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7레벨 던전 (2) >
중위권 이상을 올라간 적이 없다고는 하나 대한민국 10대 길드라는 이름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철우의 엄청난 맷집에 놀라고 몬스터들의 공세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모두들 제 정신을 차리고 맞서갔다.
같은 A등급의 수준이라고는 하나 인간과 몬스터 간에는 분명 실력 차이가 존재했다. 스킬의 활용이나 연계 등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7레벨 던전까지이지, 8레벨 던전 몬스터들은 또 사정이 달랐지만 아직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는 헌터들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놈들을 물리쳐갔다.
“마나를 아껴라! 전투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렇다보니 조금 마나를 낭비하는 모습도 보였다.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하다보니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스킬보다 화려하고 있어보이는 스킬을 쓰는 경향들이 있는 것이다.
영민은 그런 이들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나서지 않은 채로 일갈을 던져 그들을 일깨웠다.
확장시킨 기감에 잔뜩 걸려든 기운들이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미션 이름처럼 이번 던전의 형태는 ‘결사의 돌파’였다.
이미 던전 내부에는 10대 길드라해도 일일이 상대하자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A등급 수준의 몬스터도 그들보다 많았고,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하위 몬스터들은 셀 수조차 없었다.
결국 피해를 줄이는 방법은 ‘돌파’를 하는 것 뿐이다.
덮쳐오고 막아서는 몬스터를 송곳처럼 뚫고 돌파해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면 나머지 몬스터들은 지리멸렬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각개격파가 가능한 것이 이 던전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최단거리 돌파를 택하더라도 마나를 몽땅 쏟아부어가며 극한까지 팀 플레이를 펼쳐야만 보스 몬스터에 닿을 수 있을 정도인데 지형과 환경도 도와주질 않는다. 미션 명에 ‘폭풍 결사대’라는 말이 붙었듯이 하필이면 날씨마저
폭풍우가 몰아치는 때인 것이다. 비는 내리고, 땅은 질척거리고, 몬스터들은 꾸역꾸역 몰려오는데 간간이 상태이상을 주력으로하는 놈들도 있어 정신력을 바닥까지 끌어내린다.
그리고 날아오는 정신 공격들. 혼란, 공포, 횐각 등 인간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정신 공격들은 아직 싸울 여력이 있는 자들도 멍하게 만들고 심한 경우 자결을 하도록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키(key)는 있지.’
아무리 극한까지 몰아붙여 실력과 정신력을 시험할 수 있는 장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이 어려운 던전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공략의 열쇠가 되는 아이템이 있다는 것.
물론 이것이 없이도 공략은 가능하지만 난이도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변할 수도 있었다.
“아직도 착용하지 않은 자들은 지급한 아이템으로 갈아 신어라!”
바로 [폭풍 결사대의 신발].
고작 유니크 등급에 방어력도 A등급의 헌터가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영민은 던전에 진입하기 전 인원수에 맞춰 해당 장비를 지급한 상태였다.
이 장비야 말로 이 던전에, 이 미션에 최적화 된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폭풍을 뚫고 적을 타격한 결사대가 신었다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이 신발은 비가 오는 지형에서 오히려 방어력과 이동속도가 20%나 증가하고 넉백효과 무시, 정신계열 저항 확률 50%상승이라는 엄청난 특수 효과가 붙어 있었다.
어쩌면 이 신발을 신었던 자들이 경험한 것이 바로 이 던전의 상황이 아닐까 생각 될 만큼 딱 들어맞는 조건이다.
“광역 도발!!”
철우가 다시 한 번 광역 도발을 발휘해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사이, 지급된 아이템보다 훨씬 뛰어난 자신의 장비를 믿고 교체하지 않았던 자들이 서둘러 장비를 교체했다.
아직도 꺼림직하기는 했지만, 질척거리는 바닥에 푹푹 빠지는 바닥에서는 제대로 된 전투를 하기도 어려웠고, 힘도 배로 들어가기에 속는 셈 치고 바꿔 착용한 것이다.
“이건··!”
단지 장비를 하나 바꿔 착용했을 뿐인데, 심지어 한 두 단계 이상 하위의 장비로 갈아끼운 것인데 움직임이 훨씬 편해졌다.
점점 늪지대 같아지는 지형 효과를 무시할 뿐 아니라 정신이 한층 고양되며 집중력까지 상승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눈부신 광휘가 그들을 훑었다. 영민이 처음으로 힘을 발휘한 것이다.
“좋았어!”
성기사 계열의 전매특허인 광역 버프.
주문 사용자들이 거는 것과는 또 다른 청량함이 전신에 차올랐다.
아니, 수준 또한 확실히 차이가 났다. 보통의 보조 주문들은 일정 수치 만큼의 능력을 증폭시지만 영민의 광역 버프 ‘신성한 광휘’는 일정 퍼센티지 만큼 능력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숙련도 상승이 어려운 대신 숙련도만 채운다면 30%의 능력 증폭까지도 이끌
어내는 신성한 광휘였기 때문에 그들이 느끼는 고양감은 결코 기분탓이 아니었다.
‘성역 선포까지는 필요 없겠지.’
거기에 일정 지역을 신성한 대지로 만드는 ‘성역 선포’가 더해지면 효과가 무려 10배로 증가한다.
일정 지역 한정이기는 하지만 3배까지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
강태성의 미래에서도 ‘요한’이 죽기 전까지 그의 팀이 꽤나 재미를 보았던 버프 콤보였다.
문제는 S등급 헌터들이 3배의 능력을 가지고도 어쩌지 못할 만큼 적들도 강력하다는 사실이었지만.
“돌파한다!”
영민의 명령에 따라 헌터들은 송곳이, 아니 예리한 창이 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예리한 찰날 같은 대형을 이루며 눈앞의 적들을 휩쓸어갔다.
‘편하긴 하구만.’
그 안에서 영민은 신성한 광휘의 범위만 벗어나지 않도록 위치를 잡으며 느긋하게 따라가기만 했다.
“전방 트롤!”
“우측 오우거!”
원래 팀을 이끌던 팀장들이 다수였기에 지휘는 일사분란했다. 가장 먼저 적을 발견한 인원이 소리치면 팀별로 각기 대응을 하는 방식이었다.
어차피 전체적인 전략이 ‘돌파’로 정해진 만큼 순간순간 대응으로는 그 편이 더 나아보였다.
영민도 크게 제지하지 않고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그가 힘을 써야 할 곳은 가장 마지막, 보스전에서였다.
그 전까지야 가만히 지켜보며 따라가기만 하면 될 일이다.
“파이어 스웜! 체인 라이트닝!”
다만 철우와 민호, 가람은 마음껏 날뛰었다. 그들의 강함을 다른 헌터들에게 확실히 인지시킬 필요도 있었고, 이번 7레벨 던전 공략은 그들에게도 확실한 성장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더불어 영민의 안정적인 경험치 수급처이기도 했다.
모처럼 7레벨 던전에까지 들어와서 경험치가 허공에 날아가는 것을 마냥 보기만 해야하는 그를 대신해 세 사람은 열심히 몬스터를 잡고, 그에게 경험치를 분배했다.
더불어 소수의 아이템도. 당연히 영민의 행운 때문에 ‘소수’이긴 했지만 ‘알짜’이기도 했다. 본래는 드랍 형태로 나타났어야 할 아이템들 중 등급이 높은 것들만 골라 인벤토리에 쏙쏙 들어온 것이다.
영민이 그렇게 실속을 챙기는 동안 다른 헌터들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독 고블린이다!”
“탱커 앞으로! 화력으로 쓸어버려!”
트롤, 오우거와 같은 중형급의 강력한 몬스터는 물론 일명 독 고블린으로 불리는 ‘독의 달인, 고블린’과 같은 특수 몬스터들도 줄을 지어 나타났다.
상대하기에는 차라리 이같은 특수 몬스터들이 더 까다로웠는데, 육체파는 단순히 육체적 능력과 공격 스킬만 경계하면 되지만 이 놈들은 특수효과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나 서로 다른 특수 효과들이 중첩되거나 ‘마비’ 같은 까다로운 능력에 당
하면 다른 몬스터들의 공세를 버티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특수 몬스터들 중 대부분이 낮은 체력과 빈약한 육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때문에 헌터들은 일단 탱커를 앞에서 어떻게든 막아내고, 주문사용자들의 강력한 화력으로 일시에 쓸어버리는 전법을 주로 사용했다.
“윽, 다크 프로그!”
“혀에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 닿으면 부패한다!”
물론 특수 능력과 높은 육체 능력을 지닌 까다로운 개체도 등장했지만 그럴 때에는 소수 팀이 전담으로 붙어 끝장을 내거나 개중 가장 강한 몇몇이 나서서 일대일로 승부를 벌였다.
나머지 인원은 전투가 방해 받지 않도록 주변을 차단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하피다!”
“그리폰! 그리폰도 있다!”
“제길, 와이번까지!”
하지만 가장 까다로운 상대는 역시 하늘을 날 수 있는 공중 몬스터들이다. 하피, 그리폰, 와이번 등 허공을 배회하며 호시탐탐 먹잇감을 채갈 기회만 노리는 녀석들이 하강을 할 때면 잠시 전투를 멈추고 납작 몸을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7레벨 던전이라 이 정도지, 8레벨이나 9레벨 던전이었다면 드레이크 쯤이 등장했을 지도 몰랐다.
“돌파를 멈추지 마라!!”
이런 상황에서 돌파를 이어가기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 고 있었다.
누군가가 악을 쓰고 지르는 고함 소리에 헌터들은 어떻게든 힘을 짜내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제법인데.’
극한의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는 그들을 보던 영민은 퍽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실력이면 상당히 쓸만 했다.
그래봐야 철우와 민호, 가람의 활약이 압도적이기는 했지만 몇몇의 인원을 눈여겨 본 뒤 속도에 맞춰 함께 이동했다.
“끄으으··.”
“버텨라! 뚫어내기만 하면··!”
돌파는 그야말로 처절했다.
영민의 버프와 폭풍결사대의 신발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질릴 정도로 밀고 들어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것은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일대일로 싸워도 쉽게 승리를 따내기 어려운 강력한 존재들이라면 피로
는 배 이상 빠르게 쌓이는 법이다.
하물며 지금 그들은 오히려 산처럼 쌓인 몬스터들의 진지로 쳐들어가는 입장이니 체력과 마나가 고갈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직 정신력 뿐.
간간이 포션과 자연 재생력으로 차오르는 체력과 마나를 쥐어짜내며 악과 깡, 그리고 오기로 적들을 돌파해나갔다.
‘슬슬 요령들이 붙는 모양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안 좋아졌지만 상황이 안 좋아질수록 요령이 붙었다. 어떻게 해야 힘을 덜 사용하고 적을 죽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짧은 순간 힘을 회복 할 수 있는지 몸으로 느끼고 깨달아가는 것이다.
차륜전에도 요령이 붙어 서로 간의 연계나 협력도 점점 매끄러워졌다.
그 동안 타고난 재능 덕에 큰 고생 없이, 힘을 제대로 써볼 기회도 없이 무난하게 던전을 공략해오던 이들이 처음으로, 혹은 오랜만에 입에 단내가 나도록 극한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전투에 열중했다.
‘거의 다 왔군.’
슬슬 아군 쪽에서도 중상자가 나오기 시작하자 영민은 그제야 거리를 가늠했다. 보스 몬스터와의 거리를.
멀지는 않았지만, 일전을 벌이기에는 부족했다.
어떻게 할까. 마음만 먹으면 단신으로 돌파해서 보스 몬스터의 목을 따버릴 수도 있지만 영민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활과 정령술, 회복 주문을 이용해 아군이 아주 치명적인 상태에 빠지는 것만 막아내며 계속해서 돌파를 강행했다.
‘이미 누군가 성공한 일인데, 이 인원으로 실패한다는 건 각오의 문제지.’
결코 이 미션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강태성의 기억을 통해 영민은 알고 있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던전에서 주어지는 상황들은 그저 임의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 겪었던’ 어떠한 상황들이라는 것을.
어쩌면 던전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과 같은 것이었다.
언젠가, 어떤 세계에선가 실제로 있었던 상황의 재구성이랄까. 또한 미션은 ‘누군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성공한 목표일수도, 실패한 목표일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중 이번 ‘폭풍 결사단의 돌파’는 성공한 전적이 있는 케이스였다. 그런 것을 실패한다는 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각오, 마음가짐의 문제라는 뜻이었다.
영민의 꿋꿋한 돌파 명령에 헌터들은 이를 악 물면서도 힘을 짜내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미친 던전, 미친 미션에 도전한 신임 길드장이 죽도록 미웠지만 일단은 살아남고 볼 일이다. 어차피 이대로 머뭇거리면 남은 것은 죽음 뿐.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명령에 따라 계속해서 돌파하는 것만이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고생들 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도달하는 순간, 영민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섰다. 아직 한창 전투 중이건만 오로지 돌파 명령만을 내리던 입에서 종결의 뉘앙스를 지닌 말이 흘러나왔다.
“성역 선포.”
다음 순간,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몸이 한순간에 회복되며 한계 이상의 힘이 전신 가득히 차올랐다.
< 92화 - 7레벨 던전 (2) > 끝
ⓒ 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