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성녀 아리스 (1) >
길드 ‘힐름’이 창설된 이후 대한민국에는 실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10대 길드 중 하나였던 골든 크로스가 전신인 것 같기는 한데 완벽한 체질 개선을 했기 때문이다.
일단 기존에 유지하던 사업체들 중 단 하나도 다시 만들지 않았고 아예 ‘기적의 연금술사’라는 명성을 내세워 포션 제조업만을 주력으로 삼을 뿐이다.
사업이라고는 하지만 극소량의 포션을 내다파는 것이 고작일 뿐이어서 사업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애매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 몇 종의 포션을 파는 것만으로 과거 골든 크로스가 사업을 통해 벌어들이던 것 이상의 총 매출을 찍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 헌터협회와 헌터넷 등을 통해 구입하던 약초들을 개인 채집꾼이나 채집꾼 연맹을 통해 원활히 공급 받을 수 있게 되었다.
S등급 헌터가 둘이나 있는데다 약초를 가장 가치있게 사용하는 곳이다보니 그들 쪽에서 먼저 접촉해서 직접 계약을 요구한 것이다.
대형 길드가 자체적으로 보유한 채집꾼이 아닌 이상, 일반 채집꾼. 즉, E등급 헌터들이 생계를 이어갈 방법은 개인 자격으로 일반 팀이나 파티에 협력하거나 채집꾼 연맹을 통해 일을 할당 받는 수밖에 없는데 그 채집꾼 연맹에서 대량의 약초 공급을 약속한 것
이다.
대신 대금을 돈이나 마나석 따위가 아닌 비약 등의 특수 포션으로 요구했지만 전혀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성공률이 희박하다면 오히려 적자가 날수도 있지만 영민은 다름 아닌 행운 Max였으니까.
실패라는 말 따위는 잊고 산지 오래였다.
그렇다보니 길드에 인원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초기 길드 생성을 위한 조건이 ‘길드장을 포함한 5인 이상의 파티’였기 때문에 유재한을 끼워넣었을 뿐, 과거 골든 크로스에서 살아남은 A등급 헌터들을 딱히 흡수한 것도 아니었다.
아직 습격한 자들에 대한 조사나 복수가 끝나지 않았으니 핑계는 좋았다.
지금 단계에서 합류해봤자 피만 볼 수 있으니 우리가 은원을 깨끗이 정리한 뒤 ‘언젠가’ 부르겠다는 것이다.
물론 한동안 그들을 다시 모을 생각은 없었지만 10대 길드라 하던 이들이 거의 와해 수준으로 가는 것을 본 터라 대부분 군말없이 그들을 따랐다.
땡깡을 부리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이미 한 번 영민의 버프를 맛 본 이들이다. 그들은 목숨 따위 어떻게 되도 좋으니 함께 할 수만 있게 해달라며 매달렸지만 영민은 그들을 따로 불러 만약 그들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지면 좋은 꼴 보기 힘들 거라고 적당히
(?) 타일러 보냈다.
그리고 그의 막대한 기운과 살기를 한 몸에 받은 이들은 A등급 헌터라는 이름이 아깝게 오줌을 지리며 도망치듯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불과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행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 동안 선보인 무용과 업적 때문인지 구상만 던졌을 뿐인데 돕고 싶다며 나서는 이들이 줄을 선 덕분에 모든 것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그 동안 영민은 방심하지 않고 늘 주변을 살폈다. ‘포로’를 잡았으니 어떤 식으로든 적들에게서 ‘입질’이 올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포로들을 빼내려고 하든, 아니면 죽여 입막음을 하려고 하든 다음 타자들이 나설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굳이 ‘포로를 잡아 조사
중’이라는 정보를 흘린 것이고.
만약 예상대로 새로운 적들이 나타난다면, 기존처럼 결코 만만한 자들은 아닐 터였다.
S등급의 하위에 속하는 이들이라도 동시에 둘이 당했으니 최소 S등급 중위에 속하는 헌터가 둘 이상 오지 않을까? 아니, 이쪽에 S등급 헌터가 한 명 더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이상의 숫자나 강자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아직 완벽히 스스로를 가늠하지 못하는 이상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대장! 이거 봤어요?!”
그때, 철우가 신이 난 표정으로 신문 한 장을 들고 뛰어왔다. 뭔가 좋은 이야기가 실려있는 모양인데, 설레발을 치는 모습을 보니 어째 느낌이 쎄하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몇 개나 되는 신문을 받아든 영민의 표정이 별안간 와락 구겨졌다.
[성녀 아리스, 전격 방한!]
[성녀의 축복, 대한민국에 내려지나?]
[성녀 아리스. “아프리카를 위해 노력한 기적의 연금술사에 감사. 꼭 만나고 싶어”]
[성녀와 기적의 연금술사의 회동. 어떤 내용이 오갈까?]
[기적의 연금술사와 성녀는 사실 그렇고 그런 사이?]
신문마다 대문짝만하게 걸린 뉴스는 다름아닌 한 소녀의 방한 소식이었다.
그녀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풀이 돋아나고 병자가 사라진다는 최상위 회복계 S등급 헌터, 성녀 아리스였으니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저 ‘아우라’만으로 병자를 이유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작금에 있어 교황보다 가치가 높은 것이 그녀인지라 대한
민국 전체가 그녀의 방문을 환영하고 기뻐했다.
‘망할··. 이년은 또 무슨 오지랖이야?’
단 한 명. 영민만을 제외하고.
‘망할 년! 오지랖 넓은 년! 도움이 안 되는 년!“
강태성의 기억에 남아있는 단 둘 뿐인 여성 헌터이자 가장 만나기 싫은 두 명의 헌터 중 하나가 바로 그녀인 것이다.
또 다른 한 명은 이미 만난 바 있는 여성 네크로맨서 루티 커틀렛이고.
‘그냥 던전에 들어가서 잠수를 탈까, 아니면 해외로 나를까.’
영민은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그녀를 칭송하지만 직접 만나면 무척이나 피곤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영민이니까.
해외에 던전 쇼크가 정리되지 않은 곳이 많다던데 이참에 한 번 더 나갔다 올까, 7레벨 던전 쯤에 몸을 던지면 따라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잠시 심각한 고민에 잠겨있던 영민은 결국 모두 부질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너무 알려져버린 탓에 해외로 나가면 금방 들통이 날 테고 던전에 들어간다고 해서 그 동안 아리스가 집에 갈 것 같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든, 혹은 잠수를 타든 집요하게 기다리고 찾아내겠지. 또한 그녀를 칭송하고 떠받드는 ‘성녀를 위한 기사단’ 길드도 골치다.
자신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면 무슨 짓을 해서든 끌어다 성녀 앞에 가져다놓으려고 할 테니까.
물론 자신이 겁을 낼 정도의 무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들과 충돌할 필요도 없으니 귀찮기만 무지하게 귀찮을 거다.
“어휴, 망할 년.”
영민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행운이 Max인데 별 일이야 있을까.
그리고 다음 날, 성녀가 전용기를 타고 김해 공항에 도착했다. 빠돌이 같은 기사단 놈들도 몇 대나 뒤따랐고.
‘그래. 비약을 좀 얻으려고 온 걸 수도 있잖아?’
‘아니지. 그년이라면 스펙 업보다는 최상급 질병 치료제의 레시피나 대량 공급 요청을 하러 온 걸 수도 있을 거야.’
‘설마 함께 해외 순회라도 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 소식에 영민은 정말 공항에 마중이라도 나가야하는 거 아냐? 하고 생각을 했지만 공식적으로 만남을 요청 받은 것은 아니기에 모르는 척 했다.
아니 정확히는 요청을 받기는 했지만 가람을 통해 연락을 받았을 뿐,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며 직접 통화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애써 외면한 것이다.
혹시 아나? 그녀가 도착하면 필시 청와대며 정재계 인사들이 초청을 할 것이고 여기저기 끌려다니다가 자신을 만날 시간이 없어질지.
물론 그것이 헛된 망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영민은 정말로 그녀를 만나기 싫었다.
인류 최강 최후의 민폐 캐릭터.
강태성이 경험했던 그녀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이번에는 절대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 만나는 거야 만날 수 있지. 다 거절하고 안 엮이면 그만이야.’
순수 선(善)에 가까운 성격 때문에 대를 위해 소를 버릴 줄 모르고 스스로를 희생하려 하는 그녀의 특성상 얽혀봐야 좋은 꼴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이다.
그 탓에 그녀의 동료였던 강태성도 무진장 고생을 했더랬지. 물론 그 덕에 올린 레벨도 상당하지만 어디까지나 살고자 발버둥 치면서 저절로 오른 것이지 그녀의 덕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것도 그거지만 정말 끔찍한 건··.’
그래. 그것까지는 괜찮다. 어떻게든 헤쳐나가면 그만이고 그럴만한 힘을 갖춘 동료들이 그녀와 강태성의 곁에 있었으니까.
언젠가 해치워야 할 몬스터들을 조금 더 빨리, 예정되지 않은 시간에 만났다고 생각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녀를 피하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형! 아리스가 이리로 오고 있대요! 모든 초청이며 인터뷰를 다 뿌리치고 형을 만나러 오는 길이라는데요? 오면 저 사인 좀 받아도 되죠? 네? 우.유.빛.깔. 아.리.스!”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영민의 마음은 모르고 민호가 철 없이 슬픈 소식을 던지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가만보니 민호 뿐이 아니다. 철우나 유재한, 심지어 가람마저도 상당히 들떠 보이는 눈치다.
신성한 마나의 축복을 받아 햇빛을 아무리 쬐도 백옥 같은 피부에, 20세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탱탱한 피부,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니 인형처럼 예쁜 외모까지 갖췄으니 그저 신성한 대상이 아니라 이성적으로도 엄청난 매력을 가졌음은
분명하다.
사실 그녀가 먼저 찾는다는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자신이 이상한 것이겠지.
영민은 한숨을 푹 내쉬고 ‘그러냐’며 심드렁한 대꾸를 던지고 벌써부터 소란스러워지는 임시 길드 하우스의 바깥을 살폈다.
“벌써 개떼처럼 몰려왔네.”
자본이야 충분하니 시끄러운 일이 없도록 주변 건물까지 몽땅 사들였는데 이놈의 기자들은 ‘언론’이랍시고, ‘국민의 알 권리’랍시고 벌써 사유지 푯말을 넘어 건물 앞까지 쳐들어왔다.
언제 적들이 잠입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괜한 피해를 만들기 싫어 관리인이며 경비 인원을 최소한으로 정했더니 제대로 된 관리가 어려운 것이다.
카메라로 전국 생방송까지 때려가며 쳐들어온 기자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강제력 행사도 하기 어려우니 더 그렇다.
일갈을 내질러 그들을 확 쫓아버릴까, 아니면 협박을 해서 스스로 물러나게 할까.
영민은 순간적으로 드는 충동들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가람에게 지시했다.
이런 일은 아무래도 민호나 철우에게 시키기 부담스럽다.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그리고 잠시 후, 기자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사유지 경계 밖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아리스의 이름을 판 것이다.
‘한국 사람 말은 듣지도 않을 것들이····.’
영민 자신의 요청이라고 해봐야 들어먹지도 않을 것들이, 아리스의 요청이라고 하자 찔끔해서 스스로 물러난다.
성녀의 뜻에 반하는 일을 했다가 혹시 천벌을 받지 않을지, 국제사회나 그녀를 신성시하는 이들에게 욕을 먹지는 않을지, 그것도 아니면 그녀의 극성 팬클럽이나 다름 없는 ‘성녀를 위한 기사단’에게 몹쓸 짓을 당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대한민국 10대 길드의 수장들이 말해도 어지간하면 끈덕지게 따라붙는 이들치고는 아주 고분고분한 모습에 영민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어떤 미친 작자는 전투 중인 강태성에게 인터뷰를 시도하려고 하기도 했었지.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성녀 아리스가 그들이 있는 건물에 발을 딛었다.
< 105화 - 성녀 아리스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