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생명의 돌 (3) >
‘얕다.’
아홉 번째 칼질이 끝나는 순간, 영민은 실패를 직감했다. 단 번에 목을 베어내버릴 생각이었건만, 생각보다 놈의 근육이 질겼던 모양이다.
이격에 두꺼운 피부를 뚫고 칠격에 일부 뼈와 굵은 근육 줄기를 잘라냈지만 남은 뼈와 잔 근육에 가로막혀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윽.”
그리고 발악하듯 휘둘러진 자이언트의 손등에 부딪혀 멀리 튕겨져 나갔다.
그저 손짓인데 묵직하다. 여러 모로 약화되기는 했지만, 9레벨 던전에 등장하는 게 정상인 놈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걸 회복해?!”
잠깐 자세를 바로 잡는 사이, 절반쯤 잘려나갔던 자이언트의 목이 다시 붙었다. 아직은 조금 덜렁거리는 모습이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원상태가 되리라는 것쯤은 예상 할 수 있는 상황.
“스로잉!”
영민은 머뭇거리는 대신 몇 개의 약병을 투척해 놈을 견제햇다.
치이이익-
일부는 쳐냈지만, 일부는 적중했다. 피부에 닿자마자 독한 부식음을 내기 시작한 약병 속의 액체는 아물고 있는 상처 부위로 흘러들어가 순식간에 흡수되었다.
“끄르르륵?!”
그리고 곧, 반응이 왔다.
생명력이 충만하다는 것은, 그만큼 신체 활성화가 잘 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는 것은 외부의 어떤 요인이 몸 속에 흡수되거나 작용하기도 더 쉽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영민이 노린 것 또한 바로 그것이었다.
연금술로 만들어낸 독약은 물보다 빠르게 흡수되어 놈의 전신에 퍼져나갔다.
“끄어어엉!!!”
우뚝 행동을 멈췄던 자이언트가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 치며 들고 있던 워피크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위력이지만,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한 번만 피하면 된다.’
일정한 사거리를 유지하며, 영민은 가만히 거리를 재었다. 독약을 몇 개나 더 던져 중독을 유지하면서 딱 한 번의 틈. 곧 만들어질 그때를 노리는 것이다.
“다 죽여버리겠다!”
그러던 어느 순간, 놈의 워 피크가 번쩍거렸다.
자이언트의 스킬, 어스 브레이크.
놈의 워피크가 땅에 닿는 순간, 대지가 갈라지고 강력한 충격파가 일행을 덮쳤다.
‘지금!’
영민은 바로 그 때를 노렸다. 나머지 세 명이야 알아서 막거나 피했겠지.
오로지 스스로에게 다가오는 충격파만을 해소한 채 놈의 허점을 향해 도약했다.
“퉷!”
그때 생각지도 못한, 더러운 수가 나왔다. 자이언트가 자신의 피가 섞인 침을 영민에게 뱉어낸 것이다.
백독불침의 타이틀 효과로, 어지간한 독은 무시 할 수 있는 영민이지만 그 피에 담긴 독만큼은 무시 할 수 없었다.
결국 공격을 포기 했다.
‘젠장.’
그 한 번의 공격 실패가 무척이나 뼈 아팠다.
자이언트는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며 격한 몸부림을 쳤지만, 특유의 거대한 몸집과 힘,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를 바탕으로 번번이 영민의 공격을 차단하며 틈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독은 아직까지 통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적응을 해가는지 슬슬 피부 위로 쏟는 독들이 낮은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만큼 한 것도 대단한 것이다. 강태성의 기억으로는, S등급 헌터라 해도 자이언트와 일대일을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자이언트는 9레벨 던전에서도 개별 활동을 할 만큼 단일 개체로 가장 강력한 종에 속한다. 잊혀진 종족이라는 소리도 있고, 신
의 자손들이라는 소리도 있을 정도니까. 언젠가 드레이크의 날개를 찢어죽이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변수가 필요해.’
그냥 강태성의 공략법을 따를걸 그랬나. 어차피 오버 밸런스도 한참이나 오버 밸런스인 녀석인데.
애초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잡을 수 없게끔 설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유혹들이 속삭여왔다.
사실 강태성의 공략법을 따르면 사냥은 쉽다. 생명의 돌을 먼저 손에 넣은 뒤, 그 돌을 어떻게든 놈의 몸에 쑤셔 박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력이 과도하게 주입된 놈의 몸이 터져 죽고 만다.
이 과정에서 생명의 돌이 지닌 생명력 기운에 약간의 손실이 생기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기능에는 지장이 없을 정도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 할 수 있는 부분.
하지만 영민은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이 놈만큼은 직접 잡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든 까닭이다.
강태성의 공략법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보루.
놈이 회복하는 과정에서 이미 생명의 기운이 흘러오는 방향은 파악했으니 취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생명의 돌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버서크? 신성 폭발? 뇌신강림?’
몇 가지 방법들을 떠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이들을 각각 사용할 수도, 연계하여 사용 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인 것이다.
그것들도 엄연히 자신의 스킬이지만, 그것에 의존해서는 차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그’는커녕 ‘다섯 군주’에게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딱 한 번의 틈이면 될 것 같다는 기분도 한 몫했다.
딱 한 번이면 될 것 같은데. 그런 빈틈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다.
‘한 번이면 되는데··. 아!’
고민 하는 중에도 몇 번이나 공방이 오고 갔지만 소득은 없었다. 오히려 서서히 독에 저항해내며 자이언트의 페이스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영민이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스킬을 떠올렸다.
그 어떤 스킬이나 아이템보다도 확실한 변수가 될 수 있는 그것을.
“럭키 박스!”
이내 결단이 내려졌다. 영민의 앞으로 물음표가 잔뜩 새겨진 박스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스스로 개봉되었다.
[럭키 박스에서 ‘자이언트 킬러비’가 등장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자이언트 킬러비의 독침은 매우 위험합니다.]
등장한 것은 자이언트 킬러비. 성인 남성만한 크기를 가진 ‘벌(BEE)’ 형태의 몬스터였다.
킬러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처럼 매서운 독침으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녀석인데, 문제는 이 놈이 고작 7레벨 던전 몬스터라는 것이다. 반면 상대는 9레벨 던전에서도 손꼽히는 강자. 같은 ‘자이언트’라지만 수준 차이가 너무 컸다.
‘실패인가?’
행운이 Max라지만 항상 대박일 수는 없겠지.
그저 녀석이 자이언트의 시선이라도 끌어주면 다행이라 생각하며 슬쩍 거리를 벌리자 자이언트를 인식한 자이언트 킬러비가 날개를 빠르게 파닥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군과 적군의 개념이 없는 소환체라지만 지금 명백한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자이언트 하나 뿐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군. 버서크나 신성 폭발을··.’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자이언트 킬러비가 ‘기류 이동’을 펼쳐 자이언트가 내지른 공격을 피하더니 놈의 옆구리에 독침 한 방을 강하게 박아넣은 것이다.
“크허허헝!!”
자이언트가 크게 놀라며 팔을 휘둘러보지만 놈을 때려잡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자이언트 킬러비는 놈의 주위를 앵앵거리며 맴돌다가 두어번 더 독침을 찔러 넣고선 팔에 맞아 터져죽었다. 하지만 문제는, 자이언트 킬러비가 남긴 독침의 효과는 여전히 남았
다는 것이다.
“끅! 끅!”
자이언트는 자이언트 킬러비가 사라진 뒤에도 가려움증에 걸린 사람 마냥 자신의 몸을 벅벅 긁어댔다. 뭔가가 피부에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더니 호흡히 가빠지고, 종국에는 숨을 쉴수가 없는지 가슴과 목을 부여잡았다.
“설마 저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민과 세사람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놈의 단단한 피부와 근육에 올라온 저것은, 인간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증상이 아니든가?
“알레르기 반응?”
그것도 아주 심한 케이스다.
거의 발작 또는 쇼크에 가까운 반응에 영민도 잠시 멍해져 공격을 이어가지 못했을 정도니까.
그리고 곧 정신을 차려 강력한 일격을 준비했을 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뭐?!”
자이언트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사인은 아마도 알레르기 쇼크로 인한 심장발작이나 호흡불가.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경험치의 습득이라든지, 아이템의 습득은 정상적으로 일어났다.
“이거 참··.”
7레벨 던전 몬스터라고는 하지만 떼로 덤벼야 좀 무서워해줄만한 자이언트 킬러비 따위가 자이언트를 처치할 줄 누가 알았겠나.
놈들에게도 체질이라는 것이 있을 테니 모든 자이언트에 통용되는 방법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갈수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인생의 허망함이 느껴졌다.
“형,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에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달려온 민호와 가람, 철우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지만 그저 자신이 무언가를 소환해낼 수 있는 스킬을 썼고, 천운과 같은 우연으로 그게 놈의 천적이었다는 말 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해치웠으니 된 거지. 이제 미션을 마무리 하자.”
일단은 미션인 ‘생명의 돌’ 수거부터.
놈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소모되는 생명의 기운을 채워주는 방향을 파악해둔 영민은 그 위치로 거침 없이 다가갔다.
예전과도 다르지 않은 위치다.
절벽 같은 바위벽 위의 작은 공간에 숨겨져 있지만 이미 인간의 한계 따위는 아득히 넘은 영민에게 평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파이더맨처럼 맨 손으로 튀어나온 부분들을 잡고 위로 오른 영민은 묘한 감정으로 손을 뻗어 생명의 돌을 움켜쥐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데스 스피어.”
“!!”
콰앙!
그러나 생명의 돌을 손에 넣기 일보직전, 그의 등을 꿰뚫을 듯 날아든 기운에 몸을 날려 피해야만 했다.
제 아무리 영민이라 해도 정통으로 맞았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섬뜩한 기운이 응축된 공격.
그 죽음의 창을 날린 장본인을 확인한 영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미친 년이 어떻게··.’
죽은 자들의 어머니.
삶과 죽음을 지배하는 자.
죽음의 구원자.
최강의 네크로맨서.
혹은 그냥 미친 년.
강태성의 기억 속 그녀를 부르던 닉네임들이 빠르게 떠올랐다. 더불어 그녀에 대한 다른 모든 정보들도.
“호호호. 동생들, 미안하지만 그 물건은 이 누나가 좀 필요해서 말이야. 양보 좀 해줄 수 있겠어?”
“아니,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통역 능력의 장비를 가진 건지 영어로 생명의 돌을 요구하는 금발 여성의 말도 안 되는 떼 쓰기에 민호가 먼저 나서 한바탕 욕을 퍼부어주려는 순간, 영민이 환영에 가까운 하이톤의 목소리로 그녀를 맞이했다.
“물론입니다. 아리따우신 누님!”
“형····?”
모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지만 영민은 꿋꿋하게 미소를 유지했다.
“아름다운 누님이 필요하시다면 당연히 드려야지요. 뭐,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마치 정신지배라도 당하고 있는 듯한 태도. 그 동안 누구에게도 몸을 낮추는 법이 없던 영민이 이상한 모습을 보이자 모두가 더욱 격하게 반발했지만 곧 그들을 스쳐가며 들릴 듯 말 듯 내뱉은 말에 잠잠해졌다.
“다 죽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저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S등급 헌터마저 쓰러뜨린 영민이 하는 경고였기에 함부로 경거망동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싸우면 승산이 없다.’
지금 그녀와 시비가 붙어봐야 손해를 보는 것은 이쪽일 게 분명하다. S등급이라고는 해도, 스스로의 능력보다 거느린 언데드의 능력이 더욱 강력한 그녀이니까.
당장 보이는 것은 그녀 곁을 지키는 인간도 언데드도 아닌 존재, 데스 나이트 ‘마크’ 뿐이지만 꼭 그 하나라고만 생각하기도 어려웠고 그 자체도 S등급에 갓 오른 헌터 쯤은 일대일로 겨루어 압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그녀가 가세하기만 해도 승기는커
녕 살아돌아가는 게 용할 지경이 된다.
그러니 지금은 납작 엎드릴 수밖에.
영민은 여러 생각과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의 데스 나이트를 바라보며 몸을 낮추었다.
“동생이랑은 말이 잘 통하네. 그래도 맨입으로 받을 수는 없지. 어쨌든 고생한 건 동생들이니까, 이렇게 하면 어떨까?”
짝짝
그녀가 가볍게 두 번 박수를 치자 그들과 그녀가 지나왔던 저 멀리에서 검은 실루엣들이 다가왔다. 놈들의 품에는 수백 점은 될 법한 장비들이 안겨 있었다.
“헉!!”
그들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영민을 제외한 모두가 놀라다 못해 기겁을 했다.
변종 트윈헤드 오우거부터 자이언트와 조우하기 전 상대했던 모든 몬스터들이 줄을 지어 들어온 것이다. S등급 중에서도 최상위에 다달아있는 그녀가 되살린 언데드 몬스터들이다.
“이 정도면 조금은 보상이 될까?”
“어이구, 물론입니다. 감사할 따름이죠.”
그 중에는 레전드 등급의 장비도 한 두 개쯤 끼어있는 듯 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역시 주고 받는 것은 깔끔한 사람이다.
변하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영민은 더욱 묘한 표정을 지으며 거래를 마쳤다.
< 100화 - 생명의 돌 (3)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