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넝굴째 굴러온 선물 (2) >
부길마의 계획은 즉흥적이었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이러한 상황을 상정하고 계획해두기라도 한 것처럼 물흐르듯 막힘이 없어 특별히 어긋나는 것도 없었다.
‘위험한 놈이군.’
놈은 상당한 계략가이자 야심가였다. 스스로가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해 다른 누군가를 조종해야지만 그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타입이기는 했지만 장기말만 훌륭하다면 위험한 일들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위험 분자였다.
‘나쁘지 않아.’
영민은 그래서 그가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누군가를 완전히 믿는 것은 무리다. 지금 가장 믿는 것은 가람과 민호, 철우이지만 특수한 상황이 되었을 때, 그들이 절대 돌아서는 일이 없을 거라 순진하게 믿지는 않았다.
절망과 공포로 범벅이 된 세계와 상황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몇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골든 크로스의 부 길드 마스터 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백인엽은 써먹기에 괜찮은 카드였다. 언제든 뒤를 조심하고 있기만 하다면 깨끗하고 더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맡길 수 있는 인재였다.
실제로 그가 제시하는 계획에는 그 두 가지가 한껏 뒤섞여 있었다.
“좋아. 기회를 주지. 단, 수작을 부리거나 어긋날 경우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구명줄을 잡았기 때문일까. 백인엽의 표정이 좀 전과 달리 환해졌다. 그 전에는 없었던 생기까지 돌았다.
S등급이 아니라면 포기 할 수밖에 없던 계획과 야망이 다시금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일이 끝난 뒤에는 전과 같이 부 길드 마스터라는 자리에 있지 못하겠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능력이라면 천천히 인정을 받고 언젠가 비슷한 위치까지 오를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턱걸이이기는 해도 헌터로서의 능력 또한 A등급인 백인엽은 자신과 자신의 일 처리 능력을 굳게 믿었다.
* * * * *
“형, 이게 무슨 일이에요?!”
다시금 연락을 취해 만난 민호와 가람, 철우는 난데없는 통보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폭탄을 배달받고, 의심이 가는 놈을 족치러 갔던 영민이 대뜸 10대 길드 중 하나를 접수하고 돌아온 것이다.
영민의 능력이 이미 A등급 중 최상급에 이르렀다지만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행보였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쌩뚱 맞은 농담인가 싶었는데, 곧 신문과 TV, 인터넷을 도배하며 올라온 [충격! 골든 크로스의 성자 강정오. 중국 길드의 습격으로 사망하다]나 [골든 크로스의 새로운 주인은?], 혹은 [성자 강정오의 후계자는 럭키맨?] 같은 뉴스들을 보
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하나 같이 성자 강정오의 뒤를 이어 럭키맨을 골든 크로스의 수장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골든 크로스의 강정오가 중국의 어떤 길드가 보낸 S등급의 자객에게 습격을 받았고, 마침 인근에 있던 럭키맨이 그를 도와 치열한 공방을 벌였으나 끝내 강정오와 자객이 양패구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정오가 죽기 전 럭키맨에게 골든 크로스를 대신 이끌어 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인데 현장에 있던 수 많은 헌터들이 증인이 되어주었다고 했다.
이후 강정오의 죽음으로 수장을 잃은 골든 크로스의 헌터들이 먼저 그에게 이끌어 줄 것을 청했고, 럭키맨이 고민 끝에 받아들였다는 것까지 아주 아름다운 미담으로 사건이 포장되었다.
골든 크로스와 같은 거대한 집단의 수장이 교체되는 것으로는 너무 간단하고 단순하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애초에 기업의 경영진을 뽑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라 그러려니 생각이 되기도 했다.
이후 복잡한 서류 문제나 국가와 헌터협회의 승인을 받는 일, 일반 길드원들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일 따위는 백인엽이 맡아서 처리를 했다.
대외적으로는 부 길드 마스터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나서자 나머지 길드원들을 규합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평소 워낙 연기를 잘 해두기도 했고, 강정오와 럭키맨의 이미지가 좋았던 탓이다.
대신 그들을 더욱 더 수월히 뭉치게 하기 위해서 흑갈파에 대한 악의와 복수심을 강조하기도 했다.
[럭키맨 체제에 들어간 골든 크로스, 헌터 이탈률 10% 안팎!]
[무서운 장악력을 보여준 럭키맨, 다음 행보는?]
[럭키맨의 골든 크로스. 중국과 한 판 붙나.]
그 결과, 골든 크로스를 큰 손실 없이 이어받는 것에 성공했다. 아직은 무언가 제대로 내보인 적 없는 이름 뿐인 길드장이지만 영민에게도 결코 무시 할 수 없는 세력이 생겨났다.
“그러게.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네.”
“이건 어쩌다보니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
본인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일이 흘러간 터라 영민도 별로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사실 크게 체감상 달라진 것도 없다. 직함만 달았을 뿐, 어지간히 잡다한 일들은 백인엽과 다른 보좌진들이 다 처리를 했고, 영민은 설렁설렁 업무나 파악하고 중요한 일들에만 결제를 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누가보면 ‘바지 사장’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영민이 작정 했을 경우 언제든 길드를 틀어 쥘 수 있었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영민은 오히려 지금처럼 헐렁한 상황이 좋았다.
강태성도 그랬지만 머리 아파가며 책상 위에서 씨름하느니 던전에 들어가 강한 적과 전투를 치르는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전혀 달라질 건 없어. 우리는 하던 대로 던전이나 돌고, 아이템이나 챙기면 그만이야.”
명색이 10대 길드인 골든 크로스를 접수한 덕분에 활동 반경도 훨씬 늘어났다. 길드 소유의 고레벨 던전을 마음껏 사용 할 수도 있고, 고급 정보들에 접근 할 수 있었으며 드디어 ‘7레벨 던전’에 도전할 권한이 생긴 것이다.
던전 내부 크기부터 미션의 스케일까지 기존과 궤를 달리하는 7레벨 던전의 경우 개인이나 팀 단위의 소수 인원으로는 애초 도전조차 할 수 없게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기에 ‘도전 자격’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최소 대형으로 분류될 정도의 길드를 운영하고 일정
인원 이상의 헌터로 공격대를 꾸릴 필요가 있었다.
“역시 대장은 짐작 하기 어려운 분입니다.”
세 사람은 그런 말을 들어도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키기 어려워보였지만 어쨌든 변화에 적응하며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영민이 제대로 크게 사고를 쳐준 덕분에 던전은 한동안 세 사람만 진입을 해야했다.
당분간은 자잘한 일들과 얼굴을 비쳐야하는 일들이 많아 영민이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이다.
점차 6레벨 던전 몬스터에 적응을 해나가고 자신의 스킬을 제대로 이해해가는 것도 있었지만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길드의 지원 덕분에 클리어 속도를 점점 빨라졌다.
그러나 길드원이라면 응당 내놓아야 할 전리품들은 온전히 자신들이 가져갔다. 대장인 영민이 길드의 수장이 되었으니 그들 역시 골든 크로스의 소속으로 보기 쉬웠지만 엄연히 그들은 영민 개인과 계약을 맺은 일종의 용병인 것이다.
영민도 쿨하게 그들이 던전을 구하고 입장을 준비하며 들어가는 비용들을 제 월급에서 까라고 이야기했기에 세 사람은 어느 때보다 편하게 던전을 돌며 수련을 쌓을 수 있었다.
“중국 쪽 움직임은?”
“아직 조용합니다. 아무래도 화살이 돌아올까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중국의 보복, 흑갈파의 보복은 없었다. 아무래도 자국 내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모양.
상대가 그저 한국이기만 하다면 별의별 수작질과 선동으로 맞서며 문제를 일으키겠지만 그들 역시 골든 크로스와 손을 잡고 몰래 한국에 진출하려 했던 데다 믿었던 S등급의 헌터, 왕 첸을 허무하게 잃어버린 까닭에 분위기를 살피고 있는 듯 했다.
놈들이 움직이는 것은 충분한 명분과 정보가 모인 다음이겠지.
중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해 강정오를 암살한 헌터가 어디 소속인지는 언론과 대중에게 밝히지 않았기에 흑갈파와의 관계를 알고 있는 자들은 아직 소수였다.
“국내에 복수를 원하는 목소리가 높기는 합니다만, 피해자 코스프레와 길드를 정비 중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서 시간을 끌 수 있을 듯 합니다. 어느 시점이 넘어가면 잊혀지겠지요.”
명색이 길드장이 죽었으니 복수를 해야한다는 주장도 대중과 헌터들 사이에 많았다. 하지만 역할이 컸던 만큼 빈자리도 큰 강정오를 적당히 팔면 대충 얼버무릴 수 있었다.
“그래. 잘했다.”
영민은 사실 역으로 먼저 놈들을 치면 어떨까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흑갈파는 S등급 헌터가 몇이나 있는 중국의 최상위 길드 중 하나였지만 S등급 헌터에게서 흡수 할 수 있는 ‘특성’이 상당히 매력적인 유혹인 까닭이다.
더구나 새로 익힌 신성 폭발과 뇌신 강림, 버서크 등 몇 가지 능력을 이용하면 그럭저럭 해볼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영민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골든 크로스를 정상화 시킬 때까지는 잠시 참기로 했다.
빠르게 치고 나가는 것은 좋지만 과하게 서두르다가는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었다.
“아, 그리고 해외 파병 요청은 말씀 하신 대로 길드 내부 사정을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그래. 거기 가봐야 개고생이야. 괜히 나가 있는 동안 뒤통수 맞기도 좋고.”
골든 크로스를 수중에 떨어뜨리는 동안 다른 길드들의 공작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타이밍 좋게도 다른 길드들은 ‘해외 파병’ 문제로 시끌시끌했다. 이쪽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이번 2차 던전 쇼크를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몬스터들에게 땅이 넘어가거나 아직까지 항전 중인 몇몇 국가에 대형 길드를 중심으로 헌터들을 파견해달라는 국제사회와 헌터협회의 요청이 있던 것이다.
던전 공략에 대한 보조와 지원을 받으면서 남의 나라 던전들을 공짜로 집어삼킬 기회였기에 언론에서도 ‘다시 없을 기회’라 소리 높여댔지만 영민은 이 파병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여력이 있는 길드들에서는 너도나도 헌터들을 내보냈지만 길드의 상당한 전력을 해외로 내보낸 동안 경쟁 길드에게 뒤통수를 맞거나, 정작 자신들의 영역에 생겨난 신규 던전들을 공략하지 못해 낭패를 겪는다는 것을.
때문에 어차피 영민의 지시로 사업을 축소하는 김에 잉여 전력을 해외로 돌리려던 백인엽은 온갖 엄살을 부리며 요청을 거절해야했다.
‘특히 아프리카로 간 놈들은··. 어휴! 장난 아니었지.’
잠시 미래를 떠올린 영민이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저었다. 특히나 이번 파병에서 아프리카로 지원을 보낸 이들은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실컷 도와주러 갔더니 게릴라를 펼치는 원주민 헌터들에게 공격을 받지 않나, 던전 쇼크로 인해 동화 현상이 가속화되며 마나 농도가 짙어진 땅에서 변이된 풍토병을 만나 죽어나가질 않나.
결국은 어찌어찌 수복을 해내긴 하지만 곧 바로 다음 던전 쇼크를 걱정해야 할 만큼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다 돌아온 그들의 몰골은 이미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한 자리 차지했던 강태성이기에, 그때의 참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덕에 얻은 것도 많았지만.
“그 동안 우리는 전력을 추스르고 국내 던전 공략에 박차를 가한다.”
“예! 아, 그리고 조만간 각 헌팅 팀의 팀장들과 자리를 한 번 가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럽다면 갑작스러운 제안이지만 영민은 백인엽의 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길드에 남기는 했지만 영민의 능력에 대해 불신하고 있는 자들. 그들을 직접 만나 휘어잡아 달라는 것이다.
어쨌든 영민 역시 그들과 동일한 A등급이었고 심지어 영민은 E등급부터 시작해 밑바닥부터 올라온 케이스가 아니든가? 성장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는 해도 애초에 각성 할 때부터 A등급인 그들이 갖고 있는 ‘선민의식’에는 다소 거슬리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방치했다가는 함부로 기어오르거나 명령에 불복하는 상황이 발생할수도 있기에 백인엽이 미리 그들과의 자리를 만들려는 것이다.
선민의식이고 나발이고 결국 헌터들 사이에서는 강한 놈이 장땡이니까.
“그러지.”
그 만남을 영민도 기대하며 하얗게 이를 보이며 웃었다.
< 90화 - 넝굴째 굴러온 선물 (2) > 끝
ⓒ 갈드