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기적의 연금술사 (2) >
“우리도, 우리도 살려주십시오!”
은총과도 같던 최상급 질병 치료 물약으로 흥건히 젖은 바닥을 힐끗 쳐다 본 이들은 곧장 영민에게 달려와 간곡히 요청했다.
저마다 각국의 언어로 말해대는 통에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지만 다행히도 영민은 협상을 위해 코인상점에서 ‘통역의 링’을 구입해둔 상태였다.
해당 언어를 따로 익힐 필요 없이 그 뜻이 통역되는 악세서리.
악세서리 슬롯을 하나 사용해야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전투중이 아닐 때라면야 얼마든지 할애해도 좋았다.
“내가 왜?”
환하게 웃는 영민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왜, 왜냐니요?”
아직은 존댓말을 유지하고 있지만 듣는 이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절로 들 법한 상황.
간신히 침착을 유지하려했지만 이어진 영민의 다음 말은 그들을 일깨우기 충분했다.
“치료 받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제시하도록. 그게 아니라면 난 이곳을 떠나겠다.”
어차피 이 도시가 아니더라도 괴질로 고생하는 도시는 많다. 처음이야 샘플을 제공하듯 효과 검증을 위해 선심을 써서 베풀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알게 무언가?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날로 먹겠다면, 이 쪽도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하면 그만이다.
“이 자식이!!”
얄밉게 대답하는 그 모습에 결국 한 녀석이 참지 못하고 뛰어올랐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 목숨을 가지고 장사하려는 이를 보니 참지 못한 것이다.
“그라비티!”
“끄억!!”
그러나 영민이 나설 것도 없이 놈의 몸이 차에 깔린 개구리 마냥 납작하게 짓눌렸다. 민호가 슬쩍 준비해둔 마법을 발동한 것이다.
그가 아니라 수십이 함께 덤벼들었어도 짓눌러버렸을 힘이 한 곳에 집중되며 아예 놈을 바닥으로 파묻어버렸다.
처참할 만큼 압도적인 힘의 차이.
차라리 그렇게 당한 것이 놈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조금 더 다가왔다면 철우와 가람도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
“이건 뭐하자는 거지? 거래 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아, 아닙니다. 기다리십시오!”
기분이 상했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영민이 돌아서려하자 남은 자들이 납작 엎드렸다.
방금 덤빈 자의 수준이 낮다고는 하지만, 자신들 중에는 A등급의 헌터도 있다고는 하지만 섣불리 힘으로 제압하려 할 수 없을 만큼 상대도 강자인 것이다.
더구나 느닷없이 생겨난 저 물탱크와 펌프.
그것들은 이들이 ‘아공간’ 계열의 능력이나 아이템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이템이면 다행이지만 만약 능력을 이용한 것이라면, 설사 이들을 죽이거나 제압한다 해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기를 써서 살리려 한 자신들의 동료 역시 죽은 목숨일 테고.
‘모든 비난을 독박 써야한다라는 것도 고민이겠지.’
그 밖에 ‘살 수 있었던’ 모든 이의 비난과 분노를 떠안아야 한다는 부담도 있을 것이다.
그냥 대가를 지불하면 살 수 있던 동료를, 가족을 다른 누군가의 행동으로 잃어버려야 한다면 그 분노의 화살이 과연 누구에게 향할까?
안 봐도 비디오인 계산에 영민을 붙잡은 이들이 불안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 얼마를 원하십니까?”
“글쎄? 성의를 보도록 하지. 별로 급하지 않은 모양이니! 가장 큰 금액을 제시한 이들에게 먼저 치료제를 판매하겠다.”
기분이 상했다는 듯, 영민이 이죽거리며 답하자 놈들의 얼굴이 똥을 씹은 것처럼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이럴 줄 알았지. 하는 살기어린 시선이 납작하게 짜브러진 헌터에게 꽂혔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이야기하지.”
이어진 축객령. 이곳에 먼저 자리 잡은 것은 그들이나 이미 영민의 성지나 다름없게 된 이곳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퇴장해야했다.
그렇게 집단이 사라지고 난 뒤, 축제 분위기던 지역에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뭐라도 나올 구석이 있는 그들과는 달리 자신들은 영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드릴 것이 이것 밖에 없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 중 하나가 용기를 내 먼저 영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무릎을 뚫고 두 손을 높이 들어 부부가 차고 있던 결혼 예물과 푼돈이 될 만한 마나석 몇 개를 부끄럽다는 듯 그에게 바쳤다.
“이러지 마십시오.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민의 반응은 조금 전과 전혀 달랐다. 부담스럽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사내를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값은 낼 수 있는 놈들이 좀 더 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히 마음 쓰이신다면 가끔 제 생각이나 하면서 평안을 빌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픈 동안 서러운 일들을 많이도 겪었는지 펑펑 우는 이들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기원’의 힘을 얻기 위한 포석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채.
이유야 어찌되었든 서로 좋으면 된 일 아닌가?
영민은 내친 김에 인벤토리에 싸짊어지고 온 식량 중 일부를 풀어 그들이 체력을 회복시키는 것을 도왔다.
어차피 오랜 기간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속이 곪을 대로 곪아서 정상적인 식사는 하지 못했으니 그다지 어렵거나 손해를 보는 일도 아니었다.
하물며 노동력이 필요한 모든 일들은 그를 성자처럼 떠받드는 다른 이들이 앞장서서 해치웠으니 돈만 조금 풀고 공은 모두 차지 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영민에게 찍힌 나머지 지역의 헌터들은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괴질을 치료시킨 회복제가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고 각기 상태가 달라 진행 정도를 가늠 할 수도 없으니 일단은 선점을 하고 봐야하는 것은 분명한데, 얼마를 불러야 할지 애매한 것이다.
얼마까지 가능하지? 다른 곳은 얼마를 부를까? 차라리 몰래 담합을 해봐? 아니다. 그랬다가 들통이 나거나 한 곳이 배신을 하기라도 하면 답도 없었다. 목숨이 걸린 일인 만큼 배신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 할 수 없었다.
결국은 정말로 눈치 싸움을 해야 한다는 소리.
누구도 길드의 주력을 잃고 싶은 생각은 없을 테니 처음부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좋았다.
“자, 생각들은 많이 하셨나? 그럼 시작하지.”
한 시간 뒤. 영민의 진행에 따라 입찰가를 각각 써낸 이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과연 최고가는 얼마일까. 대충이라도 알아야 다음 번 경매 금액을 써넣을 것이고, 자신의 차례가 얼마나 될지도 견적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새끼들 봐라?’
입찰가를 확인한 영민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그들이 고심하는 동안 영민이라고 놀고 있던게 아니었다. 그들의 소속과 괴질에 걸린 인원의 수준, 중요도 따위들을 확인했는데 그것과 가격에 적지 않은 갭이 있는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길드에 연락을 취해 지시를 받았건만 결국 ‘간을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영민의 입가가 묘하게 비틀리고 결정이 내려졌다.
“결정 났군. 낙찰자는 13번이다.”
“예엣? 정말, 정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결과에 낙찰자로 선정된 이들은 되려 당황했다. 나름대로 큰 금액을 써넣기는 했지만 정말로 낙찰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기준에서 부담스러운 금액이지, 대형 길드들에게는 그리 큰 돈이라 말 할 수 없는 액수이기에.
“100만 달러를 가진 이들에게 1달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10달러를 가진 이들에게 1달러는 매우 큰 돈이니까.”
이어진 영민의 말에 희비가 교차했다. 꼭 최고액을 써내지 않아도 치료제를 구할 수 있다는 뜻이었기에 중소길드나 파티들은 희망을 엿봤고 대형 길드들은 등골을 빼먹겠다는 선언과도 같았기에 표정이 일그러진 것이다.
더불어 영민이 자신들에 대한 정보를 이미 모두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으니, 빠져나갈 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코리안들··.”
물론 그들 역시 나름대로 정보 수집을 끝냈다. 갑자기 튀어나와 기적 같은 치료를 행하고, 자신들에게는 횡포를 부리는 이 동양인들이 대체 누구인지 곧장 조사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누구인지 대략적으로나마 알아냈다.
영민은 그들이 그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뭐?
자신의 소속을 안다한들 제 놈들이 뭘 어쩌겠나? 영향력을 행사하려해도 자신이 길드장이고, 사업체 같은 것이야 설사 망해버린다 해도 아무 상관 없는 것을.
영민이 골든 크로스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은 그저 자신이 군주들을 상대 할 때 함께 나타날 군단 몬스터들을 상대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르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후로도 몇 차례나 이어진 치료제 경매에서는 대부분 대형 길드가 아닌 이들이 낙찰을 받았다. 거대 길드로서는 아무래도 놓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영민이 마지막 10회의 연속 경매를 선언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그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괴질에 걸린 동료를 포기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결국 막판에 불이 붙은 대형 길드 간의 경매는 한 번 한 번이 앞선 중소길드의 낙찰가 모두를 합친 것보다 큰 금액으로 치러졌다.
그들 사이의 눈치싸움이 결국 영민에게는 큰 복이 된 것이다.
약속한 10회의 경매를 모두 채우자 영민은 미련 없이 도시를 떠났다. 그리고 다음 도시로 이동해 똑같은 일을 벌였다. 다만 이전 도시에서 쫓아와 경매에 참여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그들이 바람잡이 역할을 해주기도 했으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수작은 계속되었다. 그들의 길드가 가진 힘과 영향력을 이용해 한국에 있는 골든 크로스에 압력을 가한 것이다. 정확히는 골든 크로스의 사업체들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인데, 영민은 다급히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에 ‘무시 할 것’을 지시하고 말았다.
결정권자인 길드장이 그러는데 누가 뭘 어떻게 하겠나? 결국 골든 크로스의 무대응에, 혹시 치료제를 팔지 않으면 어떻게하나 하며 지레 겁을 먹은 놈들은 슬금슬금 스스로 압박을 풀고 자금 마련에 힘을 쏟았다.
그렇게 십 여 개의 도시를 돌자 전세계가 두 가지 이유로 난리가 났다. 하나는 전세계 길드가 자금 확보에 열을 올리면서 파생된 소란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질병도 치료한다는 ‘기적의 성자’의 출현이었다. 불치병으로 알려지고 있던 괴질을 단번에 치료했을 뿐 아니라 일반인과 돈도 연고도 없는 낮은 등급의 헌터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주는 사실이 알려지며 영민을 ‘기적의 성자’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곧 영민의 치료방법이 ‘연금술’을 이용한 ‘포션 제조’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기적의 연금술사’라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쯤되자 전세계의 헌터들은 깨달았다.
시장에 ‘비약’이라는 엄청난 물건을 내놓은 자 역시 영민이라는 것을. 비약의 첫 등록지가 한국이고, 비약과 최상급 질병 치료 물약 모두 현존하는 연금술사 중 누구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는 당연한 추론이었다.
그 순간 적의는 가면 덮인 호의로 바뀌고 어떻게든 영민에게 연줄을 대보려는 시도가 쏟아졌다.
정작 본인은 한국과의 연락도 끊은 채 던전 안으로 쏙 들어가버린 상태였지만.
< 97화 - 기적의 연금술사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