까?
‘더 할지도 모르지.’
영민이 가진 스킬 이상으로 아렌이자 아레스가 가진 버프는 더 많았으니까.
영민은 급한대로 다른 버프들을 끌어 모았지만 그녀 역시 온갖 버프를 중첩하고 있으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젠장, 빛 속성을 제외하니 효율이 확 떨어지는군.’
때문에 남은 버프 중 일부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그녀를 향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템빨은 어떨까!’
버프가 적은 만큼 준비 시간도 짧다. 영민은 그 점을 노렸다. 헤이스트 등 최소한의 버프로 치장하는 동시에 짓쳐 들어간 것이다.
“성격도 급한 오빠네!”
덕분에 아렌도 버프를 중단하고 맞설 수밖에 없었다.
“빛의··! 젠장, 삼단 베기!”
핸디캡은 컸다. 극상성이라 봐도 좋을 정도로 ‘성기사’ 계열을 주력으로 올린 영민에게 ‘빛 속성’ 기술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엄청난 전투력의 손실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그에게는 ‘템빨’이 있고 ‘치명타 데미지 증폭’이 있었으며 가장 강력한 ‘운빨’이 있었으니까.
더구나 [뇌신 강림] 역시 남아 있었다.
쩌정!!
격투가의 성향을 지닌 아렌은 특수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너클을 사용했다.
그 자체로 레전드 등급의 무기였지만 +13 봉인의 드래곤 슬레이어에 비하자면 한참이나 손색이 있을 터.
그러나 첫 격돌은 동수였다.
강화계의 힘과 지원계의 힘을 쏟아부어 강화한 너클이 영민의 공격을 버텨낸 것이다.
그래봐야 ‘버텨 낸’ 것 뿐이어서 지속적인 격돌을 가지면 장비의 우위를 가져올 수 있을 테지만 시간을 끌면 불리한 것은 영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녀가 ‘신성 폭발’ 같은 능력을 쓸 수 있다면? 영민의 체내에서 휘돌고 있는 ‘빛’까지 완전히 봉인하는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다면?
격차가 순식간에 벌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상성이 안 좋아도 너무나 안 좋았다.
‘뇌신 강림으로 허를 찔러야 하나··.’
단 한 번의 격돌로 모든 상황을 짚어낸 영민은 빠르게 판단을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빛이 봉인 되었다면 다른 수를 내는 수밖에.
그렇다면 가능한 수는 두 가지. 버서크와 뇌신 강림 뿐이다. 선택의 순간, 아렌이 대뜸 그에게서 몸을 틀었다.
“잠깐. 숙녀의 비밀을 훔쳐봐선 안 되지!”
퍼억!!
빛으로 물든 허공을 격하자 아무 것도 없던 공간이 일렁이더니 몇 명의 사내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그 놈들이다!’
< 106화 - 성녀 아리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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