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아지트 (2) >
“오!”
뜻하지 않은 레벨 업 덕분에 영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슬슬 6레벨 던전을 혼자 몇 바퀴 쯤 돌아도 레벨 업을 한 번 하기가 어렵고 7레벨 던전은 아직 혼자 진입하기 버거웠는데 가뭄에 단비 같은 극대량의 경험치가 보상으로 떡 하니 들어온 것이다.
순식간에 몇 계단이나 상승한 레벨.
이제 정말로 조금만 있으면 ‘고급 강화’의 문이 열린다.
‘아, 연계 퀘스트가 떴었지.’
그 짜릿한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시. 영민은 곧바로 연계 퀘스트의 내용을 살폈다. 어쩌면 또 다시 극대량의 경험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보통 연계 퀘스트는 마지막에 가장 큰 보상을 주니 단숨에 S등급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푼 마음을 안고 퀘스트를 살피자 약간 애매모호한 퀘스트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수를 지켜라]
이제 막 발아하기 시작한 세계수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라. 막대한 마나를 응집시키는 세계수는 그 자체로 대단한 가치를 지니기에 모두의 표적이 되기 쉽다.
- 성공 조건 : 세계수의 온전한 성장
- 실패 조건 : 세계수의 죽음
- 분기 조건 : 세계수의 손상
막연하게 ‘세계수가 성장할 때까지 지키는 것’은 꽤 모호한 목표였지만 영민은 퀘스트를 보는 순간 무엇을 해야할지 깨달았다.
“코인 상점 오픈. 은밀의 장막 구입.”
부쩍 줄어든 코인을 쥐어짜내 아이템 ‘은밀의 장막’을 구입했다. 은밀의 장막은 대상이 지닌 모든 기척과 기운을 지워주는 것. 그렇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다만 다른 이들이 느끼지 못하도록 감추어주는 효과 뿐이었다.
영민은 그것을 세계수를 심은 자리에 덮어 사용했다. 세계수가 자라겠지만, 그에 맞춰 은밀의 장막의 크기도 늘어날테니 걱정 없었다.
이것을 해제하는 방법은 영민은 직접 해제하거나 아이템이 손상될 만큼의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 것 뿐.
골든 크로스의 사유지인 이곳에서 전자든 후자든 발생할 일은 없으니 걱정 할 필요는 없을 듯 했다.
‘시간이 문제군.’
자라난 세계수가 가져올 이익은 어마어마했다. 세계수의 잎은 경험치 획득량을 배로 늘려주고, 세계수의 가지는 그 자체로 강력한 마력 증폭 능력을 가진 무기가 되며 세계수의 열매는 엄청난 경험치 덩어리이자 정화의 능력을 가진 회복제였다.
어디 그 뿐인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자라난 세계수는 그 자체로 주변의 인간과 엘프들에게 강화효과를 부여하는데 체력과 마나 재생능력이 크게 상승 할 뿐 아니라 일대를 마나 고밀도 지역으로 만들어 던전에 들어가는 것 이상의 마나 상승효과를 볼 수 있게
해준다.
즉, 가만히만 있어도 헌터의 등급이 성장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밖에 어떤 죽어가는 존재도 마지막 숨결만은 이어지게 붙들어놓고 아지트 대용으로 쓸 수 있을 만큼 사이즈도 넉넉하니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들이 알아도 난리가 날 법 했다.
‘정말로 몇 천년씩 걸리는 건 아니겠지?’
원래는 현재의 기준으로 9레벨 던전이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면서 그 안에 있던 ‘엘프’와 ‘세계수’가 함께 지구에 풀려나게 되어 나타났겠지만 어쩌면 그 이전에, 그것도 독점으로 만나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묘한 희열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불안
한 마음도 들었다.
보통 세계수가 묘사될 때, 몇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나무라는 표현이 따라붙는 것이다.
그래서야 아무 소용이 없다. 아니, 3~5년 이내에는 써먹을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었다.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기에 영민은 백인엽에게 공사 중단을 명령하고 수십기의 전투 골렘들을 배치시켜두었다. 표면적으로는 골렘들이 중장비 대신 일을 하며 건물의 잔해를 치우는 중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세계수가 있는 곳을 보호하는 것
이 주 목적이다.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 뿐.
다시 임시 길드 하우스로 돌아온 영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작 노가다에 매진했다.
[연금술 스킬 숙련도가 0.1% 상승했습니다.]
[연금술 스킬 숙련도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연금술 스킬 숙련도를 더 이상 상승시킬 수 없습니다.]
[타이틀 ‘연금술 마스터’를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연금술 숙련도가 100%를 기록했다. 연금술 마스터라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최후의 제작 레시피가 공개된다는 것 이외에는.
진짜는 이 타이틀에 붙어있었다.
포션 제작 속도 대폭 향상, 포션 제작 딜레이 대폭 하락, 소모 재료 20% 감소, 재료 충족 시 포션 대량 생산 가능, 모든 포션 효과 20% 상승.
그리고 이 모든 능력이 동시에 적용된다는 것이 꿀이었다.
더 빠른 속도로, 더 적은 재료 소모로, 능력을 20%나 향상시킨 포션을 대량 생산하는 것. 지겨운 노가다를 끝냈더니 또 다른 방식의 노가다를 내놓은 셈이지만 영민은 이 능력이 퍽이나 기뻤다.
당장 최상급 폭발 포션을 인벤토리 가득 싸짊어지고 들어가면 스킬 하나 사용하지 않고도 6레벨 던전이 클리어 가능할 테니까.
연금술 마스터가 되며 레시피가 개방된 최상급 폭발 포션의 위력은 8~9레벨 몬스터들에게도 충분히 큰 데미지를 줄 수 있을 정도였으니 거의 군사무기 수준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포션’은, 고유 능력이 없는 일반인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했다.
물론 폭발의 여파를 감당 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여러 현대 기기를 응용해서 쏘아낼 수도 있다는 것이기에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당장 최상급 폭발 포션만 해도 이럴진데 다른 포션들은 어떨까? 숙련도만 높으면 어지간한 상위 헌터들보다도 유용한 것이 연금술사인 만큼 영민의 가치는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휘유! 다녀왔습니다~,”
그때마침 민호와 가람, 철우가 던전을 클리어 하고 돌아왔다. 마나량의 차이도 있었지만 여러모로 꽤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성장했군.’
평소와 다름 없이 실실거리는 민호를 보며 영민은 속으로 그들을 평가했다. 충분히 합격점을 줘도 좋을 만큼 자세 하나하나가 달랐다.
고수는 걸음걸이부터가 다르다고 하지 않나? 영민은 그 미묘한 차이를 간파 할 수 있었다.
“으그그그. 죽겠다. 근데 형, 길드 헌터 중에 여자는 없어요? 맨날 몬스터랑, 그에 못지 않게 우락부락한 남정네랑, 재미없는 유부남 아저씨랑만 있으니까. 재미 없어 죽겠는데.”
푹신한 빈백에 몸을 폭 하고 던져 넣은 민호가 대뜸 여자 타령을 해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오다가 방송 들으니까. 저기 철원 쪽에 유명한 여자 헌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길드도 있고. 그런데 이쪽에서는 별로 못 본 것 같아서요. 한 번 던전에 들어가면 며칠이고 있다가 나오는데 예쁜 여자 힐러라도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잖아요. 마음도 설레고.”
혈기 왕성할 나이인지라 셋만 몰려 다니는 던전 생활이 살짝 팍팍하게 느껴졌나 보다.
‘여자 헌터라··.’
‘나 우울해요.’라고 말하는 듯한 과장된 표정에 영민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기억을 떠올렸다.
서류로 봤던 몇몇의 얼굴이 스쳤지만 썩 신통치는 않았다. 여성들 중에 높은 등급의 헌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투력이 뛰어난 인원은 의외로 굉장히 드문 것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성향’의 차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고정 관념’의 차이라고도 했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이름을 날릴 만큼 강력한 헌터 중에 여성의 비율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전투 센스가 좋은 이들 중 대부분은 등급이 낮았고 등급이 높은 이들 중에는 얹혀가는, 이른 바 ‘버스’ 타는 자들이 많았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영민은 두 사람을 떠올리고는 얼른 생각을 접었다.
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깨부수는 존재. 여성의 몸으로 감히 최강을 논할 수 있을 만한 존재를 무려 두 사람이나 알고 있지만 결코 떠올리고 싶은 대상은 아닌 것이다.
‘어후, 골치 아퍼.’
생각만 해도 골치가 다 아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사람 모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 둘의 실력이라면 결국에는 만나게 되겠지만, 최소한 이르게 엮이고 싶은 생각은 없는 영민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 쪽은 관계를 정해야 할 텐데··.’
아니다. 둘 중 하나는 만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전에 어떻게 관계를 정할지 마음의 결정부터 해야 했고.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다.
영민은 이번에도 결론을 내리기를 미루었다.
“민호 네가 덜 힘든가 보구나. 그런 생각도 다 들고. 요즘 많이 쉬었지?”
“네? 네?? 그, 그럴 리가요. 농담이었어요. 농담.”
민호가 빠르게 부정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영민의 손은 이미 태블릿을 조작하고 있었고, 곧 화들짝 놀란 백인엽이 전화를 울렸다.
“길드장,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농담이시죠?”
“농담 아니니까 얼른 준비해.”
“이런 시기에 해외 원정이라니요! 보고 못 들으셨습니까? 지금 아프리카 쪽은 미쳐 돌아가고 있어요. 일반인은 물론이고 헌터들까지 알 수 없는 괴질에 걸려 죽어나가고 있어요! 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준비나 해.”
“괴질 뿐 아니라 몬스터들의 수준도··. 아니, 그렇게 요청이 올 때는 무시하시더니 갑자기 왜 해외 원정을 가시겠다는 겁니까? 그것도 꼴랑 다섯 명으로!”
골든 크로스는 해외 원정에 힘을 쏟지 않은 덕에 이득을 많이 봤다. 국내에 새롭게 생긴 고레벨 던전도 여러 개 집어먹었고, 1레벨 던전이 붕괴되었을 때는 지역 치안에 전력을 쏟으며 민심을 크게 얻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해외 원정이라니? 그것도 이렇게 해외 사정이 안 좋다는 말이 쏟아져 나올 때, 달랑 네 명 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
물론 영민이나 나머지 세 사람의 무력이 일반적인 A등급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선 것은 인정하지만 너무나 위태로운 처사였다. 지난 7레벨 던전 공략으로 A등급 헌터들의 지지가 굳어져 괜찮을 수도 있지만 자칫 그들이 잘못 되거나 위태로워지기라도 하면 안
팎으로 길드가 크게 흔들릴 수 있는 일이었다.
“백인엽. 누가 내 행동을 판단하라고 했지?”
영민의 냉정한 한 마디에 수화기 너머 백인엽의 몸이 움찔 얼어붙었다. 그때의 공포가 떠오른 것이다.
그에게는 영민을 판단할 권리 따위가 없었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를 뿐, 그렇지 않는다면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그는 한 때 영민의 목숨을 노렸던 자이니까.
“··죄송합니다.”
“내일 떠나도록 하지. 차질 없이 준비해.”
“예.”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철저한 갑과 을의 관계. 그것을 비로소 떠올린 백인엽은 더 이상 어떠한 대꾸도 없이 준비를 시작했다.
“대장, 어디로 가는 겁니까?”
“못 들었어? 아프리카라니까.”
꿀꺽
못 듣기는. 요즘 한창 말이 많은 곳이 아닌가.
각국에서 지원을 나온 헌터들이 가장 많이 투입된 곳이자 가장 많이 죽은 곳인데.
몬스터들의 수준도 수준이지만 정체불명의 괴질에 대한 공포는 아프리카 이외의 국가들까지 퍼진 상태였다. 혹시나 전염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질 경우,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니까.
그렇기에 듣고서도 아니기를 바랐던 것인데, 영민은 확인사살을 하듯 다시 한 번 확실히 못을 박았다.
“왜 하필 거기를··.”
“왜긴? 약속 지켜야지.”
“예?”
“철우와의 약속.”
“약··속이요? 아, 설마?”
영민의 말에 철우의 눈빛이 확 살아났다. 최강의 딜탱으로 만들어주겠다던 영민의 약속. 이미 의지의 갑옷을 뜻대로 만들어내다못해 숙련도를 꽉꽉 채워 ‘생명의 갑옷’으로 진화시키기 직전인 철우에게 지킬 약속은 단 한 가지였다.
“드디어 저도 공격 스킬이 생기는 겁니까?!”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스킬북을 구해주는 것이다.
< 95화 - 아지트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