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아지트 (1) >
“채집꾼들을 모아라.”
동시에 영민은 할 일이 사라진 채집꾼들의 소집을 명했다. 거기에 따로 호위 할 헌터들을 붙이고, 지도에서 몇 곳을 골라 그들을 이동시켰다.
주로 던전 쇼크가 일어났던 지역들. 그리고 이번 1레벨 던전 붕괴가 일어난 곳들의 주변이었다. 동화 현상과 함께 지구에 풀려난 약초들을 채집하기 위함이다.
여전히 ‘비약’에 대한 열망으로 각 길드마다 연금술사를 육성하느라 약초 값이 금 값이 된 지금, 쓸만한 약초들을 긁어모은다면 상당한 자금을 확보 할 수 있었다.
물론 판매를 할 것도, 따로 연금술사를 육성할 것도 아니지만.
‘셀프로 지정 하면 되는 거지. 뭐.’
영민은 길드장이었다. 그것도 압도적인 힘과 지지를 갖춘 절대의 권력자. 적어도 골든 크로스 내에서는 그가 하고 싶은 일을 막아설 자는 없었다.
길드의 전력을 기울여 지역 안정화를 시작한 영민은 뒤로 자신을 ‘길드 전문 제작자’로 지정했다.
길드 전문 제작자.
길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특정 제작 스킬을 올리는 자들.
그 자리를 영민이 겸직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상당한 재료와 자금을 투입해 육성하던 제작자들이 있었지만 그보다 상위의 제작 아이템을 만들어 보이니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결국 길드 전문 제작자라는 것은 보다 상위의 제작 아이템을 뽑아내기 위해 길드에서 가장 숙련도가 높은 한 사람을 밀
어주는 것이기에, 어중간하게 높은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숙련도가 높은 다른 인원이 나타난다면 그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제작자들이 반발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봐야 애초에 ‘제작자’가 되었다는 것은 전투력이 그리 크지 않은 비중 낮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필요가치가 떨어진 이의 사소한 반항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영민의 행보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길드 전문 제작자이자 길드장이니 지원의 수위를 대폭 확대했다.
길드에서 현재 보관하고 있고, 앞으로 획득하게 될 약초 일체. 거기다 길드 전체 수입의 5%를 약초 구입 비용으로 책정한 것이다.
일반적인 길드에서는 오히려 길드장이 탄핵을 당할 만한 미친 짓이었지만 이미 영민의 공포를, 또 버프를 체감한 이들은 반대라는 것을 몰랐다.
특히 모든 재정이며 정보줄을 틀어쥐고 있는 백인엽이 영민의 발 아래 무릎 꿇고 있음에야.
그렇게 정해진 것 자체도 상위의 소수만 아는 일로 넘어갔다.
“시킨 일은 잘 되고 있나?”
“물론입니다.”
그렇게, 지역의 몬스터들이 정리되고 빠르게 안정화를 찾아가는 동안 영민은 골방에 틀어박혀 제작 숙련도 노가다에 열중했다.
얼른 레벨을 올려 고급 강화 기능을 열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지만 할 수 있을 때 해먹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당장 그를 어렵게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얼마 없기도 했고.
가람과 민호, 철우는 사냥을 계속하도록 했다. 그들은 길드의 소속이 아니니 던전 진입 금지 명령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대신 골든 크로스 소유의 던전에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권한 또한 있었기에 취향껏 던전을 골라 제대로 꿀을 빠는 중이었다. 그들이 내는
것이라고는 던전 입장료가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결국에는 영민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는 것이기에 소모값은 0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꼬리를 밟힐 일은 없겠지?”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제가 이 방면으로는 전문가입니다.”
영민의 거듭되는 질문에 얍삽한 미소로 답하는 백인엽.
영민이 그에게 지시한 것은 다름아닌 비자금 조성이었다. 그것도 아주 거액의.
영민의 힘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자신의 지분을 챙겨주겠다는 약속 때문인지 백인엽은 아주 열성적으로 일을 했다.
애초에 헌터 일이라는 것 자체가 정해진 단가로 물건을 사고 파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회계를 조작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것이 제 목을 죄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대한민국 10대 길드 씩이나 되는 집단을 움직이는 인물이 마음 먹고 리베이트를 챙기고자 한다면 수십, 수백억을 모으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하게 될 영민은 백인엽과 적당한 선을 유지한 채 그의 행동들을 눈감아주었다.
거기에 또 한 가지. 설사 누군가에게 발각 된다 해도 그것은 ‘백인엽의 비자금’인 것으로 보이게끔 따로 조치도 취해두었다.
‘잘 가지고 있어라.’
때가 되면 그 모든 비자금은 영민의 주머니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운 좋게도 사람들이 그에게 주목하지 못하게 만들 또 하나의 일이 터졌다.
“테러라고?!”
“그래. 미국 곳곳에 테러가 일어나고 있대. 이른바 던전 테러!”
“던전을 강제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거지?”
“그렇다니까. 아직 고레벨 던전은 없다지만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서 피해가 상당하다나 봐.”
바로 테러.
테러리스트들이 던전 스톤의 활용법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인지, 이제야 충분한 양을 모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던전 브레이크를 이용한 테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즉시 헌터협회와 지역 길드들이 나서기는 했지만 던전 쇼크 이후 잠시 방심하고 있던 터라 피해가 큰 모양이었다.
더구나 풀려난 1레벨 던전 몬스터의 청소를 위해 헌터들이 분산되어 있던 터라 대응은 더욱 늦어졌다.
누구의 짓일까. 범인은 즉시 밝혀졌다. 이슬람 무장단체 중 하나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히고 나선 것이다. 더불어 미국과 그의 우방국가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검문을 강화하여 폭발물을 반입하는 것만 차단하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헌터라는 막강한 전력이 있고 아공간, 인벤토리 등 다양한 공간수납 능력들이 존재하기에 그것도 무용했다.
그렇다고 이슬람권의 모든 헌터의 입국을 막거나 잡아들인다? 큰 일 날 소리다.
‘마음이 소리’나 ‘진실 판별’ 등의 특별한 감지 능력을 지닌 인물을 대동하면 거를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해당 능력자가 턱 없이 부족했다.
난처하기 짝이 없는 상황.
미국과 그 우방들이 고심하고 있을 것이 뻔하게 그려졌다.
물론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다.
‘확실히 빨라.’
영민은 테러 소식을 듣고도 놀라는 대신 고심에 빠졌다. 강태성의 기억으로 일을 벌인 이슬람 무장단체가 누구인지도, 본거지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놈들이 제대로 일을 벌이는 것은 지금보다 몇 년은 뒤여야 했다. 그것이 앞당겨진 것은, 지금까지의 변화보다 상당히 큰 문제였다.
‘이러면 마나 농도가··.’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수록 지구의 마나 농도는 짙어진다.
던전 쇼크 때는 엄청나게 증가하고, 수준이 낮다고는 해도 이번 1레벨 던전의 붕괴 또한 마나 농도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미치겠네.”
변화는 일정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어느 한 기점이 되는 순간, 둑이 터지듯 급물살을 일으킨다.
강태성의 기억을 통해 그것을 알고 있는 영민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마나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마나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일반인이 헌터로 각성할 확률이 더 높아지고, 기존의 헌터가 마나를 쌓아 다음 등급으로 승급할 가능성도 높아지니까.
더 많은 몬스터들과 더 강한 몬스터들이 출현하게 되지만 그에 대항할 힘도 함께 주어지는 것이다.
“아직은 괜찮은 건가?”
길드 내의 일반인 직원들을 보니 다행히도 아직은 괜찮은 듯 싶었다.
던전 내부에 진입하는 것처럼 적응 하는 단계 없이 즉각 마나 농도가 짙어지는 경우 일반인들이 ‘마나 질식’이라 불리는 현상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단계별로 적응할 시간을 두고 높아질 경우 헌터 각성을 하지 못한 일반인조차 평균 이상의 힘을 발
휘 할 수 있게 된다. 신체가 조금이나마 마나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며 일종의 강화 인간으로 탈바꿈 하는 것이다.
그만큼 인간의 적응력은 놀라웠다.
그러나 지금은 어떨까? 원래대로라면 3년의 주기를 두고 던전 쇼크가 일어나고, 어느 정도 마나에 적응이 된 상태에서 1레벨 던전의 붕괴와 이슬람 무장단체의 테러 등이 일어났어야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몇 해 씩은 빨라졌다.
이쯤되면 마나 적응력이 약한 일부 사람들은 마나 질식을 염려해야 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나마 아직은 비교적 저레벨 던전에 테러가 일어나고 있지만 놈들이 생각을 고쳐먹고 7레벨 던전이나 곧 생겨날 8레벨 던전을 폭파 시키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시킨다면?
7레벨부터는 품고 있는 마나의 수준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차이 났으니 순식간에 인류의 상당수가 죽어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아!!”
한참을 고민하던 영민이 무언가를 떠올려냈다.
강태성의 기억 속에 마나 농도를 조절하기 위한 여러 장치와 방법들이 잠들어 있었지만 대부분 현재의 상황과 기술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들.
그러나 어떠한 기술력도, 다른 이들의 도움도 필요가 없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단숨에 지구의 마나 농도를 낮춤과 동시에 부수적인 효과 또한 얻을 수 있는 방법.
‘랜덤이기는 하지만··.’
물론 그런 효과를 거저 얻을 수는 없었다. 일단 재료비가 무척이나 비쌌고, 성공 여부도 불확실을 넘어 희박했다. 강태성이라면 절대로 도전하지 않을 일. 그래서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 있던 가능성을 끄집어 냈다.
영민이기에, 행운 Max의 사나이기 때문에 시도 할 수 있는 유일한 패를 과감히 꺼내 들었다.
“마나 농도 3.4라··.”
먼저 코인 상점에서 구입한 것은 마나 농도 측정기였다. 곧 지구의 기술력으로도 상용화가 가능한 기술이지만 시간을 들이기보다 코인을 조금 소모하는 쪽을 택했다.
측정된 마나의 농도는 3.4다. 원래는 마나 농도 3.5만 되어도 적응력이 약한 사람들은 죽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위험한 수치였다. 그나마 두 번의 던전 쇼크를 겪으면서 마나에 빠르게 적응을 하기 시작해서 한계치는 좀 더 높아졌을 테지만 앞으
로 생겨나는 1레벨 던전들이 모두 입구가 열린 채 등장하고, 이슬람 무장단체가 계속해서 테러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여유 있는 수치는 아니었다.
마나 농도를 확인한 영민은 백인엽에게 무너진 사옥 주변을 모두 물릴 것을 지시했다.
어차피 하는 일이라봐야 인부와 장비를 써서 잔해를 치우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어렵거나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영민은 자신이 만들어낸 폐허의 현장 한가운데에서 코인 상점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의 소모형 아이템을 구입했다.
[세계수의 씨앗][재료][소모]
세계수로 성장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은 씨앗. 대지와 대기의 마나를 빨아들여 성장한다.
싹을 틔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며 영양을 보충해줌으로써 성장을 도울 수 있다.
무려 세계수의 씨앗. 예전 엘프들을 꼬셨던 아이템 ‘오래된 가지’보다도 세계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재료형 소모품이었지만 그래봐야 확률이 극악하기는 오십보 백보였다.
그럼에도 코인은 어마어마하게 잡아먹어서, 영민이 쓸데 안쓰고 겨우겨우 아껴서 모은 코인의 대부분을 투자해야 했다.
“에라, 모르겠다.”
세계수의 씨앗을 땅에 심은 영민은 피눈물을 머금고 인벤토리에서 한 가지 아이템을 더 꺼냈다.
바로 엘릭서.
세계수의 씨앗을 발아시키기 위한 영양제 역할이었다.
세계수의 씨앗이 영양을 흡수하는 것은 단 한 번. ‘비약’이랄지, 최상급 체력 포션 따위를 사용 할 수도 있었지만 투자한 코인이 워낙에 컸던지라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과감히 투자한 것이다.
세계수의 씨앗에 대한 투자금이 너무 커서 행운 Max를 믿고 맹물을 부어버릴까도 고민했지만 행운이 무조건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생각에 큰 마음을 먹은 것이다.
이제 남은 엘릭서는 단 하나.
핵심 재료가 되는 만드라고라가 쉽게 발견되는 것도 아니고, 연금술 숙련도가 100%에 가까운 지금도 제작 성공률이 높은 편은 아닌 만큼 부담은 있었지만 눈 딱 감고 저질러버렸다.
[세계수의 씨앗이 발아합니다.]
[발아한 세계수의 씨앗이 대지와 대기의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세계수의 성장은 흡수하는 마나와 양과 질에 비례합니다.]
“됐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의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히든 퀘스트. ‘세계수를 싹 틔워라!’를 완료하셨습니다.]
[극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히든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영구 적용 중인 ‘세계수의 축복’이 강화됩니다.]
[연계 퀘스트 ‘세계수를 지켜라’가 시작 됩니다.]
< 94화 - 아지트 (1)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